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8.
바다와 맞닿은 모래사장 안엔 약 백오십여 명의 사람이 웅성댔다. 그들 사이로 한눈에 보기에도 두터워 보이는 붉은 갑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보상이든 뭐든 스스로의 방식으로 일궈 낸 장비인 것 같았다. 그는 찰랑이는 긴 머리를 질끈 묶으며, 차분히 사람들을 다독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V.O.라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이규복입니다.”
사람들이 웅성댔다.
“V.O.가 뭐야?”
“회사인가? 그게, 뭔데?”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들이었다.
이규복은 그들의 질문에 친절히, 대답할 회사의 의무가 있었다.
“풀어서 Value Organization입니다. 인류 생존을 위해 세워진 기구라고 보시면 됩니다. 음. 쉽게 말씀드리면…….”
이규복이 싱긋, 웃었다.
“펌입니다.”
찬영도 그 얘기를 뒤편에서 듣고만 있었다.
사람들은 다들, 의아해하거나 혼란스러운 표정들이었다. 생존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모르는 판국에 회사라니……. 찬영도 그들의 어이없단 표정에 일부분 공감했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마침 이규복이 얘기를 추가했다.
“자,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현재 각 나라마다 휴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실정입니다. 각 정부도 그에 따른 예산, 조치 등을 어떻게 취해야 할지 모르죠.”
한 사람이 물었다.
“그게 당신네랑 뭔 상관인데?”
“저희는 곧 서먼 홀의 대항마로써 정부와 첫 계약을 따낼 민간 업체로 급부상할 테니까요.”
정부, 민간업체, 계약 등의 얘기에 사람들의 얼굴이 한결 호기심 가득해졌다. 이규복은 영리하게 그 점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준비가 되셨으면, 여기 한 번 봐 주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미리 준비한 건지, 작은 볼펜을 꺼냈다.
신기하게도 허공에 볼펜 레이저가 비추자, 빔 프로젝터를 사용했을 때와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어진 기업 설명회.
곧 휴거가 몰려올 시간이 다가온다는 걸 그도 인지했기에 설명은 짧고 일목요연했다.
결국 요지는 이랬다.
그들은 민간 업체다.
계약서에 서명하면 그 날 이후, 현실에서 실시되는 교육과 함께 회사 직원이 된다.
나머진 회사 내규 방침에 따라 이루어진다.
회사 소속이 된 후부터는 회사 사원끼리 정보 공유를 통해 긴밀히 협조한다.
모두 듣고 난 뒤, 그들이 서먼 홀 통합 네트워크를 일궈 내려 한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서먼 홀 소환은 각 국가별로 나눠진다.
대한민국의 각성자들을 모두 회사 소속 직원으로 부린다면, 정부의 물적 지원을 받아 가며 스노 볼을 굴릴 수 있다.
그들이 목표하는 건, 대한민국 각성자들을 모조리 규합하는 것일 터였다.
‘어쩌면. 생존하기 위해선 현재 가장 좋은 선택지일지도…….’
그새 이규복은 부하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명함을 뿌리고 다녔다.
“회사에 직접 방문해 보세요. 상담 후 계약하시고 싶으신 분들은 제 명함을 따로 드리겠습니다. 연락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살아남으신다면.”
이규복과 회사 동료는 운 좋게 함께 소환된 건지 합심해서 사람들을 구슬렸다. 바로 계약하는 사람도 간혹 생기기 시작할 만큼, 이규복의 연설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반대 여파로 이규복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결국, 니들이 다단계랑 다른 게 뭐냐? 사람 목숨 가지고 돈을 벌겠다고? 지랄하네. 여러분, 어설픈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가지 마요!”
어쩌면 당연한 비판이었다. 한데 이규복의 반응은 담담했다. 부정 없이 이렇게 얘기했다.
“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불편함을 겪으신 분들보단, 생존 확률이 더 높아지신 분들이 많습니다. 합심하면…….”
이규복이 사람들을 돌아봤다.
“월급도 받고, 생존도 겸할 수 있습니다.”
생업과 생존을 동시에 겸한다. 이건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한 번 비판하는 데 꽂힌 사람들이 이규복의 말을 순순히 들어 줄 리 없었다. 비판하던 네다섯 명이 이규복의 앞을 가로 막기에 이르렀다.
그중 양 팔이 쇳덩이로 되어 있는 사람이 무리 사이로 걸어 나왔다.
오태홍이란 사람이었다.
“돈에 눈 먼 사기꾼 새끼야. 회사 홍보는 적당히 해라. 사람들 그만 현혹하고!”
팽팽한 긴장감.
그때 그 중간으로 사람 한 명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쯤 해 두죠.”
차분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에 대치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들이 보기에 찬영은 그저 철 장갑을 낀 깡마르고 키 큰 남자였다.
