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후우.’
찬영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앞에 놓인 장비, 포션 등의 아이템을 내려다봤다.
총 5개씩, 가치 합산이 최대한 일정하게끔 합성을 돌린 결과.
가치 3,200에서 4,200 사이의 품질 좋은 아이템들이 나왔다. 주로 사용하는 아쿤다의 표창의 가치가 4천 4백인 것을 감안했을 때, 이 정도 품질의 아이템은 현재 제작할 수 있는 상등품에 속한다.
이 중 장비 아이템은 다섯 가지, 일회성 아이템이 두 가지, 보석이 두 가지가 나왔다.
보석은 조금 의외였다. 아이템 분해를 통해 꽤 많은 정수를 획득해야 제작할 수 있는 보석이 합성으로 나오다니. 그럼 합성 제작으로도 보석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건데…….
‘앞으로도 보석 제작을 위해선 합성을 돌려 봐야 하나?’
조금 고민해 봤지만 찬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보석이 합성으로 나오길 기다리는 건 극히 희박한 확률을 기다리는 거다. 아이템 분해를 통해 보석 제작이 가능한 확실한 방법을 두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보석 제작은 보석 제작대로, 합성은 합성이 필요한 대로 이용하면 된다. 어차피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아무튼 이번 합성으로 인해 얻게 된 보석의 등급은 무려 9급 두 개였다.
무려, 민첩성 4%를 증가시키는 9급 보석 한 개와 아이템 획득 확률 2% 상승이 있는 9급 보석이었다.
놀라운 일이다.
단순히 개인적 능력을 상승시키는 데 국한된 게 아니라 아이템 획득 확률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물론 내게만 국한된 부차적 상승이겠지만.’
물건에 제 주인이 있다는 말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외의 민첩성 보석의 경우는 조금 고민이 됐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제이나의 툴챠는 아직 여분 홈이 남았다.
그녀에게 내주는 게 나을까?
‘아니, 툴챠에 남은 홈에는 마나 증가나 마법 확산률을 높이는 보석을 장착시켜주는 게 더 나아.’
그동안 그녀와 괜히 호흡을 맞춰본 게 아니다. 뭘 줘야 그녀가 더 강해지고 효율성 있게 전투에 임할 수 있을지 어느 정도 머리에 그려지는 게 있다.
그럼, 이 민첩성은…….
‘내 장비에 장착시키는 게 나아.’
당장 민첩성 보석을 달았을 때 고효율을 보일 수 있는 건 자신이다. 특히 싸움이 눈앞에 놓인 지금, 효율성을 기반으로 매사를 선택해야 한다. 찬영은 지체하지 않고 두 보석을 스툼에 1개, 헬레에 1개를 장착시켰다.
그 직후 쉴 틈 없이 일회성 아이템들을 살폈다. 먼저 복용한 건 당장 사용할 수 있는 2개의 일회성 아이템.
민첩성을 62나 영구 상승시켜주는 타란의 중급 원초적 감각 자극제와 근력 70을 영구 상승시켜주는 알페힘의 중급 근린 강화제, 이 두 가지였다.
꿀꺽…….
이를 마시자마자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근력가치 : 339 [F]
민첩성 가치 : 394 [F]
곧바로 나타난 상세 데이터.
하지만 변화가 느껴지는 건 데이터의 숫자뿐이 아니다.
실제로도 방금 전보다 몸이 가볍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았다.
하지만 아직 수치는 ‘F.’
‘E’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많이 늘긴 했으나 시스템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솔직히, 그 말에 크게 동의한다.
요즘 들어 그동안 훈련해 온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협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받았다. 특히 뉴 빌드의 등장 이후부터 더욱 그랬다.
갑작스런 마나 증발, 그리고 시작된 위협.
당시 르리에를 향한 통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솔직한 말로 반항 한 번 못해 보고 그들에 의해 죽었을 테고 혹은 녀석들에게 조종당하는 몬스터들처럼 암흑 마력에 의해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마나 증발은 예상도 못했으니까.’
이것만 봐도 그렇다. 위협은 앞으로 더 다양해진다.
변수를 줄이려면 여러 방면의 성장을 꾀해야만 한다.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 * *
-2 : 30 : 32
찬영은 시간을 올려다봤다.
이제 남은 시간은 두 시간가량.
방금 전 제작한 장비는 인벤토리에 넣어 뒀다.
‘인챈트까지 추가하고 싶지만.’
당장은 여의치 않다.
인챈트를 하려면 제이나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잔뜩 지친 제이나가 다시 마나를 써야 한다.
‘그보다는…….’
그녀의 컨디션이 완벽히 회복되는 편이 낫다.
