19화. 망명자 (2)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추측컨대 그는 자격이 안 된다는 소리를 평생 처음 들어본 듯했다. 그러나 내가 눈을 감아버리자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했다. 그는 혼자 우두커니 서 있다가, 한참 뒤 내키지 않은 걸음을 떼었다.
- 술법은 맹목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냈다. 내게도 그런 말을 해줬던 사람이 있었다. 스승이자 동료이며, 어쩌면 연인이었을지도 모를, 에신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을 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잘 살아 있을지 궁금했다. 암살자 목숨이라는 게 워낙 가볍기 그지없는지라.
나흘이 지나자 나는 목발에 의지하여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의사는 내 회복속도가 경이롭다며 자료로 남기겠답시고 부산을 떨었다. 소심하기 그지없는 양반이었다. 차수진이었더라면 피 정도는 뽑아갔을 텐데.
텐트 밖으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풍경은 놀라울 정도로 확장된 진입지점이었다. 혈투를 벌였던 참호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조립식 주택과 나무방책, 포진지, 망루가 자리를 차지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띈 건 인원의 증가였다. 군인은 물론이거니와 민간 기술자들도 적잖게 보였다. 여기저기서 망치질, 톱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2륜 차량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부팀장님, 마침 찾아뵈려던 참이었습니다.”
반가운 얼굴이 다가와 인사했다. 작전장교였다. 그는 혼자만 창칼이 빗나간 듯 팔다리가 모두 멀쩡해보였다.
“밖에서 뵙게 되니 더 좋네요.”
“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어떤 용무이신지요?”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지난번 전투에서 아군을 도왔던 토착종족이 진지 내에 머물고 있습니다. 통역 한 분이 도와주고 계십니다만, 그가 부팀장님만을 원하고 있어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중입니다.”
“그럼 그쪽으로 안내해주시죠.”
나는 작전장교의 인도를 받아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조립식 주택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만 같은 큼지막한 막사였다.
문을 열자마자 눅눅하고 축축한 공기가 반겨주었다. 막사 안에는 바닥재가 없었다. 물을 채우다 만 듯한 얕은 도랑만이 자리했다.
“아무리 봐도 저는 익숙해지지가 않는군요.”
작전장교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공룡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크록이 도랑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크록은 날 발견하고는 피막에 싸였던 눈을 뜨며, 바람 새는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비늘 없는 자들의 전사가 왔군.”
“잠깐만, 너 그거........”
나는 그의 우람한 손이 쥐고 있는 물건을 가리켰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저건 책이 틀림없었다.
“비늘 없는 암컷이 우애의 증표로 남긴 선물이다. 아주 정교한 기술로 제작된 물건이더군. 너희가 이룩한 문명에 경의를 표한다.”
비늘 없는 암컷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차수진이 조직샘플을 떼어가는 대가로 굴러다니는 책 한 권을 안겨준 모양이었다. 내가 궁금한 건 그가 책을 읽을 줄 아는가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아직 너희의 문자를 알지 못한다. 차차 배워나갈 생각이다.”
크록이 내 마음을 들여다본 듯이 말했다. 나는 그와 대화할수록 기묘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다른 크록들과는 느낌이 너무 달랐다. 눈을 가리고 들으면 영국신사가 따로 없었다.
“좋아, 대화를 해보자고.”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마그나크록의 장군이었던 카룩카이라고 한다.”
날 골병들게 만들었던 놈 이름이 카룩카르였다. 아무래도 장군끼리 공유하는 돌림자 같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장군씩이나 되면서 왜 망명을 하려하지?”
“간단하다, 마그나크록 때문이다.”
카룩카이가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나는 마그나크록의 꼬릿살로 창조된 첫 번째 장군이다. 나는 까마득히 오랜 세월 동안 그를 섬겼으나, 언제나 이런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가 정말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비늘 없는 종족보다 위대할까? 그렇다면 왜 우리들 중 대부분은 굶주리고 있으며, 자유롭게 세상을 여행하지 못하는 걸까? 우리는 왜 문자를 가지지 못하고,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지 않을까?”
“.......”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단순한 망명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창조주를 거역하려는 자였다.
“나는 우리를 바꾸려고 했다. 노동의 대가를 고르게 분배하자고 주장했다. 지식을 대물림할 수 있도록 어린 세대를 교육시키자고 말했다. 그러나 내게 돌아온 건 배신자란 낙인뿐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에신의 심산유곡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 같다. 결과는 보나마나 뻔했다. 지구에서조차 실패한 혁명인데, 여기서는 말할 것도 없었겠지.
- 에신은 닫힌 세계에요.
문득 소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에신은 강한 힘에만 집착한 나머지 잠재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그녀의 말이 옳았다. 제아무리 잘난 놈이 나타나도 힘으로 찍어버리면 그만이니, 절을 떠나려는 중이 생겨날 수밖에.
“망명을 하겠다는 이유는 충분히 들었어. 약속한대로 내가 최대한 윗사람들을 설득해보지. 네 능력을 감안한다면 받아주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 같긴 해.”
“네가 결정할 수는 없는 건가?”
“여긴 싸움 잘하는 순으로 권력을 나눠먹지 않거든.”
“.......마음에 드는군.”
