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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68화 (267/556)

난 할 수 있어 268화

은오영 교수가 사진을 찍고 물러나오자, 총장은 슬금슬금 사진을 찍으러 기어 나왔다.

대찬은 그쪽으로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총장님, 저는 은 교수님하고 캠퍼스 좀 둘러보다가 돌아가겠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합니다.”

“예? 아…….”

총장은 어정쩡한 자세로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은 은오영 교수와 다르샨 싱을 대동하고 대학본부 바깥으로 나갔다.

은오영 교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총장님한테 너무 찬바람 쌩쌩 부는 거 아니에요?”

“지금껏 제 파트너를 푸대접한 인간에게 훈풍이 불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런 감동적인 말씀을.”

“감동 받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대찬은 피식 웃었다.

대찬과 은오영 교수, 그리고 다르샨 본부장은 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잔씩 들고 중림대 캠퍼스를 산책했다.

대찬은 은오영 교수에게 말했다.

“우선 연구를 위한 한우 두 마리를 연구팀에 기증하겠습니다. 설비도 힘닿는 데까지는 지원하고요.”

“고맙습니다, 대표님.”

대찬은 다르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한 성과가 있기 전까지 전폭적인 지원은 어렵습니다. 다만 로튼 프룻츠 차원에서의 푸시만 있을 거예요.”

“더 큰 단위의 투자를 받으려면 빨리 그럴 듯한 결과물을 내놔야겠군요.”

“네, 어렵진 않을 겁니다. 이미 다르샨과 은 교수님이 미국에서 만들어놓은 틀이 갖춰져 있으니까요.”

“좋습니다. 최선을 다하죠.”

중림대학교 측에서는 다르샨에게 비어있는 교수 사택을 제공했다.

말이 교수 사택이지 여기저기 손봐야할 곳이 많았다.

대찬은 다르샨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택의 전면 리모델링과 필요한 가전제품 등 집기를 모두 마련해주었다.

김치를 장독에 담아 땅 밑에 묻어두었다.

이제 김치가 푹 익을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은오영과 다르샨이라는 유산균이 김치를 맛있게 발효시켜줄 것이다.

그때까지 괜히 장독을 꺼내고 뚜껑을 열어보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김치 맛만 없어진다.

은오영 교수는 대찬이 다시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차를 타려는 찰나,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근데 있잖습니까, 조 대표님.”

“네?”

“이렇게 일도 잘됐고 저도 나름 떳떳해졌으니…….”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렇게 빙빙 돌리세요?”

은오영 교수는 겸연쩍게 웃었다.

“고수혁 군, 우리 학교로 데려와도 되지 않을까요?”

은오영 교수의 말을 듣고 대찬은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절대 안 됩니다.”

대찬은 매몰차게 차 문을 닫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혹여 은오영 교수가 또 다시 마수를 뻗칠까, 대찬은 고수혁에게 전화를 걸어 신신당부했다.

“수혁아, 절대 중림대 가면 안 된다.”

“갑자기 전화해서 뜬금없는 말씀부터 하세요?”

“가면 안 된다. 빨리 알았다고 해.”

“…알았어요.”

“그래, 끊는다.”

대찬은 용건만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뭐야.”

고수혁은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찬은 짬을 내서 윤이영과 만났다.

윤이영은 대찬의 말을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로튼 프룻츠는 도대체 뭐 하는 회사예요? 커피 수입해, 사회공헌사업도 해, 광고도 찍어, 이제는 실험실에서 고기를 만든다구요?”

“완전 짬뽕이죠.”

“그러니까요. 그래도 우리가 나이 좀 먹고 난 뒤에는 그 배양육인가 뭔가가 메인이 되겠죠?”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우와, 신기해요. 실험실에서 고기를 만들다니.”

“그죠? 저도 신기해요.”

“지금 기술로 만든 고기는 엄청 비싸겠죠?”

대찬은 썰던 스테이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먹는 걸 만들려면 적어도 1억은 들어요.”

“미쳤어! 그럼 누가 사먹어요?”

대찬은 웃으면서 고기를 입에 넣었다.

“누구나 사먹게 하려고 지금 연구하는 거잖아요.”

“얼마나 싸게 만들려고 하시는데요?”

“그건 이과의 몫이죠. 그래도 제 문과적 상상력으로는 이 정도 고기를 3천 원에 먹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그런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근데 소 키우시는 분들은 싫겠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갈 길이 멀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사회가 아니니까. 소 키우시는 분들에게도 피해가 최대한 덜하도록 해야죠.”

