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67화
캠핑카의 겉에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Make the butcher unemployed.’
“도살자를 실업시켜라.”
대찬은 스티커에 쓰인 문장을 한국어로 읽고는 은오영 교수에게 물었다.
“이게 회사 이름이었어요?”
“네, 어때요?”
“구려요.”
“…….”
회사 이름은 모름지기 간단해야 한다.
필름 카메라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기업이었던 ‘코닥’의 이름이 그랬다.
입에 착착 감기는 이름이어야만 사람들의 뇌리에 잘 각인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찬의 로튼 프룻츠도 썩 잘된 명명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저, ‘메이크 더 붓처 언임플로이드’보다는 나았다.
게다가 그렇게 긴 이름을 택한 보람도 없었다.
도살자를 실업시키라는 뜻은 동물들을 해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 정했을 터다.
하지만 누군가의 직업을 빼앗으라는 것부터가 거부감을 일으킬 만했다.
‘이 미국 너드들이 작명센스는 완전 꽝이었군.’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은오영 교수에게 말했다.
“근데 다르샨이 여기 계시다고요?”
“네, 여기가 다르샨의 집이거든요. 집값이 살인적이라 이런 반백수는 집 렌탈비 감당 못해요.”
은오영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 탕탕탕,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인도 억양이 뚜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다르샨 싱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찬과 은오영 교수를 맞이했다.
그는 육중한 체구를 자랑하고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르고 있었다.
손에는 살사소스가 질질 흘러나오는 타코가 들려 있었다.
그는 손에 묻은 소스를 자기 옷에 슥슥 닦고는 악수를 청했다.
가뜩이나 인도 억양이 짙은데다가 타코를 우물거리느라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다.
나이스 투 미츄가 아니었으면 고개를 한번 갸웃했을 것이다.
“만나서 반가워요. 다르샨 싱입니다. 다르샨이라고 하세요.”
“조대찬입니다. 편하게 초라고 부르시죠.”
다르샨은 눈짓으로 자리를 권하고 자기도 앉았다.
“영한테 얘기는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배양육 사업을 하시겠다고?”
“네, 다르샨이 괜찮다면 한국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아직 이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충분한 투자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뜻을 펼친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르샨은 남은 타코를 마저 먹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괜히 실리콘밸리에 목을 매는 게 아니에요. 여기서도 안 되는 사업을 한국에서 한다고 되겠어요? 안 될 거 같은데.”
“물론 실리콘밸리와 한국 중에 어디에 사무실을 내겠냐고 하면 전자를 택하는 게 맞겠죠. 하지만 그건 다른 조건이 같을 때 얘기죠.”
“…….”
다르샨은 대찬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콜라를 마셨다.
“한국에서는 원활한 자금을 공급받아 연구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다르샨 혼자서 고군분투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벤처캐피탈로부터 투자를 받으려 하고 있어요. 그들만큼의 액수를 약속할 수 있어요?”
대찬은 미간을 좁혔다.
“투자를 받으려 하는 것과 이미 받은 것은 차이가 크잖습니까? 홀로 이 캠핑카 사무실을 차려놓은 이래로 투자금을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
“한국으로 오시면 당장은 큰 투자금이 들어오진 않겠지만, 분명한 성과를 보이면 재계 5위의 대기업이 다르샨의 연구를 지원할 겁니다.”
“아, 아무리 그래봤자……!”
다르샨이 고집을 피우려고 하자 대찬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탈로부터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모, 못할 건 뭡니까!”
“살사소스 묻은 손으로 악수를 건네는 비즈니스 매너를 유지하는 한.”
“…….”
“설마 캠핑카에서 조직을 배양하는 건 아니실 테고, 연구를 진행할 사무실을 보유하지 못한 한.”
“…….”
“경쟁자는 저만치 앞서갈 거고 다르샨의 기회는 소멸될 겁니다.”
“어, 어떻게 그런……!”
“코를 찌르는 악취를 맡아보니 일주일 넘게 안 씻으신 거 같은데요. 언제나 투자자를 만날 준비가 돼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씻으려고 했어요!”
대찬은 다르샨의 거짓이 명백한 해명은 접수하지 않았다.
“이런 무방비상태로 투자를 기대한다고요?”
“초면에 너무 무례한 말씀 아닙니까?”
“사실이 아니라면 반박해보십시오.”
“…….”