카룩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파충류가 흡족해하는 표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카룩카이, 성물로만 장군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얘기도 자세히 듣고 싶은데.”
“앞서 말한 그대로다. 우리는 마그나크록의 육신을 나눠받았으니, 마그나크록의 불멸성을 공유한다. 그의 송곳니로 만든 무기만이 유효한 이유다.”
“그런 무기를 어디서 구하지?”
“일단 내게 하나 있다.”
그가 벽에 세워둔 기다란 창을 가리켰다. 창촉이 유난히 하얀 이유가 송곳니를 갈아 만들어서 그런 거였나.
어떤 재료로 만들었느냐가 무기와 방어구의 품질을 좌우했다. 에사인의 신체 일부로 만들어진 무기는 부르는 게 값, 아니, 값을 부르고 싶어도 매물이 존재치 않았다.
“여분으로 송곳니가 하나 더 있는데, 원한다면 네게 주도록 하마.”
“고맙다.”
그는 지금 인간이 흡족해하는 표정을 마음껏 볼 수 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카룩카르와 싸우다가 날아간 검의 행방이 묘연했다.
그는 갑옷 뒤춤에 매어뒀던, 코끼리 상아처럼 생긴 하얗고 기다란 송곳니를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송곳니의 크기로 마그나크록이란 신적 존재의 크기를 가늠해볼 수가 있었다. 카룩카이가 거대하다면, 이쪽에게 가능한 수식어는 초월적이란 표현뿐이었다. 송곳니 하나 길이가 내 팔길이와 맞먹었다.
“네겐 조금 큰 것 같기도 하군.”
“괜찮아, 어떻게든 쓸 만하게 만들어볼 테니.”
반드시 쓸 만하게 만들어야지, 이게 얼마나 귀한 재료인데.
“이번엔 내가 묻겠다. 너희들은 내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도구를 사용하고, 들은 적이 없는 언어로 말하더군. 내가 아는 한 이 근방에는 너희와 같은 비늘 없는 자들이 존재치 않는다. 너희는 어쩌다가, 어디서 이곳으로 오게 됐는지 알고 싶다.”
“차원을 넘어왔어.”
“차원을 넘어왔다고?”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자세한 건 직접 알아가는 게 빠를 거야. 우선 문자부터 익혀봐. 세종대왕께서 똑똑한 사람은 반나절만에 깨친다고 하셨으니, 너는 몇 시간 안 걸리겠는데.”
나는 작전장교를 돌아보았다. 그는 지금껏 오가는 대화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통역하시는 분에게 제 메시지좀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나는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 신사분께 한글 좀 가르쳐달라고 하세요.”
이틀이 더 지나자 나는 목발도 벗어던져버렸다. 그동안 정찰을 나갔던 대원들이 심상치 않은 소식을 속속 물어왔다. 크록들이 보금자리를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는 둥, 깊은 숲 너머에서 엄청난 규모의 야영지가 발견되었다는 둥.
바야흐로 전쟁이 임박해오고 있었다. 불어나는 적에 맞춰 우리의 규모도 나날이 증가했으나, 기밀작전이란 특수성과 포탈의 좁은 폭 때문에 인력과 장비 확충에 어려움이 많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앞두고 나는 잠시 서울로 복귀했다. 갑옷도 없이 싸운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사무치게 겪었기 때문이었다.
JSY 엔터테인먼트.
국내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회사이자, 소미가 활동하는 걸그룹 투시즌의 소속사였다. 미리 외교부에서 협조공문을 보내놓았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는 건 문제가 없었다.
소미는 6층에 마련된 개인 연습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이 연습실이지, 그냥 건물 한 층을 통째로 전세 냈다고 보면 될 것 같았다. 나는 텅 빈 휴게공간과 녹음실, 비디오 감상실을 거치고 나서야 그녀의 방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똑똑.
노크를 하자마자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하늘색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소녀가 의자에 앉은 채 빙글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박봉팔님.”
나는 그녀를 잠시 바라만 보았다. 이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었던 게 까마득하게 옛날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간만입니다.”
“들어오세요. 문은 닫으시고요. 다른 멤버들이 볼지도 모르니까.”
그녀가 옅게 웃으며 내게 손짓했다. 나는 재빨리 들어와 문을 빈틈없이 닫았다.
“머리색 이상하죠? 곧 컴백시즌이라 그래요. 여름이라나 뭐라나.”
“어울립니다.”
“과장님께 소식 챙겨듣고 있었어요. 다들 고생하시는데 저만 도움이 못 돼서 너무 미안했어요. 틈틈이 시간 내서 도움이 될 만한 걸 만들어뒀는데, 한 번 보시겠어요.”
그녀가 방구석에서 작은 박스를 하나 꺼내왔다. 얇은 부채가 박스 안에 촘촘하게 담겨있었다.
“이건 주술구에요. 미약하지만 마법을 방어하는 능력이 있어요.”
그녀가 내민 부채는 소위 굿즈라고 부르는, 자신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인쇄된 연예기획사의 파생상품이었다. 부채 하단엔 싸인을 가장한 카둔의 신성한 기호가 그려져 있었다.
내가 의아한 듯이 쳐다보자, 그녀는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부연했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의심받지 않으려면 이게 최선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