아티펙트 장비보다 그녀의 마법 한, 두 방이 더 적에게 큰 타격을 낼 테니까.
그래서 다음 행보로 택한 건 현재 가진 기술들 중 연계기가 가능할 것 같은 기술들의 훈련이다. 찬영은 먼저 지니고 있는 기술들의 상태창부터 열람했다. 눈에 띈 건 붉은 바람.
붉은 바람
-가치 : 630
-숙련도 : 27%
‘많이 늘었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 오른 수치. 특히 숙련도에 발 맞춰 향상된 가치만 봐도 앞으로 붉은 바람의 발전 가치는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발전 가능성과는 달리 당장 연계기로서 사용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그도 그럴 게…….
‘진공나찰보의 연계기 개방은 숙련도 50%에 이른 후 이뤄졌어.’
숙련도 50% 달성이 연계기를 개방시킬 수 있는 필요조건일 수도 있단 거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걸 걸어야 할 전투가 2시간 30분이 남은 지금, 숙련도 27% 의 붉은 바람에 훈련 시간을 투자하는 건 효율적 선택이 아니다.
그럼?
‘이게 낫겠어.’
찬영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심득이 찢어진 섬뢰보(閃雷步)
-가치: 1,110
-숙련도: 49%
-습득 시 영구적으로 시속 38km 상승합니다.
-심득이 찢어져 가치 평가 절하 되었습니다. 찢어진 내용을 획득하면 복구가 가능합니다.
아직 완벽하지 않은 섬뢰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뢰보의 가치는 굉장히 높다. 그게 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전투와 경험을 통해 쌓아 온…….
‘49%의 숙련도 덕분이지.’
50%까지 남은 건 1%.
이제껏 많이 사용한 보람이 있다.
찬영은 만족스러워하며 본격적으로 섬뢰보를 훈련하기로 했다. 물론 남은 1%가 시간 안에 상승할지 상승하지 않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붉은 바람보단 섬뢰보 쪽이 연계기 개방이 나올 확률이 높다.
타닷!
고민은 끝났고 남은 건 할 수 있는 사력을 쏟아 붓는 것뿐.
* * *
-00 : 19 : 40
“손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군…….”
글로리가 아무데나 주저앉으며 말했다. 비단 글로리뿐이 아니다. 경계 포탑 설치 제작에 뛰어든 프롤 모두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때 휴식을 마치고 돌아온 제이나가 하늘을 치솟을 듯이 쭉쭉 뻗어 있는 포탑들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이건 정말…… 놀랍네요.”
그녀의 감탄에 모든 프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다행이군.”
글로리도 담담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입가의 미소는 숨기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사력을 다했고 결과는 최상이다. 초급 경계 포탑은 무려 8개가 세워졌다.
높이는 물경 9m. 네 개의 포구에는 검은빛의 포신들이 삐죽 솟아 있고 그 주위에는 갈색빛 나는 목재들이 탑을 전부 둘러싸고 있다.
하지만 이건 평범한 나무가 아니다.
글로리가 말했다.
“희귀한 스토아 나무를 가공해 두른 목재요. 저기 저 친구가 숲지기라 가능했지.”
슬쩍 손을 들어 보이는 한 명의 프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할 뿐.
내부는 그보다 더 견고하고 완벽히 설계됐다. 견고한 암석들을 결합하고, 그 안과 겉에 튼튼한 르리에의 목재들을 이어붙인 거다. 하지만 그중 그녀가 가장 놀란 건 방어 체계를 세우기 위한 그들의 건축 기술이었다. 포탑 내부로 들어간 제이나가 물었다.
“기반도 스토아 목재를 가공한 건가요?”
탑의 상단과 하단의 목재 색이 달랐기에 던진 질문.
글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리하구려. 맞소, 하단과 기반을 다질 때 쓰인 목재와 암석은 상단과 다른 재료로 사용됐지.”
그리고 시작된 설명. 요약하자면 이랬다.
하단은 탑의 뿌리와 같다. 그래서 웬만한 충격에 쓰러지지 않게 진동이나, 충격을 머금으면 그 힘을 분산시키는 특질의 아딘 암석과 우로크 나무를 썼다고 한다. 거기다 한 번에 주입되는 마나 양, 크기의 효율성 등 알폰 지방에서 쓰는 마나 탱크와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탱크가 포신과 연결되어 있다.
‘견고해.’
특히 만지고 있는 이 포신의 견고함은 말할 것도 없이 뛰어나다.
마나 탱크의 마나만 넘친다면 마나탄이 날아가며 생기는 강한 반탄력에 충분히 견디도록 설계된 거다. 그야말로 포탑 곳곳에 프롤들이 그동안 쌓아 온 경험과 지식 그리고 생산해 온 재료들이 모두 녹아든 셈이었다.
