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TV에서 뉴스가 보도됐다.
[지난 일주일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죠. 배우이자 가수 지연 씨가 친부와의 이식 적합 검사에서 부적합 판정이 나왔다고 합니다.]
아나운서의 말에 친척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형진아, TV 꺼라.”
형제 중 막내인 형진에게 TV를 끄라고 명령할 때였다.
아나운서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나왔다.
[한편 지연 씨의 친척 중에서 적합 판정을 받은 사람이 나와 그들의 결정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뭐라고!?”
“뭐어!?”
“어억?!”
영락없이 장기를 기증하게 되어버린 상황에 친척들이 목덜미를 잡고 비명을 질렀다.
* * *
친척들에게 거하게 엿을 날려준 지연이 집에서 뉴스를 보며 킥킥거리고 있었다.
부엌에서 케이크를 접시에 담아 내오던 지한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렇게 좋아?”
“응. 좋지. 콕 박혔던 가시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느낌인걸.”
“그렇게 싫었어?”
“뭐어. 좋은 기억은 없었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었을 때 친척들은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큰 걸 바란 적은 없었는데, 그저 힘들었냐고 안아주기만 했어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도 가정이 있었으니까 우리가 짐 덩어리였던 것도 이해했다.
“그렇다고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어린애한테 너희 아빠는 너희가 책임지라고 말하는 건 너무하잖아.”
“그 사람들이?”
“돌아오기 전에 그렇게 말했었지. 게다가 정상적인 가정에 어찌나 집착하던지 나보고 너희 엄마아빠 다시 같이 살게 하라면서 옆구리 찌르더라.”
누나의 말에 지한이 눈을 찌푸렸다.
이번 일에는 없던 일이지만 누나가 그런 일을 겪었단 사실만으로 지한의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아무 말도 안 했어?”
“너는 그 자리에 없었어. 할머니가 혼자 방에 있을 때 몰래 와서 말해준 거거든.”
사실은 너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는 걸 말해줄 수 없었다.
그때의 동생에게는 가족이 유일한 보금자리였으니까.
나도 차마 이미란과 지한이를 버리지 못했을 시기기도 했으니까 동생을 나무랄 순 없었다.
지연의 말에 지한이 속상하다는 듯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내가 있었다면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혼냈을 텐데.”
“네가? 할머니를?”
“응. 할머니를, 내가.”
동생이 단단히 혼내 줬을 거라면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 모습에 지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렇게 웃어.”
“아니. 내 동생이 너무 든든해서.”
“믿어줄게.”
“어이쿠. 고마워.”
말은 믿어준다고 하면서 얼굴은 전혀 못 믿는다는 게 쓰여 있는 지한이 케이크를 찍었다.
포크로 치즈 케이크를 찍은 지한이 누나의 입에 넣어 불만을 틀어막았다.
입안 가득 들어온 케이크를 씹어 삼킨 지연이 한마디 했다.
“이거 나 입 막은 거지?”
“아닌데? 선물로 받은 케이크가 아직도 많이 남아서 빨리 먹으라고 준 건데.”
“그걸 꼭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했을까?”
“그러엄. 누구 말마따나 든든한 동생이잖아.”
조금 전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동생을 보고 지연이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었다.
누나의 항복을 받은 지한이 조금 유쾌한 얼굴로 지연의 입가에 포크를 들이밀었다.
“자. 이거 얼른 먹어.”
“마실 것도 안 주고 넣기만 하면 목 막혀.”
“여기 주스도 마시고. 선물로 들어온 블루베리 주스야.”
“선물이 참 많이 들어왔네.”
“못 먹는 것도 많이 들어왔어. 이따가 상자깡도 해야 해.”
“상자깡이라니.”
“아. 이번 영화 때문에 개인 방송을 많이 봤더니 나도 모르게 그만.”
개인 방송, BJ, 배틀 등이 소재인 영화 아니랄까 봐.
