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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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이 느린걸?

평소의 한성이를 생각하면 확실히 이상했다.

지연이 다시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어. 저요? 아무 일도 없어요….”

아무 일도 없기는.

얼굴에 대놓고 ‘나 무슨 고민 있어요.’ 라고 써 놓은 주제에.

아직은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내 번호 기억하고 있어?”

“그럼요.”

“하고 싶은 말 있거나 고민 있을 때 연락해. 이제 그림도 다 그렸거든.”

“네, 네에.”

작업실에 있느라 늦게 받을 일도 없을 테니 언제 연락이 와도 받을 수 있었다.

어두운 한성의 얼굴을 본 지연이 힘내라는 말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지한이가 집에 초대까지 했던 아이라 그럴까 아니면 세란에게 묶여있는 모습이 남 같지 않아서 그럴까.

한성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 * *

냐아앙! 먕, 매옹.

모짜가 지연의 손에 들린 낚싯대의 움직임에 따라 허공을 폴짝폴짝 뛰었다.

작업하고 지한이 지방촬영에 따라갔다고 며칠 안 놀아줬더니 삐져서 발등위에 올라타기에 오늘 남는 시간 전부를 써서 놀아주기로 했다.

왜오오옹!

깃털을 물고 라이언엠페러의 사자처럼 승자포즈를 하는 모짜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뽀뽀를 해줬다.

“쪽, 쪽. 어구 잘해써. 어구 기특해.”

골골골골골골골

모짜가 골골송을 불렀다.

작은 모터 돌아가는 소리에 지연이 다시 뽀뽀세례를 했다.

“지연아.”

“왜?”

“비행기 티켓 끊어 놨다.”

“그런데 나 진짜 미국 가? 그냥 그림만 보내면 되는 거 아니야?”

“네 첫 화가 데뷔전인데 어떻게 그림만 보내냐. 가는 김에 헨리 교수님이랑 엠마도 좀 보고 와.”

“이렇게 날 보내는 걸 보니까 앨범준비가 또 연장될 건가보지?”

“아마도….”

눈치 좋은 저 애를 어떻게 속이리.

아직 지연이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다른 소속사에서 견제가 들어오고 있단 사실은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사장님이 회사 일에 HJ그룹의 힘을 빌리지 않는 것을 믿고 수작을 부리는 모양인데 지연이와 지한이가 오너일가에게 예쁨을 받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물밑으로 HJ그룹에서 쓰고 있는 연예인을 계약이 종료되는 즉시 갈아 치우기로 정해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다가올 미래도 모르고 제 목을 조르고 있었다.

‘늬들이 백날 그래봐라. 지연이가 어디 쉽게 묻힐 앤가.’

곡은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이번 기회에 A&R팀 전원 이를 악물고 곡 작업에 힘쓰고 있었으니 장기적으로 보면 손해는 아니었다.

뚜르르르-

소파 위에 뒀던 휴대폰이 울렸다.

지한인가?

인절미 산책하러 간 애가 웬 전화지?

지연이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에 적힌 번호는 지한이의 번호가 아니었다.

“여보세요?”

-서, 선배님.

“한성이? 무슨 일이야?”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지연이 한성을 걱정했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킨 한성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음, 마가. 엄마가 이상해요.

뭔가 좋지 않을 일이 일어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도와주세요.

* * *

전화를 받은 지연이 산책에서 돌아온 지한이와 함께 한성이의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영훈이 차를 몰았다.

“내가 그 집 언젠가 일 터질 줄 알았다.”

영훈이 혀를 차며 말했다.

“연예계에서 이런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한데. 자식 등골 빨아먹는 부모들을 보면 내가 다 화가 난다니까.”

“한성이 형이 그랬는데. 아빠가 돈 잘 번다고.”

“형은 그것만 말하는 게 아니야. 자식 이름을 팔아먹고 다니는 걸 말하는 거야.”

“자식 이름을 판다고?”

“내가 누구 형입네, 엄마입네 하면서 주변인에게 말하고 다니는 거지. 연기를 하는 건 아인데 엄마가 더 나서는 경우도 있어. 연예계의 화려한 빛을 보고 눈이 멀어버린 거지. 아마 한성이 엄마는 전직 배우여서 더 그런 것도 있을 거다.”

지연은 영훈이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알아들었다.

미래에서도 연예인 가족 문제는 유명했으니까.

오죽하면 빚투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한성의 집은 잘사는 편이라고 했으니 빚은 아니겠고, 엄마가 아이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건가?

쉽게 말하면 대리만족.

