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블록버스터 (1)
제네럴 스튜디오의 스태프들은 스튜디오에 처음 방문한 도욱을 환영했다.
이미 미팅 때 만난 적 있는 총감독이 도욱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욱! 잘 왔어요!”
이번 ‘히어로즈 2’의 연출을 맡은 장뤽은 프랑스 출신 미국인 감독으로 전작들에서 뛰어난 화면 연출로 호평을 받은 전적이 있는 감독이었다.
그는 이미 지난 미팅에서 자신이 ‘히어로즈’를 원작부터 영화 ‘히어로즈’까지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그 때문에 총감독을 맡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일장연설을 도욱에게 늘어놓았었다.
굉장히 열정적이고 활발한 감독이었다.
좋은 그림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양말까지 벗고 물속으로 들어가 카메라 감독 옆에 붙어서 디렉션을 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히어로즈’의 주연 배우진들은 ‘히어로즈 1’ 때보다 더 많은 컷수를 찍어야 했고,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모두 프로 의식이 철저한 배우들이었기 때문에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장뤽의 앞에서 대놓고 찌푸릴지언정 장뤽의 요구에 맞춰 열연을 펼쳤다.
빌리언맨 역할의 헐버트는 영화가 완성되면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보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를 갈기도 했다는 후문이었다.
그러나 도욱으로서는 예민한 스타일보다는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감독이 편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연기자인 도욱으로서는 감독의 뜻을 파악하기 힘들었고, 감독이 오케이를 낼 만한 컷을 연기하기 위해 배로 더 많이 생각해야 했다.
생각하는 건 괜찮았지만, 틀린 방향일 경우 그 생각들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는 일들이 허무할 때도 많았다.
“자! 다들 알겠지만 리얼맨 역의 미스터 도욱 캉입니다!”
장뤽 감독이 나서서 도욱을 소개했고, 주변부에 흩어져 자신의 일을 보고 있던 스태프들이 도욱을 크게 둘러싸곤 박수쳤다. 도욱은 한국식으로 예를 다해 스태프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럼 리허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장뤽이 말하고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도욱 씨, 중앙에 서 계시면 될 것 같아요.”
도욱의 옆에는 ‘히어로즈’ 출연 동안 도욱을 도울 현지 매니지먼트사 매니저인 다니엘이 함께였다.
다니엘은 한국에서 중학교까치 마치고 고등학교 때 대학 진학을 위해 이민 온 이였다. 손꼽히는 대학인 브라운대에 입학 미디어 전공으로 석사까지 지낸 인재로 현지 매니지먼트사 마케팅팀에서 근무 중이었다.
이번 도욱의 ‘히어로즈’ 미국 활동 마케팅부터 매니징까지 다니엘의 회사가 맡게 되면서 한국 출신 다니엘은 도욱의 매니저 역할을 잠시간 맡게 되었다.
뛰어난 사교성과 언변, 유쾌한 성격에서 나오는 유머러스함과 센스 등. 다니엘은 어느 곳 하나 모자람 없는 인물이었다.
덕분에 도욱은 ‘히어로스’ 감독 미팅부터 시작해 한국에서 캐릭터를 연구하고 준비하는 과정까지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다니엘은 그야말로 성장과정부터 성격까지 ‘리얼맨’에 가까웠다.
도욱은 다니엘을 보며 역시 ‘동양인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라는’ 이야기는 편견일 뿐이라는 것을 내심 다시 확인했다.
캐릭터 설정이 바뀐 리얼맨, 데이빗은 길거리에서도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닐 만큼 유쾌한 성격이었다. 너무 장난기가 많아 곤란할 때가 있는, 소년과 같은 마음의 소유자였다.
한마디로 공부 잘하는 날라리. 그가 가는 곳에는 늘 사람이 따른다.
새로 데이빗에게 부여된 인간으로서의 고민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들이었다.
언제나 밝아 보이고, 남자 친구도 여자 친구도 많은 그조차도 한국인도 아닌 미국인도 아닌 듯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들에 봉착할 때면 씁쓸할 수밖에 없다.
실제 미국에 이민 온 수많은 이민자들이 느낄 만한 감정이었다.
‘히어로즈’에 합류하며 그 간극을 좁혀 나간다는 설정이었다.
다니엘의 말대로 도욱은 스튜디오 중앙에 섰다.
도욱이 서자 대형 카메라들이 천천히 움직이며 도욱의 위치를 확인했다.
도욱은 뻘쭘한 기분마저 느껴야 했다. 도욱이 선 곳은 텅텅 빈 사각의 공간이었다.
