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시작 (1)
***
물론 도욱도 ‘히어로즈 2’에서 하차하지 않는 쪽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크리스 무어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받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다니엘은 무어 쪽 매니지먼트사에 도욱이 무어의 차별적인 발언으로 무척 화가 났으며, 도욱이 하차하게 돼 이유라도 밝혀지면 무어는 인종 차별주의자로도 내몰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인종 차별주의자까지 가지 않더라도 약물법 위반 사실이 알려질 수 있지 않냐는 이야기도 은근슬쩍 던졌다.
또 다니엘은 도욱이 ‘히어로즈’ 역할을 잃게 되더라도 모든 것을 솔직하게 밝힐 만한 인물이라는 점을 상세히 설명했다.
결국 도욱이 강경했기 때문에, 무어 쪽에서 손을 들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무어는 촬영이 있던 날, 도욱의 대기실로 찾아왔다.
무어의 얼굴에 분함이 가득했다.
붉어진 얼굴로 무어가 도욱에게 사과했다.
“뭘 사과하시는 겁니까?”
도욱은 무어의 입에서 다시는 ‘나이 어린 새끼라든가, 어린 계집애들’ 따위의 말을 하지 않겠다는 구체적인 사과를 들을 때까지 무어를 압박했다.
무어의 성격을 아는 무어의 매니저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도욱은 그 정도 사과는 받고 싶었다.
물론 무어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자존심이 상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날의 일은 되갚은 셈이었다.
어쨌든 술과 약에 취해 있던 무어와 그날 밤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성이 있는 상태의 무어에게 사과를 받은 것에 의미가 있었다.
무어가 사과를 하고 나간 후, 도욱에게 마련된 대기용 캠핑카의 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도욱의 매니저로서 촬영장 출입 허가를 받은 오백호 부장이었다.
“도욱아!”
함께 있던 다니엘이 놀란 눈을 했다. 캠핑카 안으로 들어서는 오백호 부장의 기세가 거셌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랫동안 오백호 부장과 함께한 도욱으로선 한 마리 곰과 같은 오백호 부장의 기세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 자식한테 사과는 잘 받았어?”
“네. 뭐, 일단은······.”
“그래. 자기야 어떻게 살든 말든. 어딜 남의 인생까지 망치려고 들어······.”
오백호 부장이 표정을 굳히고 혀를 차며 말했다. 도욱은 도욱 개인을 떠나 케이케이의 자존심이었다.
오백호 부장이나 멤버들은 크리스 무어가 자신에게 사과하지 않는다면 ‘히어로즈 2’에 출연하지 않겠다는 도욱의 말을 전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물론 도욱이라면 크리스 무어에게도 사과를 받아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때문에 적극적으로 다니엘을 통해 크리스 무어의 매니지먼트사에 압박을 가했다.
찌푸렸던 오백호 부장이 인상을 풀고는 말을 이었다.
“남은 촬영 기간이 2주 정도였던가?”
도욱에게 묻는 듯했지만, 확인하는 건 다니엘이었다. 확인을 마친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촬영일은 정확히 10일 후였다.
“끝나면 바로 멤버들이랑 같이 라스베이거스에 가야 할 것 같다. 바로.”
“한국이 아니라요?”
멤버들은 개인 스케줄을 모두 비운 채 각자 곡 작업과 함께 휴식을 가지며 도욱과 함께 미국에 체류 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도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점검할 예정이었다.
도욱의 솔로 앨범과 케이케이의 앨범 등 밀린 앨범들이 많았다. 가장 빠른 건 안형서의 솔로 앨범이었다.
도욱의 물음에 오백호 부장이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좋은 소식이 있을 때 나오는 미소였다.
‘무슨 일이지? 아니, 이 시기에 라스베이거스라면······.’
도욱은 눈을 깜박이며 상기된 어투로 물었다.
“설마 빌보드에서······.”
도욱의 말에 오백호 부장이 외쳤다.
“그래! 또 빌보드에 가게 됐어! 게다가······.”
