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One in a Million (1)
“따로 연락한 적은 없어요.”
도욱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도욱과 박태형은 팀 내에서 유일한 동갑 친구였고, 데뷔 전 박태형이 데뷔할 수 있게 힘을 준 것도 도욱이었으므로 팀 내에서도 각별한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욱은 말주변이 없어 대화할 때도 말이 잘 없는 박태형이 그나마 말을 하는 상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욱은 개인 활동과 곡 작업 등으로 쉴 새 없이 바빴고 최근에는 숙소에서 멤버들의 얼굴조차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또한 데뷔 직전이나 데뷔하고 나서 얼마간은 그래도 박태형과 서로 격려하는 말도 자주 나누고 대화도 했던 것 같은데 도욱이 바빠지면서 둘만 따로 대화하는 시간이 없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초반에는 도욱도 박태형을 많이 신경 쓰고 걱정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제 실력을 발휘하며 언제나 묵묵하게 자신의 몫을 해내던 박태형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썼을지도…….’
도욱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정윤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끄덕이며 도욱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여 주었다.
박태형이 정윤기에게 보낸 개인 메시지였다.
박태형이 도욱 다음으로 편하게 생각하는 멤버가 있다면 그 멤버는 의외로 정윤기였다. 정윤기는 리더로서 또 형으로서 뒤에서 박태형을 세심하게 챙겨 주고 있었다.
[저 집에 잘 내려왔어요 윤기 형. 이것저것 생각할 일이 많아서… 예정보다 며칠 더 있다가 올라갈 것 같아요 연락 잘 안 돼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박태형의 본가는 경북 울진이었다.
외동아들인 박태형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기 바라는 마음에 서울에 올라왔던 부모님들이 박태형이 데뷔한 후 다시 울진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메시지를 보낸 날짜가 벌써 2주 전이었다.
“그럼 이때부터…….”
“그래…….”
도욱의 물음에 정윤기가 끄덕였다. 3일 정도 본가에 내려갔다 온다고 했을 때 멤버들은 박태형을 부러워했었다.
휴식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간중간 있는 스케줄 때문에 연달아 쉴 수 있는 멤버는 별로 없었다.
개인적인 활동을 하는 멤버들에 비해 케이케이 활동만 하는 박태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스케줄이 없다고 해서 마냥 쉬고 오는 게 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나마 여태까지 박태형이 본가에 내려간 일이 없었기 때문에 허락된 3일이었다.
스케줄이 없어도 시간이 있으면 다음 앨범 준비나 자기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오던 케이케이 멤버들이었고, 박태형도 마찬가지였다.
“마, 태형이가 사고 칠 애도 아니고……. 우리가 여태 좀 바빴나. 시간 나고 오랜만에 가족 보니까 감성이 센티해져가 그럴 수도 있다 생각해서 알았다 했는데……. 이건 뭐 며칠이 아니지.”
정윤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옆에 있던 안형서가 끼어들며 말했다. 안형서는 며칠 전부터 OST 곡 녹음 중에도 틈날 때마다 박태형에게 전화를 하는 멤버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연락 안 된다고 했지만……. 전화도 종일 꺼져 있고……. 얘가 도대체 언제 오려나 기다리고만 있으니까 속이 탄다, 진짜.”
“태형이 형……. 진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죠? 생각할 일이란 게 대체 뭐길래…….”
석지훈이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김원도 한숨만 내쉬었다.
정윤기가 메시지를 하나 더 보여 주었다.
[연락 안 돼서 걱정하셨죠 형 죄송합니다…. 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아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우리가 하도 연락해서 그랬는지 오늘에서야 이렇게 메시지 오고는 전화기 또 꺼져 있다. 내 속이 타나 안 타나.”
도욱은 표정을 굳혔다. 박태형이 이렇게 멤버들을 걱정시키고 있을 줄은 몰랐다.
무책임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스케줄에 불참한 것도 아니고, 무언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니 완벽하게 비난할 수만도 없었다.
사실 스케줄이 생길 때까지 내버려 둘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같이 연습실에 나가 연습을 하던 박태형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멤버들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집에 내려가기 전 박태형이 숙소에서 평소보다 더 말수도 적고 우울한 얼굴이었던 걸 기억하던 멤버들이어서 더욱 그랬다.