지나치면서 봤다면 ‘아, 키 크네.’ 정도로 생각하고 별 기억에 남지 않았을 인상.
하지만 이 순간 담담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는 반박 불가의 묘한 매력을 지녔다.
“먼저 여러분 대화에 끼어든 것부터 사과하겠습니다. 하지만.”
찬영이 싸구려 전자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휴거 들이닥치기까지 십오 분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럼 그사이에 여러분들끼리 치고 박으면 누가 제일 좋겠습니까?”
사람들은 대답이 없었다. 모두 대답을 아니까 당연했다.
굳이 설득할 필요 없이 그들의 목적의식이나 일깨워주면 그만인 것이다.
생존 본능이 누구나 우선이니까.
예상된 반응이기에 찬영이 계속 덧붙였다.
“서로들 협력하시죠. 그게 최선입니다.”
이규복이 잠깐 찬영을 주의 깊게 쳐다봤다. 쓰고 있는 안경테를 한 번 추켜올리면서 의중 모를 미소를 가볍게 지었다.
“좋습니다. 지금부터 능력 공유를 먼저 시작하죠.”
이규복이 한 걸음 양보하자, 더는 이견이 없었다.
그제야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기 능력을 밝히며 생존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 십오 분 만에 체결된 극적 화해였다.
* * *
휴거가 들이닥치기 오 분 전.
확실히 이규복은 남다른 인물이었다. 소환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지, 체계적으로 분류 대상을 나눴다. 치료, 공격, 수비, 반격 등의 분류 방식으로 거기에 맞게 사람들을 포진했다. 워낙 체계적이어서 다들 놀랐다.
누군가의 혼잣말이 들렸다.
‘요즘, 회사에선 그런 것도 가르쳐주나…….’
아무튼 1그룹, 2그룹, 3그룹이 나눠졌고 1그룹 사람들이 지치면 2그룹과 3그룹이 시간을 끌어 주는 식으로 가자고 했다.
달리 반박할 만한 거리도 없이 꼼꼼한 계획이라 다들 동의하는 듯 했다. 찬영은 그중 3그룹에 속했다.
고유 능력 없이, 달랑 장비만 있다고 하니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법도 한 게 어떤 사람은 손바닥에서 얼음 화살을 날리고, 불덩이를 쏘아 대는데 달랑 철권鐵拳과 쇠사슬 달린 갈고리가 전부라고 하니 그럴 수밖에.
그 덕에 사람들이 만류했다.
특히 오태홍이 그랬다.
“……그딴 걸 가지고, 뭘 하자는 거요. 그냥 빠져 계셔. 형들이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도발 섞인 언사.
하나 찬영은 굳이, 시비 거리를 만들지 않았다.
휴거를 상대하기 전에 미리 힘 빼 둘 생각은 없다. 이런 말다툼은 그저 작고 사소한 일일 뿐.
신경 쓰이는 건 오로지 하나.
‘휴거.’
그리고 그 휴거로 인한 변수들이다.
찬영은 순순히 3그룹으로 빠져 상황을 주시하기로 했다.
‘어쩌면, 차분히 상황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3그룹이 더 나을지도…….’
그렇게 3그룹으로 물러난 찬영은 이전 접속 보상으로 획득했던 ‘몰루스카의 비약’을 들이켰다.
복용 시 오 일 동안 유연함 100% 증가의 효과가 있는 비약이었다.
최상의 컨디션에 가진 바를 모두 쏟는 혼신까지.
매일 매일을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처럼 대비해야 했다.
“뭐, 좋은 거 드십니까?”
푸우……뱉을 뻔 했다. 갑자기 부른 탓에 사래 걸릴 뻔한 찬영이 가볍게 가슴을 두드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 네, 별것 아닙니다.”
나머지 잔여물을 꿀꺽 삼킨 찬영이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로……?”
이규복이 대답 대신 명함을 들이밀었다.
다시 빙긋.
아까도 봤지만 이 사람의 영업용 미소는 아주 능숙하다. 예상이지만 실제로 마케팅 부서일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저 시답잖은 생각일 뿐.
우선 정중히 그 명함을 받았다.
“음…… 실례지만 저는 명함이 따로 없네요.”
“아, 괜찮습니다. 그럼 성함이……?”
찬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영업직으로 회사 생활도 이 년을 해 보았지만 천성이 회사 생활에 잘 맞지 않기도 했고 서로의 신분을 모르는 판국에 이름을 주고받고 싶진 않았다.
그 뜻을 눈치 빠른 이규복이 모를 리 없다.
“신중한 분이시군요.”
“고맙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그럼 이곳에서 살아나가신다면 연락 한번 주시겠습니까? 번호는 명함에 있습니다. 회사 사이트 주소도요.”
그 말에 의아했다. 어차피 자신은 3그룹이다. 1그룹에 모인 사람들보다 주목할 게 없다.
그런데 왜?
