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4)
현재는 유성전자 사장이지만, 미래에는 유성전자의 회장이 될 이철호. 도욱은 경제 관련 뉴스에서나 보던 그를 직접 만나게 될 줄 몰랐다.
기획사 홍보팀의 평직원이었던 그로선 상상 못 할 일이었다.
유성전자는 국내 가전제품 및 관련 전자기기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었다. 지금도 최고지만 향후 십 년 동안에도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기업이다.
휴대폰 사업에도 일찍이 투자를 시작해 국내 휴대폰 사용자 중 70퍼센트에 달하는 사용자들이 유성전자의 제품을 사용했다.
얼마 전 밀키웨이와 몬스터를 위해 휴대폰을 지급하면서 케이케이 멤버들에게까지 휴대폰을 지급했던 곳이 유성전자였다.
살짝 금이 간 휴대폰을 받으며 도욱은 고개를 숙였다.
“아, 감사합니다.”
“저 여성분 때문에 떨어뜨린 거겠지요? 하여튼 어릴 때부터 막내에 왈가닥이라 받아줬더니······. 내 대신 사과하리다.”
이철호 사장이 뿔테안경 끄트머리를 추켜올리며 말했다. 도욱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자는 유성패션의 사장이었다. 유성패션은 유성전자 산하의 기업이었다. 루카스에게 투자금을 대주고 브랜드를 런칭하게 해준 회사이기도 했다.
유성패션의 사장 이유민은 이철호 사장의 막내 여동생이었다.
“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 런웨이에 섰었지요? 이름이······.”
“아, 소개가 늦었군요. 강도욱입니다.”
“소개는 나도 늦었소. 이철호라고 하오.”
이름만을 말했을 뿐이지만 도욱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철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단번에 자신을 알아봤다는 것을 이철호도 안 것이다.
이철호는 푸른빛이 도는 수트 차림에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뉴스로 보며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달리 조금 더 유한 느낌이었다. 아직 회장이 되기 전, 중년의 사장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시절에는 같이 있으면 제대로 말도 섞지 못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도욱은 스스로에게 놀랐다.
부드럽지만 중후한 이철호의 카리스마에 압도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무대 잘 봤어요. 그나저나 휴대폰에 금이 갔으니 어쩌나······. 이렇게 떨어뜨린다고 금이 가서야.”
이철호가 미미하게 눈을 찌푸렸다. 자신의 제품에 하자가 생긴 것을 발견하자 맘에 들지 않는 것이다. 눈을 찌푸리자 확실히 도욱이 본래 생각하던 유성전자 이철호의 매서운 느낌이 났다.
괜찮다고 도욱이 답하기 전에 이철호 사장의 곁으로 비서인 듯 보이는 인물이 다가왔다.
“사장님, 여기 계셨습니까?”
남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시간에 쫓겨보였다. 이철호 사장의 스케줄은 하루 24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놓았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인물이니 늘 어딘가 다급한 게 당연했다.
이철호 사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주요인사가 아니라 고작 어린 모델이라는 것에 남자는 조금 더 당황한 듯했다.
“윤 실장.”
“예, 말씀하십쇼.”
“여기 이 친구한테 우리 최신 제품 새 걸로 하나 보내주지.”
그러자 윤 실장은 반문 하나없이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이철호가 도욱을 향해 물었다.
“쓰던 대로 블랙? 화이트?”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만, 그렇게 해주시는 쪽이 마음이 편하시다면······.”
“잘 아는군.”
“블랙이 좋겠습니다.”
“그래, 역시 남자라면 블랙이지.”
이철호의 농담 아닌 농담에 도욱이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윤 실장이 이철호 사장에게 다음 스케줄이 밀려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럼 또 볼 수 있으면 보도록 하죠. 만나서 반가웠어요.”
도욱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이철호 사장에게 인사했다. 이철호 사장은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이철호 사장과의 만남에 대해 도욱에게 전해 들은 오백호도 얼떨떨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루카스의 패션 행사 자리에 톱 모델, 연예인은 물론이고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이 온다고 항상 행동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 건 오백호였다. 그럼에도 오백호조차 생각지 못했던 이철호와의 만남이었다.
