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나 인사하고 와도 돼?”
“안 돼. 위험해.”
“하지만 나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좋아한다고 해서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나도 팀장님한테 들은 건데. 좋다고 달려들어서 단추며 머리카락이며 죄다 뜯어갈 수도 있대.”
“정말? 머리카락은 왜?”
“몰라. 그냥 내 스타의 모든 걸 다 좋아한다는 거 같은데.”
“무섭네요.”
“수호야. 앞으로 네가 상대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야. 하지만 너무 과하게 제압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알고 있습니다. 저분들도 전부 우리 지한 배우님을 좋아해서 그러는 거란 걸.”
“그러니까 영훈이 형 말은 수호 형이 저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막아야 한다는 거네?”
“요약 잘하네. 맞아. 수호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거야.”
저쪽에서는 전부 쥐어뜯을 각오로 들어오는데 이쪽에서는 몸으로 막기만 해야 하다니.
저렇게 많은 사람을 혼자 막아야 하는 수호를 생각한 지한이 촉촉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형. 힘내요.’
‘이 한 몸 다 바치겠습니다.’
‘아니, 그건 좀.’
아무튼 영훈은 팬들을 생각하는 건 좋으나 만일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으니 너무 다가가지는 말라고 말했다.
지한이 어쩔 수 없이 멀리서 손만 흔들어주고 있을 때, 오늘 얼떨결에 범인을 잡는 씬을 촬영하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이제 그거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
“헤헤. 그래도 우리는 아역배우니까. 조심해야지.”
“아역배우는 힘든 거구나.”
“지한이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어이가 없는데.”
훈이 장난스럽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오늘 야외촬영이 있어서 조금은 가벼운 옷차림을 한 그는 아빠가 태권도 관장님이라 그런지 몸이 날렵했다.
“뭐 해 뭐 해?”
훈이 다가오자 활달한 누리가 다가왔다.
오자마자 지한이에게 손을 들었다.
“지, 지한아. 안녕!”
아직 반말이 어색한가 보다.
“누리도 안녕?”
“흡! 안녀엉!”
지한이 대답을 받아주자 기쁨의 함성을 지르려던 누리가 급하게 참고 또 한 번 인사했다.
멀리서 누리의 엄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이 보였다.
“다들 역시 여기 있었구나.”
통통한 체격인 정훈이 다가왔다.
빵빵한 인상이 귀여운 정훈은 온화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한성이와 지아가 촬영하는 씬.
촬영하는 아이들 빼고 주요 배역들이 모두 여기에 모였다.
‘역시 지한이는 동물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홀리는 재주가 있는 게 아닐까?’
영훈은 애니멀팜 이후, 디지니 프린세스라는 별명이 새로 생긴 지한이는 사람도 끌어당기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뭐가 됐든 사람의 관심으로 먹고사는 직업인만큼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한성의 엄마처럼 안 좋은 관심도 끌어모을 수 있으니 앞으로 더욱 주의해야겠지만.
“우리 모레 첫 방송이래.”
“벌써 그렇게 됐나?”
촬영에 들어간 지도 곧 한 달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실내촬영-야외촬영을 번갈아 했지만 제목이 <햇살마을 수비대>인 만큼 야외촬영이 꽤 많았다.
“저어, 우. 우리. 다 같이 모여서 첫 방송 같이 보지 않을래!!!!”
누리의 외침이 촬영장에 울려퍼졌다.
“이제 곧 촬영하니까 큰소리 내지 말아주세요.”
“죄송합니다….”
스태프에게 주의를 받은 누리를 모두가 웃는 얼굴로 달래줬다.
“괜찮아.”
“우우. 혼났어.”
“주의로 끝났으니까 괜찮아. 진짜 촬영할 때 그랬으면 더 혼났겠지만.”
시무룩해하는 누리를 달랜 아이들이 곧 그녀가 말한 내용에 주목했다.
“첫 방송 다 같이 보는 거 좋다.”
“그런데 우리 방송 늦게 시작하는 거 아니야?”
“아마 저녁 10시쯤?”
“그럼 너무 늦지 않아?”
“맞아. 잘 시간인데.”
“왜 우리가 주인공인 드라만데 그렇게 늦게 하는 거야.”
“나도 몰라.”
“어른들의 사정이라는 거야.”
