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저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 것뿐입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시원하게 웃었다.
* * *
“오빠, 갔다 왔어?”
“응. 걱정 마. PD님이 내 말을 꽤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거 같아.”
“정말?”
“그럼. 하하하. 거봐. PD님이 내 의견을 받아들이실 줄 알았어.”
“안 받아들일 경우를 생각도 못한 거면서.”
“오오! 팀장님 대단하십니다.”
“훗, 뭘 이 정도 가지고. 움화화화!”
“우오오오!”
둘이 쿵짝이 잘 맞네.
영훈 오빠가 새 로드 매니저를 아주 잘 뽑았나 봐.
“저 아줌마 없으면 한성이도 더 잘 찍겠지?”
“아마도?”
카메라에 크게 잡히는 장면마다 저 아줌마의 눈치를 살폈던 아이니까.
없으면 의식이 덜 될 테니 잘 찍을 거다.
‘그래야만 해. 안 그러면 우리 지한이 퇴근이 늦어진단 말이야.’
야간촬영도 없는데 늦게 퇴근하는 건 사양이다.
촬영 준비가 끝났는지 스태프들의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좋았어. 자 그럼 이제 찍겠습니다. 레디 액션!”
충환이 테스트하는 심정으로 지한이와 한성이 붙는 장면을 먼저 찍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성이 NG를 냈다.
방금 또 저 아줌마 봤었지?
“저 아줌마 거슬려.”
“자아, 한 번 더 가겠습니다. 액션!”
한 번 더
한성아 긴장 풀고, 한 번만 더 할까?
테이크가 쌓여갔다.
지연이 뚱한 얼굴로 10번째 NG를 낸 아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아줌마를 보았다.
지한은 실수가 거듭되자 숨은 쉬는지 걱정이 될 만큼 하얗게 질린 형을 쳐다봤다.
“형, 저 아줌마 무서워?”
“어, 응?”
지한의 말에 긴장에 덜덜 떨고 있던 한성이 고개를 들었다.
“저 아줌마 말이야. 눈 쭉 찢어지고, 입술 피 난 거 같은 사람.”
“푸흡. 피 난 거 같아?”
“응. 이상해. 입만 보여. 그래서 더 무시무시한 거 같고.”
한성은 그 유명한 오지한의 입에서 장난스러운 말이 나오자 긴장이 풀린 듯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가 톱스타니까 친해서 나쁠 건 없지만 붙으면 꼭 이기라고 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이기라고.
그냥 친하게 지내면 안 되나?
그러고 싶은데.
“형 연기 잘하잖아.”
“내, 내가?”
“응.”
“난 잘, 못해.”
“아니야. 잘해.”
단호하게 말하는 지한의 말에 한성이 우물쭈물하다 말은 뱉었다.
“어떻게 잘하는지 아는데?”
“우리 누나가 생활 연기보다 더 실감나는 연기는 없다고 했어.”
“생활 연기?”
그게 무슨 말이지?
“형은 이미 현우 그 자체잖아. 맨날 눈치보고 당하고 살고, 하고 싶은 말 못하잖아.”
“아….”
“그러니까 그 모습 그대로 보여준다면 분명 잘 할 거야.”
대스타의 확신이 담긴 말에 한성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리고 저 아줌마는 걱정하지 마.”
“왜, 왜?”
“우리 누나가 있으니까.”
누나가 다 해결해 줄 거라는 듯이 굳건한 믿음을 보이며 가슴을 펴는 지한을 보고 한성이 영문 모를 얼굴을 했다.
누나가 있는 거랑 우리 엄마를 걱정하지 말라는 게 무슨 말이지?
아리송하게 서 있을 때, 카메라 밖이 소란스러웠다.
* * *
“휴우. 잠시 쉬고 가겠습니다.”
충환의 말에 한성의 엄마인 세란이 아이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따라와.”
강압적으로 말하는 그녀를 보고 지한이 막아섰다.
“아줌마.”
“뭐? 아, 아줌마?”
“한성이 형네 엄마니까 아줌마 맞잖아요, 그쵸?”
“그! 렇지. 호호. 이 아줌마한테 무슨 볼일이니?”
“제가 한성이 형 연기 조금 봐도 될까요?”
“네가? 네가 뭘 안다고 우리 애 연기를 본다는 거니?”
“저 형 도와줄 수 있어요. 지금 형 연기에서 뭐가 문젠지 알고 있거든요.”
지한의 말에 세란의 미간이 꿈틀했다.