얼마 후 도욱은 회사로 온 새 휴대폰을 오백호에게 전달받았다.
그리고 리패키지 앨범을 앞둔 어느 날, 회의실에서 이철호 사장이 말한 ‘또 볼 수 있으면’의 뜻을 깨닫게 됐다.
***
리패키지 앨범 발매 일주일 전.
앨범에 추가될 곡의 녹음은 이미 마친 상태였다. 추가될 곡의 제목은 ‘바람 부는 날’.
용수철 피디의 곡으로 바람 부는 날의 상쾌함을 표현한 미디엄 템포의 팝 댄스곡이었다. 용수철 피디의 개성은 살아있으면서도 한결 힘을 빼 듣기 편안한 곡이었다.
작사는 몬스터의 앨범으로 힛 엔터와 인연이 생긴 김숨이 참여했다.
김숨은 새 앨범 준비에 들어간 김우연의 곡의 작사, 작곡을 하고 있기도 하다며 본업인 밴드 활동보다 작곡, 작사 활동이 더 바쁜 것 같다고 미팅 때 만난 도욱에게 말을 전하기도 했다.
편안한 팝 댄스곡이었으므로 이번에도 안무의 난이도는 높지 않았다.
‘Very Sorry’로 활동하며 연습부터 진을 뺐던 멤버들이었다. 이제 이 정도 안무는 누워서 떡 먹기 수준이었다. 쉬운 안무에 연습을 덜 해도 될 것 같고, 아무래도 멤버들의 마음이 풀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안무를 지도해주고 연습실 문 밖으로 나가던 노윤태는 멤버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전했다.
“이번 무대는 올 라이브로 간다더라. 참고해라!”
노윤태는 할 말만을 전하고 사라졌다. 닫힌 문을 황망히 바라보던 멤버들이 연습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너무하다!”
안형서가 바닥에 몸을 굴리며 소리를 질렀다.
물론 이전의 무대도 라이브 무대로 소화하긴 했었다. 그러나 무대 전부는 아니었다. 선택적으로 라이브로 무대를 진행했었다.
모든 무대를 라이브로 소화하기엔 안무 난이도가 너무 높았고, 체력 소모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괜히 라이브를 했다가 무대 퀄리티를 떨어뜨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활동 기간이 짧았다. 게다가 안무 난이도도 낮으니 케이케이의 실력을 높이고, 알리는 차원에서 모든 무대를 라이브로 진행하기로 회사 차원에서 결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일주일 동안 소화해야 할 음악방송만 어림잡아 일곱 개였다. 거기에 추가 스페셜 무대도 있을 것이다. 리패키지 앨범의 활동 기간은 2주. 2주 동안 매일매일 라이브 무대라니, 생각만 해도 지쳤다.
‘그렇지만 해내고 나면 실력파라는 인식을 얻는 건 물론이고, 멤버들의 실력은 더 늘어있을 것이다.’
도욱은 새삼 실전 무대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석지훈은 연습생 때는 일 년여를 넘게 연습해도 되지 않던 춤이 데뷔 후에는 저절로 할 수 있게 됐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도욱도 동의했다. 무대 위에서의 제스처, 멤버들 간에 합을 맞춰 춤을 추는 법, 라이브 할 때의 노하우 등은 연습생으로서 배우기엔 한계가 있는 부분들이었다.
정윤기가 바닥을 구르는 안형서의 엉덩이를 발로 툭툭 찼다.
“인나라, 마.”
박태형이 조용히 연습실 한편에 엎드려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오 마이 가쉬!”
라이브 무대 연습의 시작이었다. 플랭크 자세를 취한 박태형을 보며 김원이 소리쳤다. 그러나 이내 김원도 자세를 취했다. 소속사 내 체력단련을 도맡아 하는 전문 트레이너에게 배운 자세였다.
