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소녀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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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 합정동 혜성 엔터테인먼트 건물 앞.
대부분의 기획사들은 강남에 밀집해 있었지만 최근 합정동에도 기획사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차로 10분 거리인 상암동에 방송국들이 밀집해 있었던 데다 비교적 지대나 임대료가 낮았다.
그러한 이유로 특히 소형 기획사들이 합정동에 많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혜성 엔터테인먼트도 이제 설립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기획사였다.
혜성은 아라와 함께 손꼽히는 유수의 기획사 중 하나인 청월의 이사였던 장혜성이 독립하며 세운 기획사였다.
이름을 내세울 소속 연예인은 이전에는 청월 소속 연예인이기도 했던 윤미진 정도가 전부였다. 윤미진은 그룹 활동을 하다 그룹 해체 후 혜성에서 솔로 앨범을 한 장 냈다. 겨우 손익분기점을 맞춘 앨범이었다.
계약 기간이 1년 정도 남은 현재는 결혼을 앞두고 있어 계약이 끝난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나마 윤미진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오디션을 열고 어느 정도 연습생을 모을 수 있었다.
현재 혜성 엔터테인먼트는 최소한의 연습생으로 여자 아이돌 그룹을 기획 중에 있었다.
정혜성 대표가 청월에서도 여자 아이돌 그룹을 성공시킨 적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미진이 속해 있던 그룹이 그 그룹이었다.
혜성 엔터테인먼트에서 처음으로 데뷔시킬 여자 아이돌 그룹의 목표는 내년 상반기 데뷔였다. 여기까지 오는 데 물론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아무리 실무에 강한 정혜성 대표라고는 해도 일단 자본이 넉넉하지 않았다.
정혜성 대표가 그간 모은 돈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기에는 미미한 액수였다. 이외에는 모두 투자를 받아야만 했는데 리스크가 큰 사업인 만큼 투자를 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때문에 여러 번 프로젝트가 엎어질 뻔하기도 했다. 무기한으로 연기된 적도 있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목표가 가능해진 것은 한 투자자에 의해서였다.
어느 날 정혜성 대표에게 다이렉트로 투자자에게 연락이 온 것이었다.
투자자가 제시한 투자 금액은 무려 3억 원이었다.
정혜성 대표가 생각하는 아이돌 그룹 제작비용은 데뷔까지 6억 원 정도였다. 최소의 최소로 잡은 제작비용이었다. 연락을 받았을 당시 5억 원 정도의 제작비가 모여 있는 상태였다.
일부는 이미 사용했고, 일부가 남아 있었다. 데뷔를 위해서는 앨범 퀄리티를 조금 떨어뜨리는 방법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기에는 연습생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며 훈련시키는 것만으로도 계속해서 지출이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그럴 때 마치 구세주같이 등장한 투자자였다.
3억 원의 투자금을 받게 될 경우 심지어 생각했던 최소 비용보다도 많은 비용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 투자자가 혜성 엔터테인먼트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도욱이었다.
도욱은 혜성 엔터테인먼트 대표실이 있는 8층으로 향했다. 대표실에 도착하자 데스크에 있던 비서가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비서로서 실수인 행동이었지만,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이 시간에 대표실을 방문하기로 한 건 몇 개월 전 거액의 금액을 혜성 엔터에 투자한 투자자뿐이었다.
투자자는 나타나지 않고 세계적인 스타, 케이케이의 강도욱이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지나가던 도욱을 봤다고 하더라도 비서는 걸음을 멈추고 도욱을 보았을 것이다.
“강도욱 씨?”
비서가 얼이 나간 채 묻자 도욱이 빙긋 웃으며 비서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무······. 무슨 일로······.”
“오늘 세 시에 대표님을 뵙기로 해서요.”
“아, 네. 이쪽으로······.”
비서가 대표실 쪽으로 걸어가며 도욱을 안내했다. 안내를 하면서도 비서의 머릿속에서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 뿐이었다.
‘세 시 손님이면 투자자뿐이 없는데······. 대표님이 강도욱이랑 아는 사이였나?······.’
비서가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정혜성 대표가 들어오라고 답했다.
문이 열리자 비서가 한쪽으로 비켜나며 대표에게 말했다.
“강도욱 씨 오셨습니다.”
투자자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접객용 소파에 앉아 있던 정혜성 대표가 일어났다.
“뭐? 강도욱 씨가 여기 왜······.”