감히 주제넘게 내 아이 연기에 간섭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어.
할리우드 스타면 다야?
운 좋게 몇 편 찍은 거 가지고!
곧 우리 애가 따라잡을 거야.
잠깐, 저거 분명 우리 애가 연기를 잘 하니까 망치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머릿속으로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친 세란이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한데, 우리 애 연기는 내가 잘 안단다.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쳤어.”
“아닌데.”
“아니기는, 한성이는 내가 직접 가르쳤어. 내가 하라는 대로 해서 오디션에도 합격한 거야.”
“한성이 형은 그냥 잘하는 거예요. 아줌마가 가르쳐서 잘하는 게 아니라. 그리고 형 연기에 방해되는 건 아줌만데.”
“뭐어!? 내가 뭐가 방해가 된다는 거야!”
“몰랐어요? 여기 있는 사람 다 아는데. 형이 지금 아줌마 때문에 연기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거.”
지한이 정곡을 찔렀다.
감히 자신의 연기 스타일을 지적받았다는 생각에 무명시절 때의 서러움이 떠오른 세란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잘못 가르쳤다는 거야!?”
“어떻게 가르쳤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한성이 형이 연기하는 걸 방해하는 사람은 아줌마예요.”
“너 뭐야. 어디서 어른한테 그런 건방진 말을 하는 거야!?”
세란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죄송하지만, 저희 배우님께는 손대실 수 없습니다.”
세란의 뒤에서 형석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지한과 아이들 사이로 영훈이 끼어들고, 지연이 동생을 등 뒤로 보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화를 내려던 세란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촬영장에 있는 스태프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여기는 자신이 아이를 가르치던 집이 아니었다.
촬영장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언성을 높였던 세란이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듯 눈을 끔뻑였다.
충환이 웃는 얼굴로, 하지만 눈은 차게 식은 채 세란에게 말했다.
“요새는 촬영장에서 매니저가 방해를 다 하네요.”
“저기, 그러니까 PD님 저는 애 보호자로서.”
“여기서는! 매니저로 오신 거죠. 안 그렇습니까?”
“…맞아요.”
“그리고 오지한 배우가 한 말이 맞아요. 한성이 매니저분 때문에 우리 촬영 진도가 안 나가고 있잖아요.”
“그건 제가 한성이를 더 가르치겠습니다.”
“됐어요. 지금 누가 누굴 가르친다는 겁니까. 세상에 어떤 매니저가 배우의 연기를 가르쳐요. 그 정도 실력이 있으면 트레이너를 하든지 배우를 했겠죠.”
조목조목 맞는 말에 세란은 화가 났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앞으로 최한성 배우 매니저는 촬영장에 들어오지 마세요.”
“PD님!”
“PD로서 하는 말입니다. 아니면 한성이 뺄까요?”
이 드라마에서 빠지는 건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럴 순 없던 세란은 억울함에 몸에 힘이 들어갔으나 선택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죄송합니다. 나가 있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한성이는 계속 촬영하겠습니다.”
결정을 내린 세란은 스태프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촬영장을 나섰다.
이제 저 아줌마 기 좀 죽었으려나?
한성이한테 해코지 하는지 지켜봐야겠네.
“봐봐, 형. 우리 누나가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지?”
“누나는 한 거 없는데. 두 사람 다 괜찮아?”
“응. 나는 괜찮아. 그런데 촬영장이 엉망이 돼버렸네. PD님 죄송합니다. 다른 분들도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PD님. 저희가 소란을 일으킨 거 같네요.”
“아닙니다. 어디 지한이가 문제를 일으켰나요? 오히려 맞는 말했죠.”
“그래도 첫날부터 죄송하네요. 사과의 의미로 촬영 끝나고 회식 어떠십니까? 고기로 쏘겠습니다.”
“고 팀장님이 쏘시는 겁니까?”
“아니요. 저희 사장님이 쏘는 겁니다.”
영훈이 지갑에서 법인카드를 꺼내들었다.
조명에 번쩍이는 카드를 본 스태프들이 환호했다.
“자, 그럼 오늘 촬영 빨리 끝내야겠네요. 제군들 어서 준비합시다.”
“네에!”
“넵!”
촬영장의 유일한 방해꾼이 사라지자 모두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이 웃었다.
끝나면 고기다!
스태프들의 분위기가 풀어진 걸 보고 지연이 한성을 바라봤다.
“한성이지? 내 동생 잘 부탁해.”
“네, 네!?”
“내 동생 잘 봐 주면 나도 한성이 널 도와줄게.”