세란은 자신이 무명으로 끝났으니 공중파 드라마에 얼굴도장을 찍은 아들을 보고 더더욱 아이를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심리가 있을 것이다.

“한성이가 요새 학원이 늘었다고 했지?”

“응. 형이 사극도 준비해야 한다고 붓글씨도 새로 배운다고 했어.”

“쯧쯧쯧, 배우면 좋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대역을 쓸 건데 뭐 하러 애를 그렇게 조이는지.”

“형. 나도 사극 들어가려면 붓글씨 배워야 해?”

“네가 하고 싶으면.”

“으음. 조금 더 생각해 볼래.”

“그래라.”

지한의 말에 영훈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영훈 오빠가 좋다.

하고 싶으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지만 아니라면 굳이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 거다.

‘그에 반해 한성의 엄마는 다 널 위한 거라며 아이에게 강요하겠지.’

처음에는 순종한다.

그렇게 억누르고 억누르다가 한 번 터지면 날아오는 말이 그거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너한테 이만큼 투자했으니 너는 나한테 잘해야 해.

지연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성에게 묘하게 관심이 갔던 이유가 이거였나.

돌아오기 전 이미란이 나한테 한 행동이 지금의 한성의 상황과 겹쳐 보였다.

94. 아이는 부모의 2회차가 아니다.(2)

“한성아!”

“한성이 형!”

한성의 집 앞에 도착한 아이들이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남매와 영훈, 그리고 조용히 따라온 형석과 지은이 뒤를 따라 들어갔다.

한바탕 울었는지 눈가가 붉어진 한성이 일행들을 맞이했다.

“와 줘서, 고맙.”

우리를 보고 안심이 되었는지 한성의 눈이 촉촉해졌다.

이러다 울겠네.

오자마자 울려고 하는 한성을 보고 지한이 잽싸게 행동했다.

“형 괜찮아?”

“물 가져다줄까? 부엌이 저긴가.”

동생이 한성을 껴안고 등을 토닥이는 사이 지연이 잽싸게 부엌을 찾아 물을 가져왔다.

울음을 그치려고 하는지 딸꾹질을 하는 한성이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고 지한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이 큰 집에 아이 혼자 있다니.’

벌써 꽤 늦은 시간인데도 집에 어른이 보이지 않았다.

아빠가 어딘가의 사장님이라고 했던가?

사장님답게 넓은 집인데도 사람이 없어서 삭막한 집을 보며 지연이 한성을 동정했다.

이렇게 집에 어른들의 보살핌 없이 혼자 있는 아이라니.

오죽하면 우리에게 전화를 했구나 싶었다.

지연이 가져온 잔을 건네받고 꼴깍꼴깍 삼킨 한성이 잠시 후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저어. 죄송해요. 밤인데 연락해서.”

한성이 진정하자마자 한 말이 이거였다.

“왜 사과해?”

“네?”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한 건 난데 한성이가 전화했다고 사과할 필요는 없어.”

“맞아, 형!”

물론 오늘 남은 시간을 전부 모짜랑 인절미에게 주기로 한 약속을 못 지켜 애들이 삐지긴 했지만 그건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 풀어주면 될 일이었다.

소파 위에서 남매 사이에 끼여 손을 주물락 당하고 있는 한성이 고개를 숙였다.

영훈이 뒤늦게 나섰다.

“안녕? 나는 지한이 매니저인 고영훈이라고 해.”

“안녕하세요.”

“집에 어른들은 안 계시니?”

영훈의 말에 한성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뭘 잘못 말한 걸까?

지뢰를 밟은 것 같은 느낌에 영훈이 당황하며 허둥지둥했다.

“미, 미안해! 나는 그냥 늦은 시간인데 한성이 혼자 있으면 무섭지 않을까 해서.”

“…어요.”

“응?”

“엄마랑 있었는데 없어요.”

있었는데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아이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서 영훈이 짱구를 굴렸다.

“형 아빠는?”

“아빠는 일하느라 늦게 들어와.”

“엄마는?”

“엄, 마는.”

한성이 목울대를 꿀렁거렸다.

힙겹게 입을 여는 한성의 손을 쪼물닥거리며 온기를 나눠줬다.

“요즘 바빠.”

“일해?”

“나 때문에. 내 오디션 때문에 누굴 만나야 한대.”

“그럼 언제 들어오는데?”

“몰라. 항상 내가 자야 들어와.”

아무래도 오는 길에 영훈이 차에서 말했던 것이 사실이 된 모양이다.