그 물음에 비서의 머릿속은 더욱 물음표로 가득 찼다. 비서의 뒤편에 서 있던 도욱과 눈이 마주친 정혜성 대표도 얼이 나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십니까. 뵙고 싶다고 하셔서 왔습니다.”
도욱이 부드럽게 웃으며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정혜성 대표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
정혜성 대표과 비서 모두 다시 한번 놀랐다. 오늘 세 시에 약속했던 그 투자자가 도욱이었던 것이다.
“어······. 아······. 아이고, 제가 생각지도 못했던 분이라······. 정혜성입니다.”
정혜성 대표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밀었다. 도욱이 정혜성 대표와 정식으로 악수를 나누곤 자리에 앉았다. 도욱이 자리에 앉자 비서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아, 따듯한 녹차 있나요?”
“네.”
“그럼 그걸로 부탁드릴게요.”
정혜성 대표는 찬물을 한 잔 부탁했다. 비서가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대표실을 나갔다.
“제가 정말······. 지금 너무 놀라서······.”
정혜성 대표도 나름대로 엔터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사업 수완도 있었고, 제작 능력도 있었다. 그랬으니 기획사를 차리려고 나와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런 유능한 인물인 것과는 별개의 당황스러움이었다.
도욱이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네. 놀라셨죠. 미리 언질을 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인 강웅천 교수에 의해서 이루어진 투자였으므로 정혜성 대표가 도욱을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도욱의 말에 정혜성 대표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해외 투어로 바쁜 걸로 아는데······. 케이케이가 다시 한국에 왔나 보네요.”
케이케이는 역시 엔터 업계가 주시하고 있는 그룹이었다. 정혜성 대표조차도 케이케이의 큼지막한 스케줄 정도는 꿰고 있었다.
“네. 며칠 전에 들어왔습니다.”
“피곤하겠어요. 컴백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곧이요. 확실히 정신이 없긴 하네요.”
침착함을 찾은 정혜성 대표가 분위기를 풀며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비서가 주문한 녹차와 물을 각자의 앞에 두고 다시 대표실을 나갔다.
“어······. 그럼 도욱 씨야말로 바쁠 테니······.”
정혜성 대표가 ‘왜 도욱이 이곳에 투자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숨기지 않은 어투로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만남은 도욱 측과 정혜성 대표의 조율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기획 중인 여자 아이돌 그룹의 데뷔를 앞두고 투자자에게 그 방향성과 개요를 설명하는 것은 당연한 관례였다.
정석대로라면 모든 투자자를 모아두고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했지만 혜성 엔터테인먼트의 경우 주식회사도 아니었고, 지인들을 통해 소액 투자를 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형식까지는 취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도욱은 따로 프레젠테이션까지는 아니지만 간략하게라도 브리핑을 해야 하는 상대였다.
3억 원이면 정혜성 대표 본인이 투자한 금액보다도 조금 더 많은 금액이었다. 주식회사로 따지면 최대 주주였다. 거기에 지인이 아닌 외부 투자자였다.
수익 지분 비율에 대해서는 이미 서면과 대리인을 통해 유선으로 정리가 끝난 상황이었지만, 조건에는 당연하게도 제작 과정 보고가 들어가 있었다. 도욱은 투자자로서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그룹의 방향성에 대해 논하고, 그 방향에 대해 어느 정도의 제재를 가할 권리가 있었다.
처음 투자를 받았을 때부터 정혜성 대표 쪽에서는 물론 도욱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도욱 쪽에서 만남을 차후로 미뤘다.
그러면서 일단은 혜성 엔터와 정혜성 대표에게 제작 기획에 관한 전체를 맡기고, 본인은 아예 잘못된 방향만 아니면 터치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야말로 돈도 주면서 자율성도 보장해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정혜성 대표로서는 최고의 투자자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도욱으로서는 정혜성 대표가 만들 그룹이 어떤 그룹인지 알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 틀이 잡힌 기획서를 도욱 측에 혜성에서 메일로 보낸 게 얼마 전이었다. 면대면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고 덧붙인 메일에 도욱 쪽에서 드디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것이 오늘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희 회사에 투자할 생각을 하셨어요?”
정혜성 대표가 본격적인 설명에 들어가기 전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투자처를 찾다 보니······. 정 대표님 소문을 들었습니다.”
도욱은 당황하지 않고 둘러댔다.
업계에는 소문이 워낙 많이 돌았다. 소문의 근원지를 굳이 들으려고 하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정혜성 대표도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도욱 주변에도 업계 관계자가 많으니 당연히 자신이 그룹을 제작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도욱 씨한테 소문내 준 사람한테 절이라도 하고 싶네요.”
