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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62화 (462/556)

난 할 수 있어 462화

“바로 저분은 소싯적에 한눈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개 관상쟁이한테 밀려버리고 만 것이죠.”

그 말에 하객의 시선이 일제히 서청수 회장에게 쏠렸다.

서청수 회장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미친 늙은이가 지금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서청수 회장의 콧구멍에서 더운 김이 뿜어졌다.

만몽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바람피우지 마십시오. 좋은 소리 몇 개 더 할까요. 마약 하지 마세요. 갑질 하지 마세요. 속이지 마세요. 이상 여러 가지 옳은 소리로 주례사를 갈음하겠습니다.”

어색한 분위기에 하객들은 박수를 쳐야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서청수 회장은 입술을 꾹 악물고 화를 눌렀다.

그리고 짝, 짝, 짝.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가 박수를 치자 하객들은 그제야 마음 놓고 박수를 쳤다.

대찬은 이미 혼이 빠져 실신할 지경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민승기 역시 당황해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겨우 수습했다.

“다, 다음은 축가가 있겠습니다. 축가는 신랑의 친구인 최재한과 마강국이 수고해주시겠습니다.”

‘필래 서청수 회장, 결혼식장서 ‘뜬금’ 망신…….’

방금 벌어진 사태에 열심히 노트북으로 기사를 작성하던 최재한은 얼른 자리로 나갔다.

그 사이 필래의 직원이 최재한의 노트북을 입수해 기사를 지워버렸다.

최재한과 마강국이 신랑과 신부 앞에 서서 서투른 솜씨로 노래를 불렀다.

“기다리란 말만 하면서 외면했죠. 오랜 시간. 조금 기다리면 그 때가, 올 거라고, Someday. 그대 원하는, 그 말을 다 알면서, 얼마나 오래 기다린 줄 알면서, 이제야 말하네요…….”

대찬은 축가가 귀에 안 들어올 만큼 정신이 멍했다.

도대체 결혼식조차 평범할 수 없는 운명이라니.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순간까지도 대찬의 시선은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보다 못한 윤이영이 허리를 쿡 찔렀다.

“야, 결혼식 집중해라. 한 번뿐이다.”

“아, 미안 미안…….”

촬영을 마치고 윤이영이 부케를 던졌다.

무탈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결혼식이 끝났다.

대찬과 윤이영은 바로 멕시코 칸쿤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나란히 비행기에 앉고, 대찬은 윤이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윤이영도 대찬과 눈을 맞췄다.

대찬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수줍게 말했다.

“여보.”

윤이영도 얼굴을 붉히다가 대답했다.

“응, 여보.”

둘은 큭큭 웃다가 진하게 입을 맞췄다.

안전벨트를 매라고 잔소리를 하려던 승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들을 지나쳐갔다.

신혼여행은 달콤했다.

특히 빡빡한 일상에 찌든 대찬과 윤이영에게는 더욱 달콤했다.

선베드에 누워 에메랄드빛 바다를 바라보며 데킬라 한 잔을 곁들이면.

그것보다 좋은 게 없었다.

대찬은 윤이영을 꼭 안은 채로 중얼거렸다.

“아, 돌아가기 싫다.”

“나도 그래. 그래도 어떡해. 먹고 살려면.”

대찬은 허공에 탄식을 뿜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먹고 살려면.”

대찬은 음흉하게 웃으며 윤이영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우리 주니어 먹여 살리려면 일해야지, 그치?”

“이거 왜 이래, 징그럽게!”

“참 나!”

“애는 한참 나중에 낳기로 했잖아. 나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우리가 애를 제대로 키울 상황이 아니라니까.”

“알아, 알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래도 영영 없진 않을 거잖아.”

“그때 가서 얘기해도 안 늦어.”

“지나가는 말인데 물고 늘어지기는!”

“흥.”

동양인 부부가 선베드 하나에서 아웅다웅하는 꼴불견을 보고 늙은 백인 부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신혼여행은 눈 깜짝하는 사이 끝나버렸다.

서울에서 멕시코 칸쿤까지의 비행시간을 앞뒤로 제하면 실제 머문 시간도 짧긴 했다.

대찬은 귀국편의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향할 때, 온몸을 비틀며 괴성을 질렀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의 꼬락서니였다.

윤이영은 그를 질질 끌고 가면서 가볍게 등짝을 후렸다.

“돌아가면 일 좀 편하게 해. 믿음직한 사람들 주위에 많잖아.”

“가기 싫어.”

“민 전무님, 한 이사님, 싱 전무님. 그 사람들한테 일 좀 나눠주고 오빠는 딱 1인분만 하라고.”