카메라 테스트가 끝났는지 스태프가 다가와 도욱에게 촬영 동선에 대해 설명했다.
사각의 공간 중에 둔덕처럼 약간 올라온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빌리언맨이 적과의 싸움 중 날린 미사일 파편에 무너질 89층짜리 고층 빌딩이라고 했다.
“아아······. 네······..”
도욱은 끄덕이며 답했다. 스태프는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었다. 빌딩이 무너지며 거대한 파편이 떨어질 거고 미끄러지듯 내려가 어린 여자아이를 구하는 장면이었다.
이미 콘티를 본 상태였기 때문에 도욱은 쉽게 장면에 대해 이해했다.
길을 걷다가 그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는 씬은 실제 뉴욕의 거리에서 야외 촬영을 할 예정이었다.
“저희가 소리칠 거예요. 그 소리에 맞춰서 움직여 주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이를 안고 천천히 저 끝을 향해 달리세요. 열 배 정도 더 빠르게 처리될 테니까 표정은 감안해 주시고요.”
도욱은 끄덕였다.
‘히어로즈 2’ 촬영 분량의 절반 이상이 CG 밑작업 촬영과 액션 씬들이었다. 도욱은 이를 위해 한국에서 많은 준비를 했다.
본래도 운동 신경이 뛰어나고 꾸준한 운동으로 관리가 되어 있던 몸이었지만, 리얼맨의 역할에 더 맞추기 위해 도욱은 더욱 근육을 키웠다.
근육도 무조건 키운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평범한 대학생이라는 설정 때문에 옷을 입었을 때는 크게 티가 나지 않다가 벗으면 확 드러나는 생활 근육처럼 보일 잔근육을 키우는 등 디테일에도 힘썼다.
와이어 액션도 액션 스쿨을 다니며 짧은 시간 고강도의 훈련으로 익혀 놓은 상태였다.
‘우주에서 온 연인’에서 초능력을 쓰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연기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해왔다.
그러나 ‘히어로즈’의 CG는 역시 ‘우주에서 온 연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었다.
‘거의 무에 가까운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다들 연기를 한 건가······..’
역시 준비와 실전은 달랐다. 도욱은 만만치 않은 촬영이 될 것이란 생각에 마음을 굳게 먹었다.
먼저 동선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여기까진 도욱도 무리 없이 진행했다.
실제 촬영이 문제였다.
“아!······.”
빠른 동체 시력으로 누구보다 빠르게 아이와 떨어지는 건물의 파편을 모두 확인한다. 그리고 달려간다.
단순한 장면이었다.
완전히 엉망은 아니었다. 도욱은 나름대로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도욱의 시선 처리와 표정에서 약간의 미숙함이 느껴졌다.
“한 번 더 가지!”
스튜디오에 벌써 다섯 번째 울려 퍼지는 ‘한 번 더’라는 외침이었다.
신인이었다면, 첫 촬영치고는 꽤 잘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수준이었지만 지금 이 연기를 하고 있는 건 도욱이었다.
장뤽 감독은 도욱의 연기 레퍼런스를 여러 번 보았고, 그의 연기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리얼맨의 첫 등장인 만큼 원작자이자 제작자인 마틴의 의도처럼 리얼맨이 이후의 시리즈로 이어지며 주요 히어로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짧은 출연 장면에서도 관객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했다.
도욱 역시 스스로의 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얼굴과 몸이 굳어 있어······.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충분히 상상력을 발휘해 연기를 하고 있었음에도 완전히 어색함을 벗지 못한 상태였다. 텅 빈 공간이 주는 압박감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은 것일 수도 있었다.
언제나 연기를 할 때면 자유로웠는데, 이번엔 자신의 몸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난 느낌이었다.
“발연기구만. 뻣뻣하게 굳어선.”
그때 장뤽 감독의 뒤에서 들려온 신랄한 비판에 도욱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옆에 있던 다니엘도 들은 듯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스태프들은 혹여 도욱의 기분이 상했을까 도욱의 눈치를 보았다.
장뤽 감독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는 듯 평온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신랄한 비판을 던진 이를 맞았다.
“헐버트······.. 오늘은 지각이 아니네.”
“도대체 내가 언제 지각을 했다고 그래? 새로운 친구가 워낙 대단하다길래 보러 왔더니··· 난 다시 대기하러 가야겠군.”
빌리언맨 역을 맡은 헐버트였다.