“하하.”
“그래도 현직 아이돌이 아이돌 제작에 투자할 줄이야.”
정혜성 대표가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전까지는 주식 투자자의 새로운 투자로만 알고 있었던 정혜성 대표였다.
“이쪽을 오히려 제가 잘 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긴. 도욱 씨면 제작 쪽에선 이보다 더 전문가일 수 없죠. 케이케이의 프로듀서 아닙니까. 투자자가 누군가 했는데 돈을 떠나서도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죠.”
도욱의 말에 정혜성 대표가 웃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힛 엔터 쪽에서는······.”
“아, 그 부분이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도욱은 조애니 부장과 이미 합의를 끝낸 상태였다.
조애니 부장 쪽에서 내켜하지 않는다면 끝까지 아버지인 강웅천 교수만을 대리인으로 내세운 채 도욱 본인은 드러내지 않을 생각도 있었다.
소속 가수가 다른 기획사의 일을 돕는다는 게 소속사로서는 탐탁지 않은 일이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시 조애니 부장은 포부가 남다른 인물이었다.
도욱이 엔터 사업 투자자 및 제작자로서 욕심을 내고 있는 부분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투자자로서의 도욱에게 자유를 주는 대신 제작자로서의 도욱을 얻을 방법 또한 알았다.
도욱이 현재 투자하고, 도전하고 싶은 그룹은 걸그룹이었다. 힛 엔터의 계획에 따르면 향후 3년 정도가 지나야 제작에 들어갈 그룹이었다.
조애니 부장은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 도욱이 ‘소녀들’ 투자의 전면으로 나서는 것을 승인했다. 도욱이 본격적으로 제작하는 가수가 있다면 힛 엔터의 가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조건 아닌 조건도 잊지 않았다.
물론 도욱도 그럴 생각이었다.
사실 ‘소녀들’에 투자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다만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투자자가 저라는 것으로 대대적인 언론에 알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밝혀지는 것까진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아······. 걱정할 만하죠. 하지만 저도 제가 제작하는 만큼 제 기획력으로 승부를 보고 싶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물론 적절히 이용할 수는 있겠지만······.”
도욱이 끄덕였다. 그렇다면 뒷말은 하지 않아도 좋을지도 몰랐다.
“네. 제작 쪽은 앞으로도 일절 의견을 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정말 투자만 하는 겁니다. 오해 살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정혜성 대표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서면에 남길 생각이었지만, 도욱은 이미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제작 능력에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정혜성 대표······. 그럴 만한 인물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정 대표 역시 조금 더 넉넉한 자금을 가지고 있었다면······. 더 그 그룹을 큰 그룹을 만들 수 있었겠지······.’
도욱은 이전에 정혜성 대표가 제작했던 그룹, ‘소녀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도 없는 기획사에서 나온 여자 아이돌 그룹이었다. 아이돌 산업이 부흥을 맞이하면서 우후죽순 데뷔한 여자 아이돌 그룹 중 하나일 거라고 모두들 생각했던 그때, 소녀들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상당한 노래와 실력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멤버들 개개인의 재능도 빛이 났지만 무엇보다 빛난 건 ‘소녀들’을 키워낸 기획력이었다.
여성스러움과 섹시함, 이것저것 시도해 보며 얻어 걸려 보자는 심산이었던 다른 기획사들과 달리 명확하고 신선한 컨셉으로 대중의 눈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거기에 신생 기획사라 어렵게 연습하며 고생했던 멤버들의 투지도 다른 그룹과는 오히려 차별화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인기에도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괜히 엔터 산업에 자본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속적인 투자와 미디어 노출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중들은 금세 퀄리티 좋은 다른 그룹을 찾기 마련이었다. 대체 그룹은 너무나도 많았다.
데뷔 앨범의 성공으로 그 뒤를 이끌어 나가기엔 본래 그룹들 대부분이 2집 앨범 정도는 내야 순수익이라는 것이 나왔다.
‘2집, 3집까지도 더 밀고 나갈 자본이 있었다면······.’
그런 의미에서 도욱이 투자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곳은 없었다.
도욱의 도움이 필요했고, 약간의 투자만 있다면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그룹이었다. 투자금 회수나 수익은 보장해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기적으로 완벽했다.
‘서중원이 내보낼 걸그룹······. 그 걸그룹의 상당한 경쟁자가 될 거야. 아라 엔터가 다시금 방송계를 독식할 수 없게 되겠지.’
도욱은 차분히 이를 갈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