“왜, 제게……?”
“갈등을 막아 주셨으니까요.”
찬영의 눈빛에 이채가 흘렀다. 이규복이 정적이 싫은지 말을 이었다.
“그 상황에 그렇게 나서실 분이 몇이나 되신다고 생각하세요? 더군다나 여긴 법의 제약도 없는 무법지인데.”
“…….”
“거기다 소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시죠?”
찬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챌 만 했다. 여러 상황에 담담한 태도였으니까.
“역시 제 생각이 맞군요. 분명 처음 뵙지만, 오늘만 뵐 분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 말은 곧 찬영이 오래 생존할 사람같이 보인다는 얘기였다.
찬영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결과가 알아서 증명할 것이다.
“……그럼 꼭 연락 주십시오.”
이규복은 물러나면서도 강조했다.
찬영은 그저 마주 보며 인사만 건넬 뿐 더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 새 이규복에게 합류한 부하 직원이 물었다.
“대리님.”
“왜요?”
“저 사람, 고유 능력도 시답잖은 각성자 아닙니까?”
“그래 보여요?”
“네.”
단호한 신입 사원에게 이규복이 덧붙였다.
“그럼 이따 확인하세요.”
이규복이 돌아섰다.
“진짜 보석은 원래 감정사만 알아보는 거거든요.”
시선 끝엔 찬영의 뒷모습이 있었다.
* * *
휴거는 저 멀리 바닷가 한가운데에서부터 출몰하기 시작했다.
“맙소사! 저건 또 뭐야……!”
“하…….”
3그룹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찬영의 위치는 3그룹.
하지만 수평선 너머 바다 정도야 1그룹, 2그룹의 어깨너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찬영은 녀석들의 이름과 등급부터 먼저 확인했다.
당장 놈들의 모습은 흐릿했지만 이름이 새겨진 글씨는 명확히 보였다.
-★★ 피다일
별 두 개 정도, 충분히 상대할 만하다.
다만 어떻게 싸우는 녀석인지는 직접 상대해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그 물 위로 뭔가가 솟았다가 내려갔다가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숫자가 늘어갔다.
하나, 둘, 셋, 넷…… 이내 못 셀 지경이 되었다.
누군가 외쳤다.
“물고기야!”
현실이었다면 피식 웃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서먼 홀은 다르다. 결코 평범한 물고기가 아니다. 숫자를 늘려 점차 몰려드는 물고기가 슬슬 모래사장으로 다가왔다.
어림잡아도 수백.
거기다 가까이 헤엄쳐 다가올수록 물고기의 크기는 생각보다 컸다. 평범한 사람 상체 정도의 크기.
1그룹 각성자들은 제법 경험 있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그들은 소란 없이 각자 자기 할 일에 몰두했다. 톱니바퀴 돌아가듯 움직여 줘야 피해가 최소화된다는 걸 그들도 안다.
두렵지만 선두에 버티고 선 원거리 각성자들이 하나둘씩 바다를 향해 포화를 쏟아냈다.
눈송이를 닮은 얼음 화살, 사물함만한 불덩이, 혹은 돌덩이들이 한데 모였다.
콰콰콰!
다가오던 물고기들의 전진이 멈추는 듯 했다.
물고기들은 산개했고, 이내 수면이 다시 잔잔해졌다.
얼핏 녀석들이 다 사라진 것 같았다.
“죽은 건가?”
‘그랬으면 좋겠다’란 마음이 담긴 혼잣말. 사실 여기 모인 각성자가 모두 같은 뜻일 터.
그러나 늘 그렇듯 간절한 바람은 기적을 가져오지 않았다.
콰콰!
한동안 잠잠하던 녀석들이 다시 솟구쳤다. 한데 그 지점이 실로 당혹스러웠다. 이번 휴거들은 영리하게 500m 정도를 수면 아래를 유영해 다가온 것이다.
“괜찮아! 바다에서밖에 못 움직여!”
오태홍이 고함 쳤다.
지형을 이용하려는 속셈. 그러나 휴거는 늘 변수로 가득하단 걸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스륵.
잠수해 나타난 첫 피다일이 물에 휩쓸려 질어진 모래를 밟았다. 오태홍의 얼굴이 겸연쩍어졌다.
놈들은 수륙 양용의 휴거인 것이다. 물고기의 형태를 닮았으나 악어보다 두 배는 크다.
파충류와 담수어의 조합.
짧은 네 발을 가진 휴거가 모래를 밟자마자 빠르게 달려들기 시작한다. 그 속도는 악어가 먹이를 보고 움직이는 순간 스피드보다 훨씬 빠르고 움직임도 간결하다.
목적지는 1그룹의 각성자들이었다. 원거리 능력을 발휘하던 각성자들이 대거 물러났다. 이제부터는 근접에 능한 각성자 차례.
그 속에 이규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