한성이 지연이 내민 손을 바라봤다.
자신 때문에 엄마 앞을 막아서던 지한과 엄마가 손을 들었을 때 주저 없이 우리 앞을 가로막던 작은 등.
“왜, 왜 도와주는 거예요?”
“왜라니 우리 동생이랑 같은 수비대원이니까 그렇지.”
지연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한성이 지연이 내민 손을 꼭 잡았다.
“고맙습니다.”
“응. 혹시 집에 가서 엄마가 억지로 연기 시키거나 하면 말해.”
“그치만.”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게 도와줄게.”
“!”
지연의 말에 한성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말을 잊지 못하는 모습에 지연이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85. 다 같이 볼래?
“컷! 좋았어! 잘하는데? 역시 지한이야. 그리고 한성아, 너도 잘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칭찬에 한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촬영장에서 한성의 엄마인 홍세란이 촬영장에 출입금지를 당한 후부터 한성은 제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성은 한별의 앞에서 주눅 든 표정이나 엄마에게 학교에서 괴롭힘 당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는 씬에서 스태프의 탄성을 받았다.
“한성이 형! 연기 좋았어.”
“고마워. 그런데 나 진짜 잘했어? 이, 이상한 데는 없었고?”
“음. 나라면 아까 그 장면에서 무작정 무섭기보다는 화도 났을 거야.”
“화가 나? 어떻게?”
으음.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지한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을 이용했다.
눈을 감았다 떴다.
아이의 눈에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
좌절, 슬픔, 분노
“‘미안.’”
대항할 수 없는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왜 나만 당해야 하는 억울한 마음이 가득 찬 울분이 느껴졌다.
한성은 순식간에 몰입한 지한의 연기를 보고 감탄했다.
현장에서 이제야 제대로 된 연기를 배우는 셈이지만 짧은 식견으로도 알았다.
‘지한이의 연기는 특별해.’
순식간에 몰입하는 감정.
어린 아이임에도 능수능란한 표정연기.
선명한 캐릭터까지.
이래서 오지한오지한 하는구나.
어린 나이임에도 주변에 있는 스태프들과 PD가 지한을 존중하는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우리 누나도 형보고 연기 괜찮다고 했으니까. 우리 누나가 괜찮다고 하는 사람은 얼마 없어.”
“지, 지연 선배님이?”
지한의 말에 한성이 말을 더듬었다.
“형 왜 그래?”
“아, 아니야. 그런데 지연 선배님이 나 괜찮대?”
“저번에 형 연기한 거 보고 이번 드라마는 괜찮겠다고 했어. 다른 연기는 아직 모르겠대.”
“정말?!”
한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한은 자신의 말에 묘하게 들뜬 한성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 형 혹시.’
어릴 때부터 눈칫밥 먹고 살아왔다.
운 좋게 하얀 뱀을 만나고 나서 일이 잘 풀렸지만 그래도 둘만 남은 남매를 노리는 사람들이 없을 수 없다.
그 모든 걸 몸으로 느끼고 있는 지한은 감이 매우, 극도로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지한의 촉이 한성을 향해 곤두섰다.
“저기, 혹시.”
“이제 다음 씬 찍으러 가야지. 형은 바로 다음 씬 찍으러 가지?”
“어? 응.”
“나는 다음 촬영까지 시간이 있어서 조금 쉬어야겠다. 형 힘내.”
“어어. 그래. 잘 쉬어.”
한성이 멀어지는 지한의 등 뒤로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나 뭐 물어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걸음을 옮기는 한성이 고개를 기울였다.
* * *
야외촬영은 힘들다.
지한이 자신의 몫의 의자에 안장서 발을 까딱였다.
“지한아 마실 거라도 갖다 줄까?”
“아니, 괜찮아. 그런데 형. 저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지한의 말에 영훈이 아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꺄아아아아!
지한아! 여기야!
분명 학교에 가 있을 시간인데 교복입은 아이들이 어떻게 여기 촬영장에 와서 응원을 하고 있는 거지?
아무리 우리가 바깥에서 촬영한다고 하지만 소문을 듣고 왔다고?
‘그럴 리가. 촬영 스케줄을 알고 있던 거겠지.’
관계자의 지인의 지인의 지인의 지인의.
아무튼 파고들자면 고구마 줄기처럼 나오는 인맥 때문에 완전한 비밀이란 없었다.
후다닥 찍고 가야 하는데 점점 사람들이 더 몰리면 촬영장을 제어하기 힘들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