“백호 형은 아세요?”
“아직 모른다. 얘기할까 하다가 괜히 일만 키우게 될 것 같아서……. 집에 일 있어서 좀 더 있다 온다고 했는데…….”
도욱은 끄덕였다.
오백호 실장이 알게 되면 박태형은 혼쭐이 날 게 뻔했다. 박태형에게 무슨 심정적인 변화와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 혼이 나 봐야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진 않았다.
일단 메시지가 온 것을 보면 신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팬들 사이에서 태형이는 요즘 뭐 하냐는 말이 있는 걸 보면 정말 집에 내려가 틀어박혀 있는 것도 분명했다.
“도욱이 네가 한번 연락해 볼래? 우리 연락은 다 소용이 없으니까……. TV쇼 스케줄 잡히면……. 백호 형이 태형이한테 연락하기 전에 태형이가 올라와야 할 텐데…….”
안형서의 말에 도욱이 낮은 한숨을 쉬며 답했다.
“네.”
“바쁜데 미안하다.”
정윤기의 말에 도욱은 고개를 저었다. 멤버들의 일이었고, 더군다나 박태형의 일이었다.
도욱이 멤버들에게 일적으로 정신적으로,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준 것도 많았지만 멤버들도 도욱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었다.
‘김보명’으로서의 목표가 아닌 강도욱으로서의 삶과 목표를 가지게 된 데에도 케이케이 멤버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케이케이를 이 자리에까지 이끈 건 도욱이었지만, 함께 따라와 준 건 멤버들이었다.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완벽하진 못했을 것이었다.
게다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깊은 의미가 있었다. 멤버들은 김보명 시절에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뜨거운 우정을 나눠 본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박태형은 그 멤버 중 하나였다.
***
<우주에서 온 연인>의 촬영은 더욱 더 바빠졌다. 마지막 회까지 촬영을 방송일보다 한 주 더 빨리 끝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오영지 작가와 작업실 사람들은 거의 눈만 뜨면 회의하고, 글을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갑작스럽게 마지막 촬영일이 당겨진 이유는 너무나 엄청난 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욱만큼이나 중국에서 인기를 올린 왕희진이 중국의 국가적 행사에 초청을 받게 된 데다 도욱도 미국 TV쇼에 출연하게 되었으니 두 주연 배우의 소속사에서 모두 촬영을 앞당겨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다행이라면 평소와 달리 오영지 작가가 시청률에 의한 신내림이라도 받은 듯 대본을 빠르게 뽑아내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잘되는 드라마는 뭘 해도 잘된다는 말이 있었는데 <우주에서 온 연인>이 그 경우였다.
도욱이 마지막 촬영 분량을 끝내던 날, 촬영장에서는 작은 파티가 있었다.
우주인이라는 설정상 ‘천민준’이 우주로 돌아가게 될 것인지, 지구에서 계속 살아갈 것인지는 매우 큰 관심사였다.
엔딩을 놓고 오영지 작가와 안철환 감독 그리고 두 주연 배우들도 의견이 분분했었다.
도욱은 사실 엔딩을 알고 있었다.
‘우주로 돌아가는…… 열린 결말…….’
그리고 이 엔딩은 사실 <우주에어 온 연인>의 오점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분노했던 엔딩이었다.
그걸 뻔히 알고 있는 도욱이었기 때문에 처음 몇 번은 오영지 작가에게 ‘그래도 남아서 계속 사랑을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넌지시 말했었다. 그러나 오영지 작가의 생각은 확고했다. 자신이 생각하며 쓴 ‘천민준’이라면 떠나는 게 맞는다는 것이었다.
배우가 캐릭터를 입체화하는 것은 맞지만, 캐릭터를 손수 빚어낸 건 작가였다.
도욱은 결과가 그리 좋지 않을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오영지 작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오영지 작가도 위험성 큰 엔딩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미 성공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공을 거둔 드라마였다. 마지막 화로 인해서 논란이 일기는 하지만 작품의 명성에 금이 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부분은 작가의 생각대로 가는 게 맞는 거겠지…….’