“전부 내가 훌륭한 배우가 되기 위해서래. 나는 잘 모르겠어. 내가 배우가 되기 위해서 엄마가 맨날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거야?”

아이의 물음에 영훈이 잠자코 있었다.

지금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성이 넌 어떻게 하면 좋겠어?”

정적을 지연의 목소리가 갈랐다.

“잘 생각해 봐. 배우가 되려고 하는 게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건지 아니면 엄마가 하라고 해서 하는 건지.”

“나는. 난.”

한성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나는 왜 배우가 되려고 하는 걸까?

연기를 하는 건 재밌었다.

그런데 연기를 하라고 한 건 엄마였다.

내가 연기를 하고 싶은 게 맞는 걸까?

혼란스러워하는 한성을 보고 모두가 잠자코 기다리고 있을 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성아? 이분들은 누구시니?”

문을 열고 최진명이 들어왔다.

* * *

“아아. 이거 늦은 시간에 저희 아이 때문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전후사정을 들은 한성의 아빠, 진명이 면목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지연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우리에게 폐를 끼쳤다는 것보다 자신의 아이가 이 늦은 밤에 우리를 불러야 했던 사정에 대해서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심통 난 지연이 참지 못하고 진명에게 말했다.

“일 많이 바빠요?”

“아? 음. 그렇단다.”

“얼마나 바쁜데요? 우리 사장님은 8시 넘으면 퇴근해요.”

“회사 일이라는 게 서류작업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람도 많이 만나야 하는 거란다. 나 참. 나는 왜 이런 걸 애한테 말하고 있는 거지.”

회사일 잘 모른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양인데 어이가 없네!

내가 이래 봬도 직장생활 경험이 있단 말씀.

우리 사장님네 가족들도 엄청 바쁘지만 일주일에 2일 정도는 일찍 들어오신다고 했어.

“한성이네 아빠는 좋은 아빠가 아니네요. 맨날 늦게 들어오고.”

“일 때문에 어쩔 수 없단다. 원래는 애 엄마가 한성이를 챙겼지만 요즘 들어 어딜 그렇게 다니는 건지.”

진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한성이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엄마가 늦게 들어오는 것도 아빠와 엄마가 사이가 안 좋아진 것도 전부 자신의 탓이었다.

“저어. 한성이 아버님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

“잠시 저랑 둘이서 대화하실까요? 한성이에 대한 겁니다만.”

“알겠습니다.”

영훈이 진명과 함께 안방으로 사라졌다.

거실에 남은 이들이 한성이를 차례대로 쓰다듬었다.

안방 문이 닫히고 거실과 안방이 분리되자 영훈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하고 오셔서 피곤하실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내 아이 일인데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목을 죄인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는 진명의 행동에서 그가 지금 이 자리를 빨리 끝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한성이의 문제는 사실 아역배우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애가 TV에 나오고 유명해지니 여기저기 오디션도 보러 다니고 이것저것 가르치려고 하겠죠.”

“네. 뭐. 안 그래도 한성이한테 필요하다면서 이번 달에도 학원을 2곳 끊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저는 관계자가 아니라 잘 모릅니다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이가 지나치게 혹사당한다는 겁니다.”

“혹사요?”

“아시겠지만 저희 회사에 꽤 유명한 어린 배우가 있다는 건 아시지요?”

“네 압니다.”

“저희는 지한이에게 많은 걸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걸 가르치죠. 그 이후는 배우의 몫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하자면 배우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거죠. 저희가 하는 일은 배우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도와주는 겁니다. 배우고 싶어 하면 배울 수 있게, 어떤 작품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면 그 작품에 들어갈 수 있게 서포트하는 거죠.”

“지금 한성이도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다 필요하니까 배우는 거,”

“아닙니다.”

영훈이 진명의 말을 끊고 딱 잘라 말했다.

진명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성이가 왜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아십니까?”

“그야. 좋아하니까 하고 싶어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틀렸습니다.”

또 한 번 부정당한 진명이 불쾌한 낯으로 물었다.

“그럼 뭐란 말입니까?”

“다 엄마를 위해서 그런 겁니다.”

“예?”

“연기를 시작하는 것도 학원을 다니는 것도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것도. 전부 아이가 자신의 엄마의 뜻에 맞춰주는 거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진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성이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고?

“실례지만 한성이의 촬영 첫날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잘하고 왔다고 들었습니다만.”

“촬영장에서 한성이를 노려보는 사모님 덕분에 촬영이 지연됐습니다. 첫날부터 사모님은 촬영장 출입금지를 당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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