“뭐야. 그거 맨날 자기들도 설명할 수 없으면서 우리한테 무시하라고 말하는 걸로 넘어가는 핑계잖아.”
첫 방송인데 다 같이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에 아이들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아이들의 말을 들은 영훈이 웃음을 참으며 제안했다.
“그럼 지한이만 괜찮다면 자고 가면 되겠네.”
“!!!!”
영훈이 내놓은 해결방안에 아이들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떠올랐다.
그런 좋은 방법이!
역시 어른들은 다르구나.
영훈에 대한 존경심이 +1 된 아이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지한을 돌아봤다.
‘지한이랑 한집에서! 꺄아!’
‘집에서 자고 가려면 뭐가 필요하지? 베개 들고 가야하나?’
‘잠옷 챙겨야겠지? 과자도 싸 갈까?’
수학여행을 가는 것처럼 들뜬 아이들이 지한의 대답을 기다렸다.
친구들과 같이 첫방송을 보고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라.
친구가 집에 놀러온 적도 없고, 자고간 적도 없는 지한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형! 할래. 해도 돼?”
자신을 올려다보는 지한을 보고 영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거기 네 집인데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하냐. 나도 얹혀사는 입장인데.”
“그래도. 같이 사는 사이니까 물어봐야지.”
“지한이 네가 좋다면 나도 좋다.”
영훈의 허락에 지한이 아이들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모두가 좋아서 들썩이는 게 보였다.
“그럼 우리 누나한테 허락받자. 누나가 된다고 하면 첫 방송 다 같이 봐!”
기뻐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들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남아있었다.
* * *
“그럼 지연아. 내일 보자.”
“네, 언니.”
은주가 지연을 집에 데려다주었다.
현관으로 지연과 경호원인 지은이 들어가는 것을 본 은주가 차를 몰고 떠났다.
“후우.”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아가씨.”
“아아. 이제 조금 힘드네요.”
벌써 활동한 지 2달이 넘었다.
의 2주 연속 1위 후, 그 자리는 VoA에게 넘겨야 했다.
역시 아시아의 보석.
쉽지 않은 상대였다.
로 후속곡 활동을 하고 있지만 VoA와 활동기가 겹쳐서 수상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얼마 전 앨범판매량이 10만 장을 넘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점점 쇠퇴하는 음반시장에서 첫 앨범이 10만 장이라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한이는 집에 들어왔겠죠?”
“네. 저녁 무렵에 촬영이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하긴. 대본에서 밤에 촬영하는 장면은 거의 없었으니까 일찍 끝났겠네요.”
어두워지면 돌아와야 했다.
여름이라서 해가 긴 것이 다행이었다.
아니라면 그 많은 야외촬영 장면을 전부 찍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지연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장에 신발을 넣었다.
가벼운 발자국 소리들이 들렸다.
“누나!”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지한이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것처럼 품에 뛰어들었다.
“나 땀 냄새 많이 날 텐데.”
“괜찮아. 누나 냄새니까.”
“그래도.”
“싫어!”
“알았다. 우선 안으로 들어갈까?”
지연이 떨어지지 않으려는 지한을 품에 안고 펭귄처럼 걸었다.
그 모습을 본 영훈과 미나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지한아. 우선 지연이 좀 씻게 해 줄까?”
“같이 씻을래!”
“넌 아까 오자마자 씻었잖아. 그리고 어딜 남녀가 유별하거늘 알몸을 보이려 하느냐.”
“누나랑 나는 어릴 때 같이 목욕했는걸?”
“이제는 안 돼요. 아니 안 그러다가 갑자기 왜 같이 씻겠다는 거야?”
“그러게. 지한아 무슨 일 있었어?”
미나의 말에 지연이 동조하며 물었다.
움찔한 지한이 그런 거 없다며 품에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지한이. 오늘 촬영 잘했어?”
“응! 오늘 있잖아.”
“잠깐. 우선 씻고 하자.”
“알았어.”
지한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지연이 동생을 멈추고 씻으러 들어갔다.
역시 잠시 주의를 딴 데 돌리길 잘했다.
능숙하게 지한을 다루는 지연을 보고 영훈과 미나가 감탄했다.
“역시 지연이네.”
“우리는 지연이 따라가려면 아직 먼 거 같다.”
“힘내요, 오빠.”
“왜 나만…?”
“에이. 나는 일개 코디잖아요?”