“보통 대찬 씨 같은 비즈니스맨은 냉혹하게 말하던데요? 자본주의의 근간은 경쟁.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은 도태되면 그만이라고요.”

“그렇죠. 저도 그렇게 살아왔어요.”

윤이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다르게 말씀하세요? 혼자서 가는 사회가 아니라고.”

“경쟁과 도태를 말하는 사람들은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어요?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는 거지.”

“대찬 씨는 그럼 경쟁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대찬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업은 최소한 한국에서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사업이에요. 그러니 누구와 경쟁하겠어요.”

“그건 그렇네요. 경쟁하는 대신 대찬 씨의 성장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는 거죠.”

“네, 그게 아니면 제 사업도 성공할 수 없거든요.”

“왜요? 그냥 막 나가면 안 돼요?”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배양육은 식품, 그 중에서도 축산물에 속하겠죠. 축산물 안에서도 식육으로 분류되거든요.”

“네.”

“근데 축산물 위생관리법 상 식육은 식용을 목적으로 하는 가축의 지육, 정육, 내장, 그 밖의 부분으로 규정돼있거든요.”

윤이영은 손에 쥔 포크의 끝을 살짝 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슬슬 아파오네요.”

“지육은 가축을 도살한 후 껍질을 벗기고 머리, 꼬리, 사지 끝을 절단하고 내장을 꺼낸 몸의 부분을 뜻해요.”

“말 그대로 고기네요.”

“네, 근데 배양육은 고기는 고긴데 이 정의에 해당하지 않거든요? 가축을 도살하지도, 껍질을 벗기지도 않아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대찬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배양육은 축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간단한 용어정의부터 혼선이 빚어지거든요.”

“근데 식육은 지육, 정육, 내장, 그리고 그 밖의 부분이라고 하잖아요?”

“네.”

“그럼 그 밖의 부분으로 분류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죠. 근데 그건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라 행정부든, 입법부든, 사법부든 저 높으신 분들이 결정한단 말이에요.”

“그건 그렇죠…….”

“저 높으신 분들은 여론에 민감해요. 만약 축산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돼지를 오체분시하면서 시위하면요? 그분들 눈치를 안 볼 수가 없겠죠.”

윤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그래서 다 같이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거네요.”

“네, 경쟁이 없는 대신 무법지대로 나아가는 거니까요.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법이 만들어지게 바닥에 배를 바짝 깔아야 해요.”

“그러고 보면 사업하시는 분들 참 고생 많으시네요. 이거 따지고 저거 따지고.”

“고생 안 하면서 돈 버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어요. 저는 카메라 앞에서 울고 웃는 분들이 대단하던데요.”

“헤헤, 밥 먹고 그것만 연습했는데요, 뭐.”

“밥 먹고 그것만 연습하는 거부터가 어려운 거죠. 너무 쓸데없는 얘기를 오래 했네요. 어서 식사해요.”

“왜요, 한 번도 생각 안 해본 걸 들으니까 흥미진진한데요.”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하나도 안 흥미진진하신 거 같은데요? 연기력으로 손꼽히는 배우가 왜 내 앞에서는 연기를 안 하시는지 몰라.”

“흥미진진하다니까 사람 말을 왜 못 믿어요? 암튼 배배꼬였다니까.”

“그래요, 다 내 잘못이에요.”

“네, 알면 됐어요.”

대찬과 윤이영은 시시덕거리면서 고기를 썰었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식사를 하던 윤이영이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대찬 씨 변했네요?”

“변하다뇨.”

“아니, 제가 그렇게 밥 좀 먹자고 매달릴 때는 한사코 거부하시더니, 이제는 잘만 만나주시잖아요.”

“아.”

대찬은 잠깐 말을 멈췄다.

윤이영의 볼에 살짝 바람이 들어갔다.

“아는 뭐가 아예요?”

“이영 씨가 좋아졌나보죠. 자질구레한 거 안 따지고 계속 만나고 싶을 만큼.”

“…예?”

“제대로 들으신 거 같은데 다시 말씀드려야 돼요? 부끄러운데.”

윤이영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 하나도 안 부끄러우신 거 같은데요?”

“그래요? 그럼 내가 이영 씨보다 연기를 잘하나봐.”

“그 말씀을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돼요?”

“제가 이영 씨보다 연기 잘한다는 말이요? 그건 그냥 농담으로 받아들이면 되는데요.”

