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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61화 (461/556)

난 할 수 있어 461화

전화로 태영주가 그런 생각을 전하자, 윤이영은 웃으며 말했다.

“저, 염치없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정말 괜찮겠어? 난 내가 뱉어놓고도 무슨 주책인가 싶었는데.”

“어차피 자리가 비어있어도 관심이 집중될 거예요. 차라리 선생님이 떡하니 지켜주시는 게 당연히 훨씬 낫죠.”

“아유, 식 전날에라도 마음 바뀌면 편하게 얘기해줘라, 응? 결혼식에서는 다른 거 다 따질 거 없어. 신랑, 신부가 우선이야, 알지?”

“그럼요.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윤이영은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 결과가 바로 태영주의 화려한 의상과 그녀가 메울 부모의 공백이었다.

태영주는 한 원로 남자 배우와 동행했다.

그 역시 태영주만큼이나 윤이영을 각별하게 아끼기로 안팎에 소문이 자자한 이였다.

윤이영은 그에게도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윤이영은 그와 태영주의 손을 꼭 잡고 한참을 서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걸 태영주가 얼른 닦아주었다.

“신부는 오늘 무조건 예쁘기만 해야 돼. 울지 마, 알았지.”

“고맙습니다, 선생님.”

“오늘은 엄마야.”

“네, 엄마…….”

윤이영은 눈은 울고 입은 웃었다.

결혼식 사회는 민승기가 봤다.

최재한은 가장 친한 친구인 자기가 사회를 보는 게 맞지 않느냐고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대찬도 윤이영이 양해만 해준다면 그에게 사회를 맡기고 싶었다.

그러나 대찬은 사회자로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

굳이 현직 기자와의 친분을 대외적으로 드러낼 이유는 없었다.

그건 대찬에게도, 최재한에게도 별로 좋은 일은 아니었다.

민승기는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결혼식을 진행했다.

“지금부터 신랑 조대찬 군과 신부 윤이영 양의 결혼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민승기는 대찬의 결혼식이 아니더라도 이미 여러 사람의 결혼식 사회를 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능숙하게 식을 진행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결혼식 하객들은 기실 행사보다는 차라리 피로연에 더 관심이 가 있기 마련이었다.

특히 신랑, 신부와 데면데면한 관계의 하객들은 더 그랬다.

그래서 식장의 뒤편은 자유롭게 드나드는 하객들로 어수선하기 마련이었다.

그 어수선한 틈으로 한 중년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결혼식에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결혼식에는 카메라들이 많았다.

관심이 뜨거운 만큼 이런저런 언론사에서 출동한 카메라들이었다.

중년 남녀는 그 카메라 숲을 헤치고 슬금슬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민승기는 평온하게 사회를 봤다.

“자, 신랑 입장.”

대찬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입장했다.

행진곡이 깔리고, 대찬은 뚜벅뚜벅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대찬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사진은 바로 속보의 딱지가 붙어 인터넷에 올라갈 것이었다.

“다음은 신부 입장.”

윤이영은 오늘 하루 아버지를 대신해줄 원로 남자 배우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그녀는 절제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민승기는 선남선녀를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둘을 맞절시킬 순서였다.

그때 순조롭기만 하던 민승기의 진행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방해했다.

“이게 무슨 경우 없는 결혼이야! 족보 없는 결혼이야!”

“당신 뭔데 내 딸 손목을 잡고 있어!”

중년 남녀가 갑자기 식장의 한가운데로 난입했다.

그러자 장내는 일순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찬과 윤이영도 눈이 커져서 그쪽으로 고개가 향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원로 남자 배우 역시 어안이 벙벙한 얼굴.

옳다구나, 기사 감을 포착한 카메라들이 그쪽으로 각도를 틀었다.

그쪽을 바라본 윤이영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중년 부부는 화려한 드레스 때문에 가장 눈에 잘 띄는 윤이영을 향해 다가왔다.

“얘! 아무리 부모가 미워도 그렇지 어떻게 네가 이럴 수 있니?”

“딸 시집보내는데 손 한번 못 잡아보는 불행한 애비가 나 말고 누가 또 있겠냐, 아이고오…….”

윤이영의 부모였다.

그들은 눈물을 찔끔찔끔 짜내며 윤이영에게 읍소했다.

“우리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이영아. 그런데 이러는 건 아니지. 부모가 두 눈 뜨고 멀쩡히 살아있는데 이러는 건 아니지. 어떻게 결혼식장에서 부모 대역배우를 쓰니, 응?”