“일개!? 같이 할리우드도 갔다 온 동료잖아 우린? ‘사람극장’에도 같이 나왔으면서.”
“허허. 어디 평범한 코디와 톱스타를 맡는 매니저와 같나요?”
“너도 톱스타를 맡잖아.”
“에헷.”
투닥이는 둘을 보고 인절미와 모짜가 고개를 저었다.
피흉
애옭
* * *
씻고 나온 지연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지한에게 붙들려 오늘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했다.
지연은 훌륭한 청자의 자세로 지한의 말에 대꾸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누나, 누나.”
“어. 왜?”
“우리 집에 누구 초대해도 괜찮아?”
“괜찮은데 누구?”
“우리 수비대!”
아아. 걔들?
촬영하면서 친해진 것 같더니 집에 부르기까지 하려고?
초등학교 이후 처음 보는 또래라서 그런가?
잘 맞는 모양이네.
합이 잘 맞는 배우를 만난 것 같아서 지연이 한결 안심했다.
다른 촬영장에서는 지한이 제일 막내였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다 같은 또래니 지한을 싫어하는 아이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이다.
“초대해도 괜찮아.”
“히힛. 고마워, 누나!”
“뭘. 언제 부를 건데?”
“우리 첫 방송 하는 날에. 나 그때 불러도 되지?”
“그럼. 아, 그럼 누나는 방에 들어가서 언니랑 오빠랑 같이 볼게.”
“왜!?”
지연의 말에 지한이 충격받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 친구들이랑 노는 자리에서는 보호자가 슬쩍 빠져주는 게 좋지 않나?
충격받은 것 같은 지한의 반응에 지연이 당황하며 물었다.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 내가 있으면 좀 그렇지 않을까?”
“왜? 전혀 안 그런데?”
지한이 다시 지연의 품에 폭 안겼다.
너 이제 커서 안기려면 고개를 조금 숙여야 하는데 안 불편하냐?
“누나도 같이 있어. 요즘 오래 떨어져 있잖아.”
“그러게. 우리 둘 다 동시에 활동해서 그런가 보다. 다음에는 지한이가 활동할 때 누나는 쉴게.”
“으으응. 그게 아니라. 나랑 같이 촬영해.”
지한이 어리광을 부렸다.
영훈이 지한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지연이가 연기를?
배우 2실 소속인 영훈으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누나는 노래가 더 좋은데.”
“그럼 다음에 같이 해.”
“그래. 다음에 같이 하자.”
지연의 대답에 몰래 귀를 세우고 있던 영훈이 손을 불끈 쥐었다.
그 꼴을 보고 미나가 질린 얼굴로 영훈에게서 떨어졌다.
“그래 지한이도 다음에 같이 노래 부를까?”
“좋아!”
영훈의 안색이 웃는 그대로 굳었다.
풉-
미나가 옆에서 그 꼴을 보고 비웃었다.
86. 초대
7월 28일
드디어 <햇살마을 수비대>가 방영되는 날이 왔다.
지연의 허락에 아이들은 기뻐 날뛰며 부모에게 말했고, 무려 할리우드 스타에 괴물신인으로 불리는 가수라는 인맥을 놓칠 리 없는 부모들은 흔쾌히 허락했다.
재벌집 같아 보이는 2층집에 온 아이들은 정문을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넓은 마당에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여기가 할리우드 스타가 사는 집이구나’
‘내가 지한이 집에 오다니!’
‘우리 집보다 넓네.’
‘마당에서 공 차도 되겠다.’
‘여기가 지연 선배님이 사는 곳.’
저마다의 감상을 하면서 들어온 이들은 영훈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네.”
“네, 네에.”
“네.”
“넵!”
“네에.”
대답을 하면서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영훈이 웃음을 삼켰다.
다들 눈이 초롱초롱한 게 귀여웠다.
“다들 어서 와!”
현관을 들어가니 지한이가 아이들을 마중했다.
“지한이 안녕?”
“이, 이거 선물로 가져왔어.”
“나도 가져왔는데. 엄마가 남의 집에 갈 때 빈손으로 가면 안 된다고 했어.”
“안녕! 지한아!”
“아, 안녕?”
아이들이 지한이를 보자마자 품에 안고 있던 걸 내밀었다.
지한이 집에 가서 자고 온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각자 품에 안겨준 선물이었다.
“이런 거 안 가져와도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