윤이영은 눈빛을 찌릿 쏘면서 말했다.

“아니, 그 말 말고요! 그, 그…….”

“이영 씨가 좋아졌다는 말이요?”

“네, 그 말…….”

대찬은 웃었다.

“그 말이 부연설명이 필요할 만큼 어려운 말이었어요?”

“사람이 사람한테 하는 좋아한다는 말은 종류가 여러 가지잖아요.”

“그렇죠. 근데요, 보통 이맘때의 남자가 이맘때의 여자한테 하는 좋아한다는 말은, 종류가 하나예요.”

“…….”

“왜 아무 말도 없어요?”

윤이영의 양쪽 귀가 스위치로 전구를 켠 것처럼 빨간 색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이렇게 태연하게 할 수가 있어요?”

“죄송해요. 제가 좀 삭막한 스타일이라.”

“나만 두근거리고……. 저 혼자만 바보된 것 같잖아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말했잖아요. 나도 지금 연기 중이라니까. 가슴은 엄청 뛰고 있거든요.”

“그럼 이제 우리 연애하는 건가요?”

“이영 씨가 좋으면요.”

“저야 당연히 좋……!”

윤이영은 부리나케 대답하다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너무 체통이 없었다.

윤이영은 다시 얌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야 당연히 좋죠…….”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좋아서 좋다고 한 건데 뭐가 고마워요.”

“하지만 대학 신입생 캠퍼스커플처럼 여기저기 광고하고 티내면서 연애는 못해요. 이유는 아시죠?”

윤이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저 때문에.”

“이런 예쁜 여배우랑 연애하려면 이 정도 불편이야 얼마든지 감수하죠.”

“진짜 빨리 떠서 돈 안 아쉬울 만큼 모아서 은퇴할 거예요. 편하게 연애 좀 하게.”

대찬은 흐뭇하게 웃었다.

“진짜 뜨면 어차피 누구랑 연애해도 인기가 떨어지진 않을 걸요? 연애 때문에 일을 포기하면 안 되죠.”

“일보다 사랑을 택하는 인생도 멋있다고 생각해요.”

대찬은 그 순간 김산하를 잠깐 떠올렸다.

사랑보다 일에게 주어진 파격적인 기회를 따라간 그녀를 나무랄 순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윤이영의 말이 고맙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멋있죠, 그것도.”

“근데 언제까지 저한테 존댓말 쓰실 거예요?”

“이영 씨는 언제까지 그럴 건데요?”

“저는 지금부터 말 편하게 하고 싶은데.”

“내가 먼저 놔야지.”

“갑자기 반말하려니까 부끄럽다.”

대찬과 윤이영은 고등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풋풋하게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밤길을 걸으면서 윤이영이 말했다.

“오빠.”

그렇게 말해놓고 윤이영은 자기가 부끄러워 발가락 끝을 살짝 오므렸다.

“응.”

“근데 고백을 하려면 좀 무드라도 잡고 하지, 그렇게 툭 던지듯이 하는 게 어디 있어?”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이 나이쯤 되면 그런 게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니까. 왜, 팡파레라도 울려줬어야 해?”

이 나이쯤이라고 하는 건 대찬의 생물학적 나이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거의 오십이 다 되어가는, 첫 번째 삶과 지금의 나이를 합산한 값이었다.

물론 윤이영이 그걸 짐작할 리는 없지만.

대찬의 말에 윤이영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한 번뿐인 건데.”

“윤이영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안 먹은 척 하기는.”

“그래도 난 아직 20대야!”

“어, 진짜? 프로필 나이가 진짜 나이였어?”

대찬이 진심으로 놀라는 표정을 짓자, 윤이영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여태 내 나이도 몰랐다고?”

“아니, 다들 두세 살씩 나이 깎으니까 너도 그런 줄 알았지?”

“참 나, 요즘 그렇게 하는 배우가 드물거든요. 그럼 지금까지 날 30대로 알았다는 거야? 내가 그렇게 늙어 보여?”

“늙어 보이냐니. 듣는 30대 서럽게.”

“늙은 거 맞지, 뭐.”

“어른들이 들으면 코웃음 쳐요. 나도 아직 애야.”

“이렇게 큰 애가 어디 있다고.”

대찬과 윤이영은 옥신각신하며 조용한 밤거리를 걸었다.

윤이영은 슬쩍 대찬의 옆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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