다르샨의 입을 다물게 한 대찬은 자신의 조건을 내걸었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메이크 더 붓처 언임플로이드의 인력과 특허를 인수하고자 합니다.”
“…얼마에 인수할 생각입니까.”
대찬은 말없이 검지 하나를 펴 보였다.
다르샨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백만 달러요? 그 정도라면 나도 기꺼이…….”
대찬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다르샨의 표정도 구겨졌다.
“십만 달러요? 그건 너무하지 않아요?”
“아뇨, 십만도 아닙니다.”
“그럼 만 달러? 장난합니까?”
“만 달러도 아닙니다.”
다르샨의 참을성이 바닥났다.
“그럼 도대체 얼마에 인수하겠다는 말입니까!”
“1달러요.”
“…….”
다르샨의 표정은 황당함 그 이상이었다.
“메이크 더 붓… 휴, 그냥 귀사의 모든 인력과 특허를 1달러에 인수하겠습니다. 이 캠핑카는 중고로 파시고요.”
“…한국에서 여기까지 날 놀리러 왔습니까?”
“그럴 리가요.”
대찬은 지갑에서 꼬깃꼬깃한 1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그의 앞에 내밀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르샨은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찬이 내민 1달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웃는 듯 마는 듯한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가 자기를 비웃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멍한 시선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그게 당신이 준비한 조건의 전부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더 들어봅시다.”
“다르샨을 우리 로튼 프룻츠의 CTO(최고기술책임자)로 모시겠습니다. 다르샨은 은오영 교수의 연구팀과 함께 배양육을 연구하게 될 겁니다.”
“으음…….”
대찬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손 아파요. 어떡할 겁니까. 1달러, 받으시겠습니까, 마시겠습니까.”
“안 되겠소. 1달러는 너무 터무니없는 가격이오.”
그 말에 은오영 교수가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떨었다.
“다르샨!”
다르샨은 은오영 교수 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100달러. 그걸로 오랜만에 고기라도 사 먹어야 거래에 만족할 수 있겠소.”
대찬은 웃으면서 1달러를 거둬들이고 벤저민 프랭클린이 그려진 100달러 지폐를 꺼냈다.
“머리 벗겨진 쪽이 취향이셨군요.”
“아무렴.”
다르샨은 잽싸게 100달러짜리 지폐를 낚아챘다.
다르샨은 그렇게 기존 조건에서 100배나 튀겨진 가격에 ‘메이크 더 붓처 언임플로이드’를 넘기고, 자신은 로튼 프룻츠의 CTO로 취임했다.
그는 굵은 털이 숭숭 난 손을 대찬에게 내밀었다.
대찬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다르샨은 흐흐 웃으며 말했다.
“잘해봅시다.”
“네, 잘해보시죠.”
대찬도 그를 마주보며 웃었다.
다르샨은 쇠고기를 덩어리째 사서, 캠핑카 앞에서 바비큐를 만들었다.
정성껏 시즈닝 한 쇠고기를 꼬박 12시간 동안 훈연했다.
고기가 익을 동안, 대찬은 은오영 교수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일대를 짧게 관광했다.
한밤중이 되어 다르샨의 캠핑카로 돌아오니, 고기의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다르샨은 그 앞에 간이의자를 펼치고 맥주가 잔뜩 들어있는 아이스박스를 공수해왔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100달러는 훨씬 넘을 거 같은데요.”
“마지막 잔고까지 싹싹 털었어요. 대신 한국행 티켓은 초가 내주셔야겠는데요.”
“물론입니다.”
아이스박스에서 병째로 맥주를 꺼내 셋은 건배했다.
고개를 젖히고 꿀꺽꿀꺽 맥주를 넘겼다.
맥주는 식도를 타고 시원하게 내려갔다.
다르샨은 잘 벼린 칼로 고깃덩이를 잘라 대찬과 은오영 교수에게 주었다.
대찬은 고기를 받으면서 다르샨에게 말했다.
“힌두교도들은 쇠고기를 안 먹잖아요?”
“인도사람이라고 모두 힌두교를 믿는 거란 생각부터가 편협한 겁니다.”
“그건 그렇네요.”
대찬은 편하게 웃으며 고기를 씹었다.
은오영 교수도 제 몫의 고기를 씹으며 말했다.
“다르샨이 배양육 사업에 뛰어든 게 힌두교와 연관이 없지는 않죠.”
다르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신실한 힌두교 신자예요. 이 맛있는 쇠고기를 못 먹게 하니까 아주 돌아버릴 지경이었지.”
