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슈퍼스타-216화 (216/225)

# 216

Hero (4)

마틴의 예리한 표정에 이대형 팀장은 손안에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큰 문제가 없다면, 사실은 어느 정도 문제가 있어도 ‘히어로즈’ 출연은 무조건 도욱에게 득이 될 일이었다.

케이케이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아이돌 그룹인 것과 도욱이 그야말로 세계적인 배우가 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였다.

이대형 팀장은 마틴의 표정을 살폈다.

마틴은 노장이면서 거장이었다. 평소 스쳐 지날 땐 평범한 노인 같아 보여도 그가 세운 ‘히어로즈’라는 세계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대형 팀장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이 몇 군데 있었지만 창작자인 마틴 앞에서 그 부분들을 가감 없이 말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괜히 일을 그르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어떤 건가요?”

한 개도 아니고 몇 개나 있다고 하니 사라가 빠르게 물었다.

“데이빗의 어머니는 한인 타운 마트에서 캐셔로, 아버지는 데이빗이 다니는 대학에서 청소 노동자로 일한다는 설정이네요. 하나뿐인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미국으로 왔고요.”

“맞아요. 한국인들의 교육열이 어마어마한 건 미국인들도 잘 아는 사실이에요. 덕분에 아이비리그 등 유수의 대학에 한국인들이 많죠. 그를 위한 부모들의 희생정신도 남다르고······. 마틴은 프로 골퍼인 미스터 최의 아버지 얘기에도 깊은 감명을 받은 적 있어요. 최를 위해서 밥도 굶어 가며 매니저 일을 했다고 하더군요.”

도욱의 말에 사라가 설정에 대한 배경을 설명했다.

“네. 데이빗의 가족 이야기는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죠······. 부모님의 희생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데이빗은 공부밖에 모르는 인물이 되고요. 타지에 와 공부만 하며 마음에 자유가 없고, 억압을 받았으니 내성적이고 수동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마틴이 끄덕였다.

도욱의 캐릭터에 대한 해석은 정확했다.

그리고 마틴이 그린 데이빗이라는 캐릭터도 배경부터 현재까지 모두 설득력 있는 부분이었다. ‘히어로즈’의 히어로들이 제 나름대로의 인간적 고뇌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최초의 한국계 미국 이민 자녀 캐릭터에게 주어진 설정으로서 나름 설득력 있었다.

그러나 그 점이 문제였다.

‘미국인이 생각하는 한국인······. 너무나 그대로다.’

나름대로 고민하고 연구한 티가 나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서양인이 생각하는 동양인의 이미지가 내재되어 있었다. 빌리언맨을 만나 최신식 리얼맨 가면을 받아 히어로즈 활동을 하며 성장해 나가는 부분도 사실은 서양 우위의 시각에서 해석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시절의 한국인을 떠올리지 않았다고 해서 고마워할 수는 없지.’

도욱은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물론 다른 히어로들도 단점이 있고, 고뇌가 있어요. 하지만 내성적이고 수동적인 성격······. 공부벌레······. 이런 건 원래 있던 한국인들에 대한 선입견이나 부정적인 현실의 이미지를 고정시킬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마틴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런 평범한, 보편적인 인물이 히어로가 되어 변화하면,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지 않겠어요?”

사라가 반박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내성적이고 수동적인 인물이 한국의 보편적인 인물이라는 생각부터······. 저는 달갑지 않네요. 히어로가 되더라도 결국 그게 본 성격일 텐데 말이죠.”

도욱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라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 부분은 제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계속 말해보게.”

마틴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러워하는 도욱에 마틴이 말했다.

“무엇보다도······. 제가 이 캐릭터를 할 수 없는 이유는 데이빗의 신체에 변화가 오는 원인이에요.”

데이빗의 몇 대 위, 아마 그의 증조부 정도 되는 인물은 한반도에 거주하며 일제 강점기를 살았다. 그리고 일제의 의학 실험에 동원된 인물이었다.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없이 무사히 풀려났지만, 3대째 되는 도욱의 몸에서 유전자 변형이 일어났다는 설정이었다.