도욱은 같은 분야는 아니지만, 한 명의 창작자로서 오영지 작가를 존중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우주로 돌아가기 전, 여자 주인공인 한송희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이 도욱의 마지막 촬영 장면이었다.
방송에서 마지막 장면은 다른 부분이겠지만, 촬영 스케줄상 마지막 촬영 장면이 되었다.
편지를 다 쓴 후 편지를 접으며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도욱의 모습이 카메라에 클로즈업됐을 때, 컷 사인이 났어야 했지만, 컷 사인은 꽤 오래 나지 않았다.
그래 봐야 1분여였지만 꽤 긴 시간이었다. 촬영 현장은 고요해져 있었고, 도욱이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며 세트장 뒤쪽에서 훌쩍이는 여자 스태프들도 있었다. 드라마의 애청자이기도 한 그녀가 감정이입을 했던 것이다.
안철환 감독의 컷 사인과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도욱이 눈가의 눈물을 닦아 내며 인사했다. “수고했습니다”를 연신 외치며 인사하는 도욱에게 스태프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도욱 씨가 제일 수고했지! 고생 많았어!”
“감독님은 아직도 촬영 남으셨잖아요…….”
“이틀만 더 촬영하면 나도 해방이다!”
안철환 감독이 껄껄대며 웃었다.
그때 뒤편에서 여자 조연출이 케이크에 초를 꽂아 나왔다. 주변에서 보조 스태프들이 도욱을 향해 폭죽을 쏘아 올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도욱은 얼떨떨한 채 케이크를 받았다.
“그동안 저희 너무 잘 챙겨 주셔서 감사했어요. 종방연 파티 때 또 뵙겠지만……. 이렇게라도 감사한 마음 전하고 싶었어요.”
여자 조연출이 도욱에게 말했다. 케이크와 함께 전해진 건 스태프들의 롤링 페이퍼였다.
촬영장에서 도욱의 인기는 외부에서의 인기와는 또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연기도 잘하고, 드라마의 인기도 견인하고 있으니 스태프들로서는 이미 도욱이 고마운 존재였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도욱이 촬영장에서 보여 주는 매너 등은 다른 톱 배우들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도욱은 한 번도 막내 스태프에게조차 쉽게 화낸 적이 없었다. 스태프의 실수로 촬영 시간이 지연되었을 때도 도욱은 대본 외울 시간이 더 생겨서 좋다고 오히려 스태프를 위로해 주었을 정도였다.
도욱의 팬들이 보내 주는 간식과 밥차 등도 도욱의 인기에 힘을 실었다. 도욱은 스태프들이 손꼽는 같이 계속 일하고 싶은 배우였다.
“제가…….”
도욱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자신을 향해 있는 수십 명의 스태프들을 향해서 말했다.
“이 드라마가 이렇게 잘된 건 다 여러분 덕분입니다. 이렇게 케이크까지 준비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감사를 드려야 하는데…….”
도욱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제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고……. 이 드라마는 끝나 가지만 현장에서 계속 일하실 테니까…….”
도욱이 뒤쪽에 선 남다우에게 눈짓했다. 도욱도 스태프들을 위해 준비한 게 있었다.
남다우가 큰 꾸러미를 들고 스태프들 사이로 나왔다. 스태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은 선물 준비했습니다. 별건 아니지만……. 그럼 종방연 파티 때 뵙겠습니다.”
도욱이 준비한 건 두터운 롱패딩이었다. 촬영팀이라면 누구나 한 벌쯤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만, 고가여서 두 벌을 돌려 입기는 힘든 아이템이었다.
쇼핑백에 든 패딩을 본 스태프들의 입이 벌어졌다.
종방연 파티 자리에까진 참석하지 못할 막내 스태프들과 보조 출연자들을 생각해서 도욱은 일부러 오늘로 선물을 돌리는 날을 정했다.
도욱의 따듯한 마음에 스태프들은 다시금 가슴 한편이 찡해졌다. 수많은 스태프들이 도욱을 향해 입으로든 마음속으로든 축복하는 말을 전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도욱의 앞길이 더욱 찬란하길 바랐다.
***
촬영장에서 숙소로 돌아온 도욱은 옷을 갈아입었다. 최대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목도리와 모자 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배낭을 등에 멨다.
울진으로 출발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