동생의 언어습관이 걱정된 지연이 한 소리 하려고 하자 지한이 빨대를 입에 물려 누나의 말을 막았다.
“촬영 끝나면 돌아올 거야.”
“그치만,”
“촬영장에 안 와도 잘 돌아가고 있고, 사람들도 문제없어.”
쪼로록
걱정을 사전에 차단하는 말에 지연이 말없이 빨대만 빨았다.
“나 촬영이 미뤄져서 내일부터 밀린 거 다 찍으려면 엄청 바쁠 거야.”
“집에 늦게 들어오는 거야?”
“촬영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늦게 들어오진 않을 거야. 그런데 저기 뉴스에 나온 일 때문에 또 기자들이 찾아오면 촬영 일정이 늘어나겠지?”
“아직도 찾아와?”
“뭐. 우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 크긴 크잖아.”
뉴스에서는 아직도 우리와 관련된 일이 보도되고 있었다.
이번 일로 연예계가 발칵 뒤집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약, 도박, 성 추문 다음으로 연예인들의 가족이 도마 위에 오른 일이었다.
“그래도 이걸로 연예인 이름으로 사기 치는 가족들이 좀 줄어들지 않을까?”
“자식 등골 빼먹는 부모들도 줄어들 거고.”
“사람들도 인식을 바꿔야지.”
부모는 부모의 삶이 있듯이 자식은 자식의 삶이 있었다.
부모라고 해서 자식의 삶을 조종할 자격은 없었고, 자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부모를 부양할 의무는 없었다.
각자 자기만의 삶이 있으니까 부모든 자식이든 주체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랐다.
“뉴스에서 계속 같은 얘기만 나오네. 다른 거 볼까?”
“그래. 이왕이면 재밌어서 눈물이 나올 만한 걸로 부탁해.”
“최선을 다해 찾아볼게.”
지한이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바꿨다.
* * *
2017년 하반기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지연의 일로 터진 가족의 문제가 연예계로 번지고, 그로 인해 법이 개정되고 해외에서 주목까지 받았다.
육아 상담 프로그램이 생겨나고, 시사 프로그램에서 문제 가정에 대한 고발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계절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어느새 긴팔을 입고 사람들이 돌아다닐 계절이 되자 지한이의 영화 촬영도 무사히 끝났다.
이번 일 때문에 예정된 촬영 기간보다 훨씬 늦게 끝났다.
하지만 촬영장에서 지한이를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힘내라면서 사람들이 지한이의 어깨를 두드리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영화 <장난> 대박 나즈아!”
“고생 많으셨어요!”
길고 긴 여정을 끝난 사람들이 박수 치며 소리를 질렀다.
지긋지긋하게 촬영장에 찾아오는 기자들과 흔들림 없이 중심을 지킨 지한이 덕에 똘똘 뭉친 사람들이 서로의 등을 두드렸다.
이런 현장에서 다시 촬영할 수 있을까.
들어보니 오지한이랑 같이 촬영하면 이런 현장에서 계속 일할 수 있을 것 같던데.
사람들의 시선이 감독과 악수를 나누는 지한이에게로 쏠렸다.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도 모른 채, 모두의 시선을 받는 지한이 박범수 감독과 인사를 나눴다.
“배려 많이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어쩔 수 없는 거야. 이 정도는 배려 축에도 못 껴.”
범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제 박 감독의 화법에도 익숙해진 지한이 빙그레 웃었다.
“정든다. 웃지 마라.”
“그럼 더 웃어야겠네요. 정드시라고.”
“됐어. 마지막까지 촬영한다고 고생했는데 얼른 들어가 봐.”
“어? 저희 뒤풀이 안 해요?”
“감독님 뒤풀이 가셔야죠!”
“오지한 씨도 가는 거죠?”
“네. 갑니다.”
지한의 대답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자신들이 언제 월드스타와 함께 뒤풀이를 가 보겠는가.
하물며 오지한은 인성도 좋았다!