“아이고, 내 신세야. 아이고오…….”

신부도 배우고 신부의 일일 부모도 배우였는데, 이 현장에서 가장 배우다운 건 신부의 생물학적 부모였다.

그들은 이제 아예 주저앉아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울렸다.

하객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결혼식이 어디 있나.

윤이영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화를 내야 되나, 울어야 되나.

아니면 저들의 말에 수긍하고 저들을 부모석에 앉혀야 하나.

대찬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멍한 얼굴만 했다.

대찬은 천천히 윤이영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윤이영의 어깨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생물학적 부모가 울음기 잔뜩 섞인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부탁이다, 이영아. 더는 귀찮게 안 할 테니 오늘만 네 부모 노릇 하게 해다오, 응? 그래도 낳은 정이 있는 거 아니겠어?”

“…….”

“우릴 이대로 내쫓을 심산이냐? 그럼 네가 욕을 바가지로 먹을 텐데 그래도 괜찮다는 거냐, 응?”

마땅히 장내를 진정시킬 의무가 있는 민승기도 이 상황에서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우두망찰할 뿐.

누구도 이 상황을 수습할 정신이 없었다.

그러자 윤이영의 생물학적 부모는 자신들이 이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들은 마음 놓고 울기 시작했다.

더 이상 윤이영에게 할 말이 없었다.

말을 더 해봤자 그들의 엉망진창이었던 부모 노릇만 들통 날 뿐이니.

그저 짐승처럼 울 뿐이었다.

울기만 하는 그들에게 대찬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때 부모석에서 이쪽을 째려보던 태영주가 일어났다.

그녀는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서는 윤이영과 생물학적 부모 사이를 파고들었다.

태영주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윤이영의 부모를 쏘아봤다.

“당신들, 진짜 양심이란 게 있어?”

“다, 당신 뭐야……!”

“국민배우 태영주도 몰라? 간첩 아니야, 이거?”

“이, 이거?”

“그래, 이거. 그럼 뭐 사람대접 해주길 바랐니?”

험한 말을 몇 마디 듣자 계속 울던 윤이영의 어머니는 표정을 싹 바꿨다.

“이봐, 당신. 우리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어이구, 남의 결혼식 똥창 만들어놓은 주제에 반말 들으니까 기분이 드럽나 봐?”

“이, 이 인간이 진짜……!”

태영주는 턱을 치켜들고 두툼한 뱃살로 그들을 마구 몰아세웠다.

“도대체가 양심이 있어야지. 그러고도 네들이 부모야? 어느 부모가 딸자식 결혼식을 이따위로 망쳐? 그리고 뭐? 내쫓으면 욕을 바가지로 먹어? 그게 도대체가 부모 돼가지고 주절거릴 소리니, 그게?”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이래! 나 윤이영 엄마야. 남의 자리 도둑질해놓고 뭐가 그렇게 당당해!”

“오호, 그래?”

태영주는 윤이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예, 이영아. 지금이라도 저 치들이 부모석에 앉는 게 맞겠니? 대답해라. 그러라고 하면 순순히 물러나마.”

윤이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영주를 바라봤다.

“그러지 말라고 하면요……?”

“아주 둘 다 등짝을 걸레짝으로 만들고 쫓아내야지. 쫓아내고 천일염, 죽염, 히말라야 암염 안 가리고 포대로 부어 놔야지.”

“…어요.”

태영주는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 안 들려!”

“저 사람들이 부모석에 앉는 게 싫어요.”

“오케이! 접수!”

태영주는 쩌렁쩌렁하게 외치고는 이제 작정하고 둘을 내몰기 시작했다.

“도대체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당장 꺼져!”

윤이영의 부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이게 진짜!”

태영주는 우렁찬 목청으로 기자들을 향해 외쳤다.

“이영이가 배우 하겠다고 하니까 집에서 내쫓은 인간들이에요. 말 안 듣는 딸년은 딸년이 아니라고 하면서 내쫓았다고. 애가 밥은 먹는지, 잠은 자는지, 남자 만나 연애는 하는지, 살아는 있는지! 몇 년 동안 관심조차 안 가졌던 인간들이라고.”

태영주는 씩씩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인간들이 애가 좀 뜨니까 슬슬 연락을 했대. 연락해도 안 받으니까 답장 안 해도 좋으니 돈이라도 좀 부치라고 했대. 기가 막혀서.”

태영주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부모를 노려봤다.

부모는 그 시선을 슬금슬금 피했다.