작년에 이어 또 한 번 빌보드 시상식에 초청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은 내·외부적으로 심심찮게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케이케이의 이번 앨범 타이틀이었던 ‘Connection’은 ‘Continue’의 기운을 이어 받아 빌보드 차트 내에서 상당히 좋은 순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V TV와 함께한 미국 공연들로 탄력을 받아 이전 성적을 뛰어 넘어 상위권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기도 했다.
앨범이 발매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여전히 40위권 내에 진입해 있었다. 어마어마한 성적이었고, ‘Continue’ 때보다 좋은 성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Continue’ 때는 신인상 후보였다는 것이다. 이미 신인상을 받은 케이케이는 이제 기존의 이름만 들어도 입이 벌어지는 쟁쟁한, 세계적인 가수들과 경쟁해야만 했다.
때문에 ‘어떤 부문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였다.
“게다가 한 부문 후보에만 오른 게 아냐. 베스트 앨범 부분, 탑 댄스 아티스트 부문과 소셜 아티스트 부문······. 거기에 스페셜 퍼포먼스 제안까지 왔어.”
옆에서 듣고 있던 다니엘의 입이 함께 벌어졌다.
“세상에! 베스트 앨범에 탑 댄스 아티스트 부문은 완전히 메인 시상 부문이잖아요?”
“그렇죠.”
오백호 부장의 답했다.
세 부문 모두 그 후보자들은 작년 신인상 후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적인 가수들이었다.
케이케이는 그들과 완전히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었다.
“스페셜 퍼포먼스 때문에 바로 라스베이거스로 가야 될 것 같아.”
“그······. 그렇군요.”
도욱은 조금 멍하니 답했다.
확실히 빌보드 차트 진입은 성공의 끝이 아니었다. 그 시작일 뿐이었다. 정점은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었다.
오백호 부장이 도욱의 어깨를 짚었다.
“도욱아.”
“네.”
“수고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도욱과 함께해 온 오백호 부장의 묵직한 한마디였다. 오백호 부장이 도욱의 기분을 모두 가늠할 순 없겠지만, 본인 다음으로는 가장 많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임은 분명했다.
“아······. 아직 상을 받은 것도 아닌데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도욱도 오백호 부장의 ‘수고했다.’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여기까지도 이미 도욱은 너무 많은 수고를 해야만 했다.
“연기하는 것도 너무 재미있지만······. 지금은 어서······. 무대에도 오르고 싶네요.”
그러나 도욱은 앞으로도 더 많은 수고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처음의 순수했던 꿈을 잃지 말자는 다짐도 몇 번이고 했던 것이다.
도욱의 말에 오백호 부장이 웃었다.
“몸이 두 개, 아니 다섯 개였으면 좋겠어요, 정말.”
“욕심 많기는······!”
오백호 부장이 핀잔했다. 도욱은 깨끗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히어로즈 2’의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도욱과 케이케이 멤버들은 뉴욕을 떠나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
‘히어로즈 2’ 촬영을 하는 내내 물심양면, 최선을 다해준 다니엘과 도욱은 아쉬운 작별을 했다. 장뤽 감독이나 헐버트와도 도욱은 따로 라스베이거스로 떠나기 전 따로 인사를 나누었다.
장뤽 감독은 촬영을 거듭하며 도욱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이후에는 ‘히어로즈’ 시리즈가 아닌 자신의 영화에는 섭외할 수 없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했다.
헐버트는 자신의 파티에서 도욱과 무어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촬영장에서 늘 묘하게 둘 사이에 긴장 관계가 조성될 때면 도욱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덕분에 남은 촬영들은 무어와 큰 잡음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히어로즈 2’는 편집 작업을 거쳐 내년 봄, 개봉 예정이었다.
개봉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루 몸값만 해도 어마어마한 대배우들이 모두 모일 일은 없을 터였다. 프로모션 활동도 전 세계에 걸쳐 팀을 나눠 이루어질 것이었다.
헐버트는 도욱과 헤어지기 전, 자신이 꼭 한국에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촬영을 하며 단지 도욱에게서 대배우의 기운을 느낀 장뤽 감독과 달리 헐버트는 도욱에게 더욱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 탓이었다.