“생각은 항상 그렇게 하는데 몸이 안 따라오네.”

“중독이야, 일 중독.”

“마약보단 낫지?”

“중독은 무조건 나쁜 거야.”

“아, 회사 가기 싫다.”

“사장님도 회사 가기 싫구나.”

“열심히 일 안 하는 사장님이나 회사 가고 싶어 하는 거지. 나는 열심히 한다고.”

대찬이 정말 싫은 표정을 짓자 윤이영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신혼여행을 마친 대찬은 윤이영과 집을 합쳤다.

윤이영이 주로 활동하는 서울에 집을 얻을 것이냐.

아니면 대찬의 근거지가 있는 흥읍에 집을 얻을 것이냐.

그게 둘 사이 잠깐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건 비단 둘만의 화두는 아니었다.

로튼 프룻츠의 시커먼 남정네 직원들은 담배를 뻑뻑 피우며 삼삼오오 모여 떠들었다.

진위생이 김산호에게 말했다.

“대표님이 흥읍으로 온다에 만 원 겁니다.”

“아, 진짜 재수 없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누군 좋아서 겁니까. 그럴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때 잠시 대찬의 곁을 피해 틈바구니에 낀 마강국이 말했다.

“그거 좋네요. 안 그래도 서울에서 흥읍까지 왔다 갔다 모시고 다니는 거 귀찮았는데.”

김산호는 마강국에게 눈총을 쐈다.

“마강국 씨 너무하네요. 마강국 씨는 편하겠지만 저희는 아니거든요? 그러는 순간 지옥이에요, 지옥.”

“왜요? 대표님이 뭐 오밤중에 불러내기를 하나, 뭘 하나.”

“마강국 씨도 유부남이면서 왜 모르는 척 하세요?”

“뭘?”

김산호는 대찬이 있나 없나 주위를 살피고 속닥거렸다.

“이제 어떻게든 집에서 탈출할 궁리만 할 거라고요. 야근 있다고 핑계 대고 매일 우리랑 술 먹자고 할 걸요?”

“으음, 듣고 보니 그러네.”

“저는 부적 쓰는 셈 치더라도 서울에 남는다에 만 원 걸겠어요. 아니, 만 원 받고 담배 한 갑 겁니다.”

그때 한태윤 이사가 끼어들었다.

“김산호 씨, 안됐네요.”

“…안됐다뇨, 이사님?”

“방금 대표님 흥읍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셨어요.”

“아, 제발.”

김산호의 억장이 와르르 무너졌다.

“캠퍼스 근처 개인 소유 부지에 단독주택 짓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흥읍시내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고.”

“아, 진짜…….”

그러자 이쪽으로 안테나를 길게 빼고 있던 연구원들이 수군거렸다.

“저러면 우리한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당연히 좋죠. 은 소장님, 싱 전무님 이제 우리랑 안 어울리고 대표님이랑 어울릴 텐데.”

“어, 그러네. 야, 오늘 내가 쏜다. 기념 파티하자.”

본사 직원들과는 달리 연구원들은 희희낙락이었다.

김산호가 얄미운 그쪽에 눈을 흘기는 사이, 진위생이 그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자, 내기는 내기니까. 만 원에 담배 한 갑 받아 가겠습니다.”

“아, 진짜 진위생 씨는 동료의식도 없어요.”

“돈 앞에 그딴 게 어디 있어요?”

김산호는 뚱한 표정으로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그의 손바닥 위에 턱 올려놓았다.

한태윤 이사의 말대로 대찬은 흥읍으로 이사를 했다.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윤이영에게 말했다.

“너무 나만 편한 결정 같아서 미안하네.”

“그 소리 한 번만 더하면 백 번 채우는 거 알지? 1절만 합시다.”

“그래도 미안하니까.”

윤이영은 피식 웃었다.

“흥읍이 뭐가 어때서 그래. 공기 좋지, 공기 좋은 거 치고 나름 교통도 좋지.”

“그건 그렇지.”

“그리고 남편 직장 가까워서 감시하기 딱 좋지.”

대찬은 난감하게 웃었다.

“그건 좀 그러네.”

“나 이제부터 일도 좀 쉬엄쉬엄할 거라 서울에 자주 갈 일도 없어.”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대찬은 윤이영의 등을 쓸고 열심히 이삿짐을 날랐다.

대찬과 윤이영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르샨 싱 전무와 정무숙은 혼인신고를 했다.

둘 다 나이가 찰 만큼 찬 사람들이라 결혼식은 남사스럽다고 생략하기로 했다.