지한이 뒤풀이 장소에서 보자며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차로 향했다
벤에서 기다리고 있던 영훈을 보고 지한이 말을 걸었다.
“형. 누나한테 연락 온 거 없어?”
“왜 없겠니. 아까 공항에 도착했다고 연락받았어.”
영훈의 말에 지한이 활짝 웃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 휴가를 보냈던 누나가 귀국했다.
8월에 있던 지한의 생일 이후 2개월 만이었다.
273. 새해
인천공항으로 입국한 지연을 장훈이 픽업해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럼 오빠 오늘 고생했어.”
“아니다.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하나 언니랑 설아까지 데려다줬잖아.”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장훈이 눈을 찡긋하며 으쓱였다.
개인적인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공적인 일도 아닌데 운전기사로 부려 먹은 셈이었는데도 장훈은 괜찮다며 손을 흔들었다.
“얼른 들어가. 피곤하겠다.”
“이 정도는 끄떡없어.”
“그래도. 비행기 오래 탔잖아. 얼른 들어가.”
“알았어. 오빠도 잘 들어가.”
지연이 손을 흔들어 장훈을 배웅했다.
집으로 돌아온 지연이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은 집에 그리운 얼굴로 현관문을 열며 동생들을 불렀다.
“모짜야. 인절미. 언니 왔다.”
왕! 헥헥헥
애옹
이미 장훈의 차가 들어올 때부터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지연에게 달려들었다.
영상통화와 사진으로만 보던 아이들을 직접 품에 안은 지연이 집에 돌아온 것을 실감하며 아이들의 냄새를 맡았다.
그렇게 잠시 감격의 해후를 나눈 지연이 아이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오구. 잘 지내쪄?”
지연의 물음에 인절미가 정신없이 지연의 얼굴을 핥았고, 모짜는 몸을 부비며 냄새를 묻혔다.
그래그래. 나도 촬영 외에 너희들이랑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게 얼마 만인지.
서로를 꼭 부둥켜안은 한 명과 두 마리는 열린 문으로 들어온 싸늘한 공기에 몸을 떨며 포옹을 풀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갈까?”
왕!
냐아
지연이 현관을 닫고 들어왔다.
오랜만에 온 집은 가기 전이랑 다를 바가 없어서 지연은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아, 맞다. 내가 너희들 주려고 선물 사 왔어.”
집에 들어온 지연이 손도 씻지 않고 트렁크를 풀어 헤쳤다.
여행의 초기 목적은 그림 작업이었으니 짐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나와 설아와 연락이 닿아 두 사람을 초대하는 바람에 짐이 늘어났다.
모처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자유로운 여행을 하게 된 두 사람은 보는 것마다 기념이라며 사들였다.
두 사람의 틈에 껴 덩달아 기념품들을 사게 된 지연의 짐이 갈 때보다 몇 배로 늘어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속에서 지연이 모짜와 인절미에게 주기 위해 구매했던 선물을 꺼내 들었다.
“쨘! 귀엽지? 너희들 모자랑 목걸이, 스카프, 장난감이야.”
하나와 설아도 반려동물이 있는 사람들이라 지연도 덩달아 구매하게 되었다.
역시 지갑을 열게 하는 건 가족들에게 주는 선물이지.
지연이 스카프를 둘둘 말아 아이들 목에 묶어주었다.
머리에 모자까지 씌워주니 동물잡지에 나올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역시 우리 애들이라니까. 사진 찍어야겠다.”
끄웅
애옭
카메라를 들이대는 지연을 보고 모짜와 인절미가 어딘가 불편한 소리를 냈다.
한 번 시작하면 수백 장 찍는 건 예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둘을 구해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지한아.”
동생이 나타났다.
* * *
씻지도 못하고 감동의 해후를 나누던 둘은 참다못한 인절미와 모짜가 울음소리를 내자 겨우 외투를 벗고 손을 씻었다.