도욱도 헐버트와는 계속해서 좋은 동료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사생활적으로 알코올에 너무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도욱에게는 배울 점이 많은 좋은 배우였다.
“보자······. 그럼······. 연말, 연초에 형서 앨범이랑 도욱이 솔로 앨범을 발매하고······. 히어로즈 2 개봉에 맞춰서 케이케이 앨범을 발매하는 걸로 하는 거지?”
빌보드 시상식이 열리는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 비즈니스룸은 힛 엔터테인먼트의 회의실로 바뀌어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호텔 회의도 케이케이가 세계적인 그룹이 된 이후로는 익숙한 일이 되어 있었다.
앨범제작팀의 심준 팀장이 앨범 발매 일정을 전체적으로 정리했다.
케이케이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형서의 솔로 앨범에는 석지훈이 작사, 작곡한 곡과 김원이 피처링한 곡이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도욱이는 일정 괜찮겠어? 써놓은 곡 몇 개 있다고 했나······.”
“있긴 한데······. 아마 시상식 끝나고부터 작업 더 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도욱 쪽으로 멤버들과 심준 팀장의 시선이 쏠렸다.
“제 솔로 앨범은 디지털 싱글 정도로 발매했으면 좋겠어요. 히어로즈랑 나올 케이케이의 앨범에 더 신경을 쓰고 싶어서······.”
심준 팀장의 눈이 조금 커다래졌다.
사실 솔로 앨범보단 케이케이 앨범이 주력이었기 때문에 앨범제작팀 팀장의 입장으로선 부탁하고 싶은 일이었으나, 도욱에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도욱이 먼저 자신의 앨범보단 케이케이의 앨범에 신경을 쓰고 싶다고 하니 심준 팀장으로서는 반가운 이야기였다.
“그······. 그래도 되겠어?”
“그럼요. 제가 바로 케이케이 멤버인데. 그리고 이번 케이케이 앨범은······. 진짜 새롭고······. 뭔가 더 해보고 싶어요. 제대로······.”
여태까지 제대로 한 게 아닌 건 아니었지만, 도욱은 이제 새로운 곳에 발을 디뎌보고 싶어졌다.
이전까지 성공을 위해 ‘성공할 만한’ 안전한 길을 선택해온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빌보드 메인 시상 부분에 오를 만큼 자리가 잡힌 이상 음악적으로도 변화하고, 도전할 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지 더 오랫동안, 도욱이 알지 못하는 미래에까지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이야, 괜히 강도욱이 아니구나. 좋았어!”
심준 팀장이 흥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멤버들의 표정은 미묘했다. 어쩐지 미안하고, 또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정윤기는 도욱을 한 번 보고는 말했다.
“마, 당연한 거기도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인데······. 내도 더 열심히 하께.”
“맞아, 형은 더 열심히 해!”
안형서가 괜히 핀잔을 주듯 맞장구를 쳤다.
“나도······. 안무······. 잘해 볼게······!”
도욱의 옆에 앉은 박태형도 말했다.
‘이런 식이니 케이케이라는 그룹은 내려갈 수가 없겠구나.’
한쪽에서 회의를 지켜보던 이대형 팀장은 생각했다.
“자, 그럼 십 분만 쉬고 시상식 무대 컨셉 회의로 넘어가죠!”
오백호 부장이 외치자 안형서가 볼멘소리를 했다.
“십오 분 쉬면 안 되나요? 회의 너무 길어요······.”
“영원히 쉬고 싶냐?”
오백호 부장의 사나운 눈짓에 안형서는 금세 입을 닫았다.
“진짜 죽이는 무대 짜서 빌보드 휩쓸어 보자!”
“Yes!”
리더인 정윤기의 외침에 김원이 힘껏 외쳤다. 볼멘소리를 하긴 했지만 안형서도 그랬고, 다른 멤버들도 모두 정윤기와 같은 생각이었다.
빨리 무대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은 도욱이나 멤버들이나 모두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