“그마저도 안 들어주니까, 남들한테 돈 꾸러 다닐 때 윤이영 얼굴 담보로 내세웠지?”

“…….”

“어떻게 아느냐고? 얘한테 빚쟁이가 몇 번은 찾아왔거든. 밤낮 안 가리고 쳐들어오는 통에 이영이가 우리 집에서 며칠 살았거든.”

“…….”

“못 살게 구는 것도 정도가 있지. 결혼식장까지 와서 이 난리굿을 벌여. 도대체가 이게 부모예요? 사람이에요?”

태영주의 목소리는 배우답게 호소력이 짙었다.

취재 차 온 언론사 사람들이건 단순한 하객들이건 갑자기 등장한 윤이영의 부모들에 당황할 뿐.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지는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태영주는 일부러 저들의 잘못을 세세하게 일러주었다.

그래야 윤이영을 최대한 보호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면전에서 죄상이 낱낱이 까발려진 윤이영의 부모는 얼굴을 감싼 채로 줄행랑을 쳤다.

태영주는 한숨을 푹 쉬는 걸로 상황을 매조지고 짝짝, 박수를 치며 웃었다.

“자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것도 못 들은 겁니다. 신부입장부터 다시 해요, 우리. 좋은 날이니까, 오케이?”

“오케이—”

“에이, 목소리가 그게 뭐예요. 크게 오케이?”

“오케이!”

태영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사회자 민승기를 바라봤다.

“사회자 양반, 우리 신부, 아니 신랑 입장부터 다시해요.”

그러자 민승기도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외쳤다.

“네!”

대찬은 그 명령에 다시 저 끝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자, 신랑 입장!”

그렇게 다시 신랑 입장, 신부 입장, 신랑 신부 맞절까지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제 주례 순서가 돌아왔다.

“다음은 주례사가 있겠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주례를 확신하던 서청수 회장은 자리를 지킬 뿐 일어서지 않았다.

그는 뚱한 표정이었다.

단상에 나선 건 땅딸만한 키의 만몽거사였다.

그는 만몽거사의 뒤통수가 뚫어져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야, 김태준.”

“네, 회장님.”

“내가 저 망할 노인네보다 못한 게 뭔데?”

“…글쎄요.”

“야, 김태준.”

“네, 회장님.”

“로튼 프룻츠에 투자금 반으로 후려쳐.”

“…혹시 로튼 프룻츠 시총 4천 억 돌파한 거 못 들으셨어요?”

“이럴 땐 그냥 넘어가지?”

“넵.”

허튼 심술에 김태준 사장은 웃음으로 넘겼다.

졸린 눈으로 단상에 선 만몽거사는 마이크를 한껏 아래로 내렸다.

“오래 살다보니 이런 호화스런 곳에서 주례를 다 해봅니다.”

신랑과 신부는 긴장한 얼굴로 만몽의 주례사를 들었다.

“나도 올바른 인생을 산 사람은 아니라 주저리주저리 가르칠 말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이거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만몽거사는 늙은 목청에도 여전히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먼저 죽든 한쪽이 죽을 때까지 한눈 팔지 마십쇼. 그건 비열한 짓입니다. 스스로를 짐승으로 격하시키는 일입니다. 알겠습니까?”

대찬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만몽거사는 눈을 부릅뜨며 꽥 소리를 질렀다.

“조대찬!”

갑자기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에 대찬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깨를 움츠렸다.

“네, 네에!”

“대답 봐라. 조대찬!”

“넵!”

바짝 얼어붙은 대찬을 보고 신랑 쪽 하객들이 킥킥거렸다.

만몽은 뒷짐을 지며 준엄하게 말했다.

“바람피우지 말고 신부 눈에 눈물 안 나게 해라. 알겠냐!”

“아, 알겠습니다!”

만몽거사는 큭큭 웃으면서 시선을 서청수 회장 쪽으로 향했다.

“한눈을 팔면 안 된다는 건 신랑신부, 그리고 하객 여러분께선 오늘 이 자리만 봐도 알 수 있을 겁니다.”

‘저 영감쟁이가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대찬은 만몽거사에게 주례를 맡긴 걸 뼛속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만몽은 말을 이었다.

“자, 보십시오. 나는 별 볼일 없는 관상쟁입니다. 그리고 저기에는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회장님이 앉아계십니다. 그런데 신랑신부는 나한테 주례를 맡겼습니다. 왜겠습니까?”

만몽거사의 멋대로 뱉어대는 말에 대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말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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