이대형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분만큼은 이대형 팀장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다만 자세히 설명되는 게 아니라 한 줄의 대사로 처리되고 있었기 때문에 넘어가야 하나 싶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수많은 잔악무도한 짓을 행했다. 마루타 실험은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마루타 실험을 단순히 기술 발전을 위한 ‘일본의 의학 실험’이라는 한 줄로 요약해 버렸다.

잘만 활용하면 일제 강점기에 인체 실험까지 한 사실에 대한 폭로가 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그러한 반인류적인 부분에 포커스가 맞춰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도욱의 놀라운 능력이 일제의 실험에서 기인함으로써 마치 식민사관처럼 결과적으로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히어로가 되는 데 도움을 준 셈이었다.

동아시아의 역사가 걸린 중차대한 문제였다. 한 줄로 요약되어 제대로 조명되지 않을 것이라면 어떠한 해석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게 옳았다.

도욱이 일목요연하게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말하자 마틴과 사라는 긴 침묵을 지켰다.

“이 부분은 워낙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긴 해서요.”

이대형 팀장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어렵게 덧붙였다.

도욱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들이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물론 마틴을 비롯한 시나리오 작가들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이 ‘소재’에 불과했다.

그랬기 때문에 많은 것들이 간과되었다.

나름대로는 깊이 있게 고민하고 설정한 것들이었지만, 작품을 위한 ‘소재로서의 고민’ 정도뿐이었다.

히어로즈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최대치로 발휘하는 필드이기도 했다. 그런 전문가들이 한국인인 도욱을 캐스팅하겠다고 나서면서도 이런 우를 범한 건 다른 게 아니었다.

너무 쉽게 생각한 탓이었다.

자신들도 모르게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양인을 히어로로 만들고, 한국인을 캐스팅한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어떠한 틀을 깨고, 변화한 것이었다. 충분히 영화로서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영화 ‘히어로즈 2’는 원작보다 더 자유분방하고, 진보적인 내용으로 그 존재 의의를 갖게 될 것이었다.

그런 ‘히어로즈’ 제작진들답지 않은 어설픔이 대본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도욱은 어쩌면 그 점에서 더 이 작품을 할 수 없겠다고 느꼈다.

아예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차별적인 내용이었다면 잘못됐다고 말하기란 쉬웠다. 그러면 그때부터 고민은 시작된다.

그러나 이 대본에는 ‘나름대로는 고민한’ 부분들이 보였고, 그렇기 때문에 더 무엇이 문제인지 상대가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의 결과가 이 대본일 테니 대본 수정을 요청하는 것도 무리라는 느낌이었다.

“으음······. 그렇군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긴 시간처럼 느껴지는 침묵의 시간이었다.

긴 침묵 끝에 마틴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거절하고 끝나는 건가······.’

이대형 팀장은 아쉬운 마음에 침을 삼켰다. 그때 사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아까 전까지도 좋지 않은 표정이었던 사라의 눈가에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뭐지?’

이대형 팀장이 잠시 의문을 가졌을 때였다.

도욱은 마틴과 마주 보고 있느라 사라의 표정은 보지 못한 체였다. 마틴의 표정은 무척이나 근엄했다. 도욱이 카지노에서 보았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안 되겠군요.”

마틴이 말했다.

도욱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한국이나 동양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세계인들이 갖게 하는 데 자신이 일조하게 되는 것이 더 큰 실(失)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자신의 말을 통해서라도 조금은 마틴이나 ‘히어로즈’의 제작진들이 더 심도 깊고 세심하게 최초의 동양인 캐릭터를 이끌어 나가주길 바랐다.

“이런 기회 주신 것만큼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히어로즈는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한 영화입니다······. 특히나 어린 친구들은 히어로즈를 보며 자신만의 꿈을 키워 나가지요. 리얼맨 캐릭터가 완성되어 히어로즈에 합류하게 된다면 정말이지 큰 의미가 있을 겁니다.”

도욱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러한 일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눈빛만은 진중했다.

도욱은 ‘히어로즈’를 탄생시킨 후 마틴이 가장 크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 가장 기쁨을 누렸고, 부담을 느끼고 동시에 오랜 기간 ‘히어로즈’를 제작하는 원동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빨려 들어갈 듯한 검은 눈을 바라보며 마틴은 생각했다.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소매치기를 잡은 건 도욱이었을지언정, 도욱이라는 ‘The real man’을 발견한 건 자신이었다.