도욱이 촬영할 다음 분량이 바로 헐버트와 함께하는 역이었다. 헐버트는 도욱과 합을 맞추는 첫 촬영을 앞두고 미리 들렀던 것이다.
‘이런······.’
빌리언맨은 도욱도 즐겨보던 영화였다.
‘빌리언맨 1편부터 4편까지······. 전 시리즈를 함께한 헐버트는 빌리언맨 그 자체다. 헐버트와의 연기는 가장 기대하고 있던 것이기도 한데 첫인상부터 좋지 못한 것 같군.’
도욱은 자신에 대한 실망감에 입술을 물었다.
할리우드에 왔다고 해서 긴장하거나 블록버스터 영화다운 출연진에 주눅이 들 생각도, 든 적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이면 자신의 자신감은 자만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긴장해 버린 건가······.’
어서 어색함을 던져 버리고 자신의 페이스를 찾고 싶은 마음에 도욱은 조급해졌다.
“여기, 헐버트랑 인사하고 촬영 이어가죠. 미스터 캉도 조금 쉬었다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고.”
도욱의 조급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뤽 감독이 태평한 소리를 했다. 어쨌든 도욱도 헐버트와 인사를 해야 했기에 감독과 헐버트 쪽으로 걸어 나왔다.
“강도욱입니다.”
도욱의 인사에 헐버트가 코웃음을 쳤다.
“자기는 차라리 눈을 감고 연기하는 게 낫겠어.”
헐버트의 빈정거림에 도욱은 표정을 굳혔다.
들은 대로 헐버트는 거칠 것 없는 사내였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첫인사였다.
“첫인상이 좋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하군요. 헐버트 씨와의 연기를 기대했는데 말이죠.”
도욱은 있는 그대로의 감상을 말했다.
“나도 기대했다고. 칸에서 봤단 말이지. 너의 연기.”
헐버트의 말에 도욱이 놀란 눈을 했다. 장뤽 감독이 헐버트는 가 본 적도 없는 칸에 도욱은 간 적이 있다며 깐죽거렸다.
“그럼 뭐 해. 내가 본 건 헛것이었나 본데.”
“그만하라고. 감독인 나보다 자네가 왜 더 난리야? 도욱은 첫 촬영이고, 이제 겨우 다섯 번 찍었어. 자네도 열 번 넘게 NG를 낸 장면이 있다는 걸 잊지 마.”
“그런 얘긴 뭐 하러 해? 쪽팔리게.”
장뤽 감독이 도욱을 두둔하자 헐버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말은 빈정거리면서 하지만 그만큼 할리우드에 첫 진출하는, 가수로서만 유명할 뿐 할리우드에선 무명이나 다름없는 도욱에 대한 헐버트의 기대가 느껴졌다.
‘잘해내고 싶은데······. 잠깐·········’
오랜만에 초조함을 느끼던 도욱의 머릿속에 헐버트의 말이 다시 한번 재생되었다.
***
그 시각.
한국의 각종 인터넷 포털사이트들은 도욱의 소식으로 뜨거웠다.
도욱의 ‘히어로즈 2’ 출연 소식이 공식 보도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대형 팀장은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기사들을 확인하고는 빙긋 웃음 지었다.
한국만이 아니었다. 아시아가 들썩이고 있었다.
무명의 동양 배우가 ‘히어로즈’의 히어로가 된다 해도 난리일 텐데 도욱이었다. 도욱은 배우로서도 가수로서도 아시아권에서는 넘어설 자가 없는 지배자와 마찬가지였다.
도욱의 일거수일투족이 보도되는데 이번 소식은 그야말로 역대급이었다.
한국은 물론 중국의 기자들이 미국으로까지 가 도욱을 취재하겠다고 난리였고, ‘히어로즈 2’의 아시아 흥행 성공은 이미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을 만한 호응이었다.
케이케이 멤버들은 이대형 팀장과 함께 인천공항에 와 있었다.
“와······. 진짜 완전 기대되네!”
“빌보드 시상식 갈 때가 기대돼요, 지금이 기대돼요?
“그걸 어떻게 선택해! 석지훈······. 그런 줄은 알았지만 너 정말 잔인한 닝겐이구나?”
안형서와 석지훈의 대화를 들으며 정윤기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박태형은 거의 안색이 파리해져 있었다.
“Bro, are you okay?”
김원이 걱정스럽게 물을 정도였다. 박태형이 어렵사리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구철민이 멤버들에게 발권해 온 비행기 티켓을 나눠주었다.
휴대폰을 보던 이대형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멤버들을 인솔했다.
“가시죠.”
“네!”
“Let’s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