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끝이자 시작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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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을 꽉 채운 검은 화면, 그 위로 흘러 올라가는 흰 글씨.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는 일을 보는 일은 무척이나 떨리는 일이었다.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나자 영화관의 조명이 켜지며 어두웠던 앞쪽 무대가 밝아졌다.
윤성아 감독과 박효원, 도욱이 차례대로 무대 위 쪽으로 올라섰다.
언론 시사회인지라 일반 관객과의 만남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이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기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진지했다. 무언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 표정들이었다.
부정적인 뜻은 아니었다. <푸른 고래>는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영화였다. 단순히 학교 폭력을 다루는 영화라고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그 시절을 지나갈 때에는 자신들도 몰랐던 감정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뒤늦게 돌아보면 그것이 질투였고, 열등감이었으며, 우정이라는 이름의 다양한 감정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미처 돌아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몰랐던 감정을 늦게나마 깨우치게 해주고, 알았던 이들에게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였다.
그러한 감정들은 너무나 미묘해서 어떻게 포착하느냐가 문제였는데, 윤성아 감독은 ‘폭력’이라는 조금 극단적인 장치를 이용해서 그 감정들을 폭발적으로 그려냈다.
세 사람이 마련된 간의 의자에 앉자 기자들의 질문이 시작됐다.
오늘 기자 시사회는 상영 후 자유롭게 질문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진행했다.
“씨네필 윤희윤 기자입니다. 세 분의 영화에 대한 간단한 소감 부탁드립니다.”
“제가 낳은 첫 자식인 만큼 애정이 남다릅니다. 이제부터 또 시작이지만 여러모로 제가 미흡했음에도 결과는 좋은 것 같아 흡족하기도 하고. 하지만 제가 의도하고자 했던 것들이 다 잘 전달되는지는 의문이 남습니다. 해석은 관객들의 몫이니 제 손을 떠난 것이겠죠. 무튼 같이 해준 두 배우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결과가 있다면, 그 공은 모두 두 배우 분의 것입니다.”
윤성아 감독이 평소와 다르게 구구절절 소감을 늘어놓았다.
“제가 사실 너무 떨려서······. 마이크를 잡는 것도 처음이라. 횡설수설했는데 죄송합니다.”
윤성아 감독이 덧붙인 말에 회장의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오늘을 시작으로 마이크 잡을 일이 많으시니 괜찮아지실 겁니다.”
상대적으로 무대 위가 무척이나 익숙한 도욱이 윤성아 감독을 격려했다. 동시에 영화가 잘될 것임을 시사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이는 가장 어렸지만, 가장 프로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도욱에 기자들은 감탄했다.
암묵적인 질문 순서가 있어 아직 이야기가 나오고 있진 않았지만, 영화 기자들 사이에서 도욱은 무척이나 신기한 존재였다. 취재 욕구가 불타고 있었다.
“필름2000 김강현 기자입니다. 윤성아 감독님 이번 작품이 첫 데뷔작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전체적 완성도가 생각보다 높다는 반응들입니다. 특히 미장센이 뛰어나고, 또 기존 영화들을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연출도 있다는 평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전공은 영화 쪽이었는데 광고 쪽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짧은 몇 초 안에 영상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광고 일을 하다 보니 기존 영화들과는 다른 감각이 나온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기자가 질문을 이었다.
“여성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남성들, 방황하는 소년들의 세계를 현실처럼 그려냈습니다.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하네요.”
“어······. 여성이든 남성이든 본질적으로 그 시기에 느끼는 감정들이 비슷하다고 생각했고요. 또 여기 박효원 씨가 시나리오 쓸 때부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처음부터 효원 역은 박효원 씨를 모델로 쓴 거기도 하고요.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질문이 배우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갔다.
기자들은 박효원에게 연기에 대한 소감과 영화에 대한 평가 등 기본적인 질문을 한 뒤, 상대배우였던 도욱에 대해 질문했다.
“상대가 아이돌 출신 연기자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해보셨나요?”