“알아요. 알고말고. 그러니 이 대본은······.”

마틴이 표정을 풀고 말했다.

“안 되겠군요. 이대로는.”

“······네?”

도욱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틴을 바라보았다. 사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사실 캐릭터를 설정할 때 이미 너무 구태의연한 것 아닌가, 한국인에 대한 선입견만 들어가 있고, 선입견을 깰 만한 요소는 없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딱 한 번 제기된 적 있었다.

그건 심지어 마틴에 의해서였다. 마틴이 만난 한국인, 그러니까 도욱은 절대 내성적이지도 소극적이지도 수동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수가 생각하는 이미지가 있었고, 이미지를 따라가는 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쉽게 살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다수가 생각하는 한국인의 이미지만 있을 뿐, 실제로 다수의 한국인들이 어떤지에 대한 고민은 ‘어차피 히어로가 될 거니까.’ 하는 생각으로 더 고민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아직까진 ‘히어로즈’의 메인 히어로도 아니다 보니 할애하는 시간이 적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그런 쉽게 가려고 했던 점을 도욱에게 제대로 간파당한 것이다.

일본의 실험에 대한 부분은 도욱에게 사과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생각지도 못했었다.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리얼맨 캐릭터는 전면 수정할 겁니다.”

“그게······.”

“어차피 도욱이 완성시켜야 할 리얼맨입니다. 도욱이 원치 않는 리얼맨을 다른 한국 사람들이라고 해서 원할 리 없겠죠. 나는 상업 만화와 상업 영화를 하는 사람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대중들이 보게 하기 위해 이 정도 수정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틴이 단호하게 말했다. 거장으로서 상당히 고집 있는 타입일 거라 지레 짐작한 도욱은 이것 또한 자신의 선입견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마틴은 상업 작가로서 언제든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시대에 발맞춰 작품을 변형시켜 나가며 ‘히어로즈’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여전히 거절입니까? 수정 대본은 받아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던가요?”

“아, 아닙니다! 단지 마틴 씨의 작품을······.”

“그렇게 신랄하게 잘못된 점을 말하며 거절은 할 수 있고요?”

마틴이 농담조로 반쯤 뼈 있는 말을 던지자 도욱은 그저 웃는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솔직하게 이야기해 줘서. 어차피 재미 위주의 상업 영화라서 다들 많은 기대는 하지 않지만······. 난 그래도 깊이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

진심 어린 마틴의 말에 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틴과의 긴 미팅을 마치고, 도욱과 이대형 팀장은 함께 저녁까지 한 후에야 마틴의 저택을 나섰다.

두 사람을 사라가 배웅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이대형 팀장이 사라에게 물었다.

“마틴이 도욱 씨의 말을 수용할 것이란걸······.”

사라가 무슨 말이냐는 듯 이대형 팀장을 쳐다보았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 웃었다. 아까 전 사라가 웃음 지었을 때 이대형 팀장의 전혀 영문을 알 수 없어 하는 당황한 표정이 사라의 기억에도 꽤 인상 깊게 남았기 때문이었다.

“마틴은 절대로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의견에는 ‘그렇군요.’라는 식의 호응도 해주지 않아요. 자신의 짧은 한마디조차 왜곡해 이해해버리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런데 도욱의 말에는 결국 ‘그렇군요.’ 하고 말았잖아요.”

“아, 그렇군요.”

“네. 그렇군요.”

이대형 팀장과 사라가 마주 보며 웃었다.

‘히어로즈’ 영화팀의 총감독까지 영상 통화로 연결하는 등 긴 토론의 시간이 있었지만, 어쨌든 일이 잘 마무리되어 다행이었다.

도욱과 이대형 팀장은 수정된 대본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도욱의 ‘리얼맨’은 최종적으로 어떻게 될지 기대를 숨길 수 없었다.

***

3달 후.

미국의 제네럴코믹스 스튜디오.

거대한 스튜디오 안에 도욱은 첫 촬영을 위해 들어섰다.

도욱의 첫 등장 씬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대본 수정까지 거치며 도욱이 꽤 오래 연구한 캐릭터였다. 이제는 초안과는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가 되어 있는 데이빗을, 또 리얼맨을 도욱은 잘 연기해낼 자신이 있었다.

스튜디오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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