“그래서 소를 잡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배양육 사업에 뛰어드셨다?”
“맞아요. 그래도 아버지는 완강하셨다는 게 문제지만.”
대찬은 하하 웃었다.
셋은 새벽별이 숨을 때까지 맥주와 쇠고기를 즐겼다.
그러다 눈꺼풀이 감당 못할 정도로 무거워지고 나서야 악취가 진동하는 캠핑카 안에서 널브러져 잠이 들었다.
대찬과 은오영 교수는 먼저 한국으로 돌아오고, 다르샨 싱은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이어 한국으로 들어왔다.
대찬은 로튼 프룻츠 직원들에게 다르샨 싱을 소개했다.
그러자 직원들은 박수로 그를 맞이했다.
다르샨 싱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습니다.”
다르샨 싱은 로튼 프룻츠의 CTO로 정식 취임했다.
한국어 직함은 기술본부장, 직급은 전무가 되었다.
진위생 주임은 웃으면서 말했다.
“싱 본부장에 저까지, 우리 로튼 프룻츠가 완전히 다국적기업이 됐슴다.”
“다국적기업은 해외 여러 곳에 법인을 둔 회사를 말한 거예요.”
“…아, 그렇슴까.”
맹윤주 과장이 그렇게 정정해주자 진위생 주임은 머쓱하게 웃었다.
다르샨 싱은 서울의 로튼 프룻츠 사무실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바로 은오영 교수와 중림대학교로 내려갔다.
대찬도 중림대학교와 산학협력 MOU를 체결하기 위해 중림대학교를 방문했다.
중림대학교에서는 총장이 친히 대찬을 맞이했다.
얼마 만에 대학다운 구실을 하는 건지 기억에도 없었다.
“반갑습니다, 조 대표님.”
“좋은 일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총장님.”
대찬은 웃으면서 총장과 인사를 나눴다.
총장은 은오영 교수의 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 대학의 자랑인 은 교수를 이렇게 알아보고 산학협력을 제안해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하하, 은 교수님 얼마 전까지 전국 고등학교 돌아다니면서 입시설명회에 투입된 걸로 아는데, 학교의 자랑이었군요.”
그 말에 총장은 당혹했다.
“아, 그, 그게… 인력이 여의치 않아서…….”
“농담입니다. 조금 짓궂었나요.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하하, 벼, 별 말씀을…….”
“들으셨겠지만 저희 로튼 프룻츠는 작은 회사입니다. 하지만 연구 결과가 확실하다면 필래 비바체도 동참할 겁니다.”
“조 대표님이 필래 비바체의 대표님과 막역한 사이라고 바람결에 들었습니다.”
“네, 그렇긴 하지만 제 얼굴이 아니라 확실한 연구성과를 보고 투자를 결정할 겁니다.”
“아, 물론, 물론이지요.”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사진은 찍고 가야겠죠?”
“물론입니다.”
총장은 이미 큼지막한 현수막까지 걸어놓은 참이었다.
그 현수막을 배경으로 전형적인 치적홍보용 사진이 촬영될 것이었다.
대찬이 한쪽에 서고, 총장이 그와 악수하기 위해 주춤주춤 다가왔다.
대찬은 총장을 보고 말했다.
“아, 근데 이건 엄밀히 말하자면 저희 회사와 은오영 교수님 연구팀 사이의 산학협력입니다.”
“예? 예, 그렇죠.”
“그럼 은오영 교수님과 악수하는 사진을 찍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아…….”
대찬은 총장에게 시선을 거두고 은오영 교수에게 말했다.
“이리 오세요. 저랑 한 장 찍어요.”
“네? 아, 제, 제가요?”
“네, 교수님.”
은오영 교수는 총장에게 시선을 한번 보냈다.
총장은 속이 배배꼬이면서도 은오영 교수에게 얼른 가라고 턱짓을 했다.
대찬은 은오영 교수와 손을 맞잡고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가 팟, 터지는 순간 은오영 교수가 말했다.
“고마워요, 조 대표님.”
“뭘요. 은 교수님이 제 파트넌데.”
대찬이 총장을 우대해줄 이유는 없었다.
중림대는 유수의 대학도 아니었다.
대학 본부차원의 지원은 기대도 안 했다.
은오영 교수 한 사람만 보고 중림대와 MOU를 체결하는 마당이었다.
굳이 총장의 기분을 챙겨줄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