‘이들을 영지에 데려갈 수만 있다면…….’
그들이 이루어 낸 결과물을 보면 볼수록 탐이 났다. 그들의 능력은 정말 뛰어나다.
‘포탑을 사방에 두 개씩 세우는 걸 하루 만에 끝내버린 것만 봐도 그렇지.’
타우린와 도타가 도왔다고는 하지만 결과물의 진짜 주인공은 여기 모인 프롤들이다.
* * *
“구경은 잘 하셨습니까?”
제이나가 포탑에서 내려오자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찬영이 그녀를 맞이했다.
“보셨나요?”
“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찬영도 제이나만큼 놀라기는 마찬가지.
상상 못할 만큼 놀라운 결과물이다.
‘난전에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그 생각은 제이나 역시 동의한 모양이었다.
“이분들을 영지로 모시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가능하다면요. 하지만…….”
찬영의 대답에 그녀가 아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르리에를 지날 수 있는 건 갓피스와 그 소유물뿐. 그들은 알폰으로 갈 수 없다.
“아쉽네요…….”
“그러고도 남을 분들이죠.”
그녀의 말에 찬영도 크게 동의했다.
트레이드족의 뛰어남은 이미 이번 일로 인해 충분히 인정하고도 남을 지경이니까.
하지만 계속 감탄만 하고 있을 새가 없다. 남은 시간은 10분 정도. 이젠 합성으로 제작해 둔 장비를 글로리에게 전해 줄 때가 왔다.
찬영은 제이나와 대화를 마친 직후 글로리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의 분위기는 조금 의외였다.
뭐랄까…… 처음 봤을 때 그의 모습이 어딘가 쫓기는 듯한 인상이었다면, 지금 그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인다.
긴장감도, 비장감도 없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이의 표정이다.
그리고 그의 첫마디를 듣자마자 그 생각이 맞다는 걸 알았다.
“조금의 후회도 없을 것 같군. 살면서 처음으로…….”
찬영은 잠시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뵐 때와 달리 편안해 보이시는군요.”
“그렇소?”
“네, 정말로.”
“듣기 좋군. 편안해 보인다는 말…….”
씁쓸하게 웃은 그를 보면서 찬영은 타이머를 올려다봤다.
“얼마나 남았소?”
마침 시간을 묻는 글로리.
“8분 정도 남았습니다.”
그사이 시간이 더 흘렀다.
“이제 다들 포탑 안으로 진입해야 할 것 같군. 안 그렇소?”
“예.”
비전투 인원은 안전한 포탑 안에 들어 가 전투에 임하는 게 가장 나은 선택이다.
이미 그러기로 했고. 하지만 전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무기 하나 드는 게 낫다.
“모든 분께 드릴 만큼 제작하진 못했지만 다섯 분 정도는 무장할 수 있을 겁니다.”
찬영이 내놓은 건 다섯 가지 종류의 장비 아이템.
3,500의 루비안의 채찍.
3,620의 가솔의 방패.
4,200의 데드 포인트라는 2개가 한 쌍인 손도끼.
4,120의 문 나이프라 불리는 시미터.
4,300의 CB–15 라는 삼각대를 놓고 쏘는 작은 소형 마나 탱크가 달린 마나 박격포였다.
오랜만에 보는 현대식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장비였다.
글로리는 그중 유독 CB–15를 눈여겨보았다.
그러더니 찬영을 보며 말했다.
“이젠 인정할 때가 된 것 같소.”
“예?”
찬영이 무슨 말인가 싶어 묻자, 글로리는 촉촉이 젖은 눈을 들면서 대답했다.
“당신이 우릴 지키러 온다는 옛 이야기를…….”
“아뇨, 그 얘기는 틀렸습니다.”
“어째서?”
“이미 이 장비 중 하나에 손을 대려 하실 때부터 결정하신 거 아닙니까? 스스로…….”
찬영이 그가 집어든 박격포를 보며 말했다.
“싸우겠다고.”
그 말이 끝나자 글로리가 쥐고 있던 CB-15가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격포를 쥐고 있던 글로리의 온몸에서도 장비와 같은 빛이 새어나왔다.
글로리가 가장 놀랐다.
“여기서, 왜 빛이 나오?”
“글쎄요? 저 역시도 모르겠습니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건 찬영도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나타나는 창들.
-갓피스 조건 달성으로 ‘자유’가 개방되었습니다.
-‘자유’의 개방으로 인해 비공개 갓피스 앨범이 개방되었습니다.
-갓피스 앨범에 ‘자유–글로리’가 합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