“당연히 안 해봤죠. 거기다 이렇게 인기 있는 스타가 예술영화를 한다고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박효원이 솔직하게 답했다. 박효원의 대화법을 잘 아는 도욱은 다른 의도 없이 정말로 ‘몰랐다’는 이야기라는 걸 알아서 그저 웃었다.
“같이 해 본 소감은 어떻습니까?”
“딱히 어디 출신 연기자라는 말은 안 붙여도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연기자고······. 또 경쟁 배우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서와 같은 질투심을 실제로도 느낀 게 사실입니다.”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도욱은 조금 놀란 눈을 했다. 박효원이 후배인 자신에게 경쟁심을 느끼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건 그만큼 도욱의 연기가 매력적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도욱에게는 첫 영화 도전에 대한 소감과 어떻게 캐스팅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학교 교수님을 통해 소개를 받았다고 간단히 답하는 도욱의 대답을 끊고 윤성아 감독이 답을 이었다.
광고판에서 일하던 시절 도욱에게 받았던 일화를 윤성아 감독이 설명했다.
윤성아 감독의 이야기에 타이핑을 치던 기자들의 손놀림은 무척이나 빨라졌다. 녹음기를 들고 있던 기자들도 뜻 깊게 듣고 있었다.
이어서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정환이 효원을 교실에서 폭행하는 씬들이 무척이나 리얼한데요. 평소 이미지와는 많이 달라서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실제로도 친구들과 주먹의 대화를 나눠본 적 있는지······.”
농담 섞인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딱히 웃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도욱은 표정 변화 없이 마이크를 고쳐 쥐었다.
“한 번도, 장난으로라도 주먹을 써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리얼리티가 살지 고민이 많았던 부분이기도 하고요. 저랑 너무 다른 역할을 맡아 본 건 처음이라······. 헤매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했는데 보시는 분들이 강도욱이 아닌 정환으로 받아들여 주신다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도욱의 말에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전문 기자들이 아닌 연예부 기자들도 자리에 와 있었는데 그들이 느끼기에 충분히 혼란이 있을 만도 한 연기였다. 그들이 아는 도욱의 성격과는 무척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 친구가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보면서 열정이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했고 그런 점들이 충분히 연기에도 진정성 있게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박효원의 말에 놀란 건 영화 전문 기자들이었다. 아직 대중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충무로에 빠삭한 사람들이면 박효원에 대해서도 대부분 잘 알았다.
현재는 연기파 배우들과 예술영화 감독들에게 더 인정받고 있는 이였다. 그런 박효원이 후배 배우를 이렇게 대놓고 칭찬하는 일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놀람과 동시에 이미 영화를 본 이들이었으므로 박효원의 말들이 모두 수긍이 갔다.
“혹시 아실지 모르겠는데 지금 인터넷이 학교 폭력 문제로 뜨겁습니다. 모 아이돌이 학교 폭력을 범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데요. 마침 푸른 고래도 학교 폭력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지 않습니까? 이 사건 관련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기자들이 모두 질문한 기자를 쳐다보았다. 개중에는 인터넷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아직 몰라 궁금한 눈길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뭐 저런 질문을’ 하는 식이었다.
누가 보아도 아이돌 그룹 멤버인 도욱에게 던지는 어그로성 질문이었다.
아직 의혹일 뿐이라는 식으로 말하면 가해자로 지목받은 아이돌과 한데 묶여 어그로를 끌릴 게 분명했고, 그렇다고 폭력은 안 된다는 식의 말을 해도 서준의 팬들에게 공격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도욱의 눈빛이 조금 매섭게 빛나다 이내 평소처럼 가라앉았다.
도욱은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서강준을 끌어내리는 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게 알려져도 상관없었다. 아니, 사실 ‘배후’라는 말도 웃긴 말이었다.
도욱이 뒤에서 무언가를 조작해 끌어내리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 서강준이 벌인 일이었고, 서강준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것이었다.
“글쎄요. 폭력이라는 것이 과연 어떨 때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걸까요. 저는 그런 경우는 어느 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위성도, 정당성도 일방적으로 가해진 폭력에는 없습니다.”