정무숙과는 달리 결혼 경험이 없는 다르샨 싱은 내심 한국식 결혼식을 치르고 싶은 눈치였지만, 정무숙의 생각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

식은 열리지 않았지만 대찬은 축의금 명목으로 적지 않은 금액을 다르샨 싱 전무에게 슬쩍 찔러주었다.

흥읍을 살 곳으로 정한 대찬, 윤이영 부부와는 달리 다르샨 싱, 정무숙 부부는 서울을 살 곳으로 정했다.

‘모로 보나 여자 입김이 남자보다 훨씬 세네.’

대찬은 출근길이 너무 멀다고 징징대는 다르샨 싱 전무를 보고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행복해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불행한 누군가를 바라보는 일이다.

대찬은 가슴털을 사랑하는 연상의 부인을 가진 다르샨 싱 전무를 보고, 자기 신세가 좀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게 적잖은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로튼 프룻츠의 중역들이 가정을 꾸리고 단란한 사생활을 보내는 사이.

그 와중에도 비도축육의 생산단가는 지속적으로 낮아졌다.

로튼 프룻츠의 주가는 반비례하여 높아졌다.

모름지기 자원은 쌓아두는 게 아니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만 봐도 그렇다.

채굴한 자원을 세월아 네월아 그냥 놔두는 건 초보에게서나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대찬은 회사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최소한의 자금만 곳간에 쌓아두었다.

나머지는 모두 재투자했다.

특히 대찬은 요산테크닉스의 지분을 추가로 사들였다.

시장에서 찔끔찔끔 요산테크닉스 지분을 사들이던 대찬은, 얼마 지나지 않아 통 크게 아예 요산그룹으로부터 과반의 지분을 사들였다.

이제 요산테크닉스는 모그룹인 요산그룹을 제치고 로튼 프룻츠가 과반의 대주주로 올라섰다.

로튼 프룻츠가 요산테크닉스를 인수했다.

요산테크닉스는 한국의 유일한 비도축육 관련 설비 생산기업이었다.

로튼 프룻츠에는 없어서는 안 될 생명 같은 존재.

때문에 요산그룹의 회장은 시장가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대찬에게 내밀었다.

협상 테이블에서 대찬은 난색을 표했다.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물 한 컵은 뭍짐승에게는 십 원 어치도 안 되지만, 뭍으로 나온 물고기에게는 생명 그 자체 아니겠습니까.”

“저희가 뭍으로 나온 물고기로 보이십니까?”

“아닌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죄송하지만 다소 착각하고 계신 듯합니다.”

“…착각이라뇨.”

“뭍에 나온 고기도 나름대로 살 길을 강구하는 법이에요.”

“무슨 말씀이신지.”

“1차적으로는 요산의 설비를 들여놨습니다만, 그 다음에도 요산의 손을 잡을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요산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찬은 편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희가 비도축육을 식탁 위에 올리는 데 성공하면서, 관련 설비를 개발하는 회사들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굳이 비유하자면 뭍에 나온 고기가 아니라 뭍에 나온 용왕입니다. 용왕이 비를 내리게 하니 여기저기 웅덩이가 고이기 시작하거든요.”

요산 회장은 어흠, 헛기침을 했다.

“요산의 물 한 컵이 절실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당장 구비된 설비만으로도 2년은 너끈히 버팁니다.”

“…….”

“당장 저와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운 태상바이오테크에서 관련 기술을 개발 중에 있습니다.”

“태상이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만일 요산에서 지나치게 배짱을 튕긴다면 저희는 요산의 지분을 전량 매각하고 태상의 손을 잡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그건…….”

요산 회장은 대찬의 말에 마땅히 받아칠 말이 없었다.

요산의 설비는 로튼 프룻츠에 필수적이었다.

반대로 요산에 있어서도 로튼 프룻츠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로튼 프룻츠가 아니면 비도축육 생산에 관련된 설비를 사줄 고객이 없었다.

요산테크닉스의 주가는 로튼 프룻츠의 주가와 비례해서 폭등했다.

그러나 로튼 프룻츠가 공식적으로 요산 테크닉스의 손을 뿌리치겠다고 하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던 요산테크닉스는 다시 여의주를 뺏기고 이무기로 돌아가 땅바닥에 처박히는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회장님, 값은 섭섭지 않게 쳐드리겠습니다. 상식선에서 거래하시죠.”

요산 회장은 그런 대찬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죠.”

그렇게 로튼 프룻츠는 적정가보다 양심적으로 후려친 가격에 요산테크닉스를 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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