다리 위에 각각 아이들을 눕혀 쓰다듬은 남매가 근황을 나눴다.
“여행은 잘 다녀왔어? 지인들이랑 다녀온 건 거의 처음이지?”
“그렇지 뭐. 마침 두 사람이 시간이 나서 다행이지. 안부 메시지는 주고받았는데 최근에 상태가 안 좋아 보였거든.”
드물게 연예인 지인이랑 여행을 간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이른 나이에 안타까운 일로 세상을 뜬 사람들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지연이 두 사람을 살피며 연락을 했어도 두 사람은 정해진 운명이란 것처럼 회귀 전과 똑같은 길을 걸어갔다.
그룹 활동을 끝내고 개인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의 상태는 눈에 보일 정도로 안 좋아졌다.
옆에 누군가가 함께 있을 땐 아픔을 나눌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룹을 떠나고 개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홀로 아픔을 감내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행을 가자고 꼬셨다.
두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잘된 것 같아?”
“일단 상담사분의 조언대로 하긴 했는데 우울증이라는 게 장기간 지켜봐야 한다더라. 그래도 돌아갈 땐 두 사람 상태가 좋아졌다고 했어.”
주민이 소개시켜 준 상담사 덕에 두 사람 몰래 치료를 진행할 수 있었다.
더 일찍 하지 못해서 미안했다.
유명해지고 그룹 활동을 할 때부터 과도한 악플을 받아왔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죽고 나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법을 만들고 추모하면 뭐 하겠는가.
이미 떠난 사람은 돌아보지 않는 법이었다.
“돌아올 때 보니까 두 사람 다 많이 좋아진 거 같더라. 여행하면서 스트레스도 많이 풀리고 기분전환도 됐나 봐. 아니 돌아오기 전날 밤에는 파자마 파티하는데 글쎄 나보고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물어보는 거 있지?”
“호오?”
누나의 말에 지한의 눈에 흥미가 떠올랐다.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아니. 하나 언니랑 설아가 나보고 연애설 한 번 안 터졌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잖아. 그래서 사실 연애한 적 있는데 회사에서 숨겨준 거 아니냐고 추궁하잖아.”
“누나는 뭐라고 했는데?”
“숨긴 거 아니라고 했지. 진짜 없다고.”
“하긴 있었으면 내가 벌써 알았겠지.”
가족이라도 연애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을 수 있지만 지연과 지한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집에 사는 것도 있었지만 서로의 감정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옆에서 주억거리는 지한을 보면서 지연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진짜 없다고 했는데 몇 번 떠 보더니 갑자기 날 안쓰럽게 보잖아. 그러더니 이상형이 누구냐는 거 있지?”
“이상형은 왜?”
“내 열애설 찾다가. 나를 이상형으로 말한 남자 연예인들이 뜨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대화가 그렇게 흘러가 버렸어.”
젊은 아가씨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연애로 흘러가는 건가?
누나의 이상형이란 말이 지한의 관심을 끌었다.
생각해 보니까 누나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는 것 같네.
호기심이 생긴 지한이 지연의 대답을 독촉했다.
“누나 이상형은 누군데?”
“응? 너까지 그건 왜 물어?”
“나도 갑자기 흥미가 생겨서. 누군데? 하나 누나랑 설아한테는 말해줬으면서 나한테는 말 안 해 줄 거야?”
“아, 아니!!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언니랑 설아한테도 말한 적 없어.”
“그럼 나한테만 말해주면 되겠네. 사장님한테도 비밀로 할게.”
우리 사장님이 누나의 이상형을 알았으면 절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샷건이라도 들고 누나의 이상형한테 찾아갈지도 모른다.
비밀로 하고 나중에 사장님한테 누나 이상형이 생기면 어쩔지 몰래 떠봐야지.
“지금은 없어.”
“음? 지금은?”
조건이 있는 지연의 대답에 지한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동생의 시선을 피하지 못한 지연이 주저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