단호한 도욱의 목소리가 영화관을 울렸다.
“그런 점에서는 푸른 고래 속 정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행한 잘못은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죠.”
말에는 힘이 있다는 뜻을 사람들은 알 것도 같았다. 도욱의 낮은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치 도욱이 엄중한 심판자 같았다.
그리고 모두 옳은 말이기도 했다.
질문 시간이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다음 주 개봉하면 얼마 정도의 관객수를 예상하냐는 질문이 던져 졌다. 윤성아 감독은 현실적으로 동원 가능할 관객수를 말했다.
이어서 축하의 인사도 전해졌다.
“제주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에 이름이 올랐습니다. 축하합니다.”
윤성아 감독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감사합니다.”
도욱과 박효원도 기자이지만 관객이기도 한 이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윤성아 감독은 힛 엔터테인먼트의 새로운 투자를 기회로 제주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세계적인 영화제에 <푸른 고래>를 출품했다.
며칠 전 제주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에 이름을 올린 것을 필두로 현재는 토론토영화제 경쟁부문과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두 영화제에서도 좋은 소식이 있기를 고대하며 세 사람이 무대에서 내려오기 직전, 도욱과 윤성아 감독, 그리고 박효원에게 꽃다발을 전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윤성아 감독에게는 <푸른 고래> 제작사 사장이 직접 꽃다발을 전하며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을 전했다. 박효원에게 꽃다발을 전한 건 그의 오래된 여자친구였다.
그리고 도욱이 꽃다발을 받는 순간에는 무대 위가 꽉 들어찼다. 플래시도 가장 많이 터졌다. 케이케이 멤버들이 모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
시사회 일정을 마치고, 도욱은 멤버들과 다 함께 오랜만에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다.
각자의 개인 일정이 바빴기 때문에 이렇게 함께 밥을 먹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도욱이 영화를 찍는 동안 오케이의 2집 앨범은 성공을 거두었다. 지난 1집 앨범만큼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음악을 더 마음껏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성적도 좋았다. 음원 차트에서 역시 강세를 보였고, 앨범 판매량도 웬만한 그룹 못지 않게 팔며 케이케이의 유닛으로서의 위력을 과시했다.
석지훈의 경우 ‘캠핑 48시간’ 때문에 앞으로도 2주에 한 번씩은 자리를 비워야겠지만, 외에는 모든 개인 활동을 접었다.
앞으로 있을 해외 투어 때문이었다.
룸이 따로 있는 중국요리 전문점에 모인 멤버들과 오백호 실장, 구철민은 각자 면 요리를 시키고 또 탕수육 등 요리를 시켰다.
도욱이 쏘겠다는 말에 멤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근데 아까 그 사건 말이야. 지금 인터넷 진짜 불바다야, 불바다. 몇천 개씩 댓글 달리더라.”
“그렇더라고요. 서준 활동 가능한 건가······.”
안형서가 화제를 꺼내자 석지훈도 상황을 알고 있는 듯 끄덕였다. 오백호 실장이 스치듯 도욱을 봤다.
“하여튼 그런 놈일 줄 알았어. 나한테 태클 걸 때부터!”
안형서가 흥분하며 말했다. 새삼 이전에 태클을 걸려 다리를 다쳤던 일이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인터넷에서는 이런 저런 서준의 행동들을 까내리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풋살 경기 중 태클을 거는 서준의 모습이었다.
당시에는 잘 눈에 띄지 않아 넘어갔으나, 다시 자세히 보니 교묘하게 일부러 노린 것 같다는 의견이 많았다.
“마,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데 조용히 해라.”
그런 안형서를 말린 건 정윤기였다. 정윤기도 그 편지 내용을 보았고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쉽게 속단할 순 없는 일이었다.
도욱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한창 요리가 나오기 시작할 무렵, 도욱의 휴대폰이 울렸다.
최성준 기자였다.
조용히 룸을 나온 도욱은 복도에서 최성준 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최 기자님. 어디세요?”
답하는 최성준 기자의 목소리가 기가 막힌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