도욱도 반주를 플레이시킨 후 자세를 잡았다. 여섯 명이 하나 되어 플랭크 자세를 한 채 ‘바람 부는 날’을 불렀다. 라이브 무대를 위한 연습이었다.
도욱은 앞으로 새벽 운동 대신 체력단련실을 찾아 러닝머신을 뛰며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두 한차례 연습으로 땀을 빼고 나왔을 때였다.
연습복 차림을 한 멤버들을 오백호가 불러 모았다. 권흥조 제작이사의 회의 소집 명령이었다.
“소고기 값 너무 많이 나와서 화나신 거 아냐?”
회의실로 줄줄이 걸어가며 안형서가 중얼댔다. 오백호와 멤버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안형서를 보았다. 안형서가 아님 말고,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얼마 전 회식 자리도 함께했다고 예전보단 권 이사가 편해진 멤버들이었다.
사실 연습생 시절에는 신인제작팀 임성안 팀장이 회사의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윗사람들을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런 멤버들에게 권흥조 제작이사는 얼굴도 보기 힘든 인물이었다.
대회의실로 들어서자 회의실에는 앨범제작팀 심준 팀장은 물론이고, 팬마케팅 조애나 팀장, 용수철 피디와 케이케이 관련 담당 직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회의에 멤버들은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서 들어와요.”
오늘 회의는 케이케이 리패키지 앨범을 앞두고 성사된 유성전자와의 계약 체결을 모두에게 공지하고, 멤버들에게도 사실을 전하는 자리였다.
멤버들이 자리를 잡고 회의실 분위기가 다시 정리되자 권 이사가 말을 이었다.
“이번 ‘바람 부는 날’은 사실 유성전자의 핸드폰 시리즈인 아폴론의 새 모델에 들어갈 샘플곡으로 준비한 곡이기도 합니다.”
아직 계약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팀장급과 용수철 피디 정도와만 공유됐었던 사실이었다.
유성전자 마케팅 팀에서는 최근 여러 버전의 스마트폰을 출시하면서 한국 시장 진출을 노리는 외국 기업에 맞서 공격적이고 다양한 마케팅을 구사했다.
그중 음악을 이용한 마케팅 프로젝트를 가장 활발하게 진행 중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CD, MP3 플레이어 같은 제품들이 사라지고 있긴 하지. 앞으로는 더욱 그럴 테고······.’
도욱은 설명을 들으며 생각했다.
음악을 이용한 프로젝트 중 하나가 휴대폰에 음질 확인 등을 위해 기본 음악으로 유명 가수의 노래를 넣는 것이었다. 그러나 음원료 지불 등의 문제로 가수 선정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홍보 효과가 큰 가수일수록 거액의 마케팅 비용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가수를 찾던 중 예상 홍보 효과 대비 지출비가 적정 수준이었던 가수가 케이케이였다.
힛 엔터 측에서는 유성전자의 제안을 쌍수를 들고 반겼다.
사실 유성전자의 해당 프로젝트는 그만큼 스마트폰인 아폴론이 음악을 듣기에도 좋은 기기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새기는 것이 홍보의 주된 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든 유성전자 아폴론 시리즈 모델에 노래가 실리게 되면 더 큰 홍보효과를 보는 것은 오히려 케이케이가 될 게 분명했다. 때문에 힛 엔터 측에서는 음원료 등의 문제에서 까다롭게 굴지 않고 계약을 성사시켰다.
계약 성사에는 힛 엔터 이사진들의 컨펌을 받고 계약을 밀어붙인 팬마케팅팀 조애나 팀장의 공이 컸다.
과정과 결과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을 들으며 도욱은 실무진 및 경영진에 판단 능력에 감탄했다.
‘힛 엔터테인먼트가 작은 회사였지만, 꾸준히 잘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케이케이 멤버들은 자신들이 쓰고 있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이다음에 나오게 될 모든 핸드폰에 자신들의 노래가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유성전자 측에서 프로젝트 하나를 더 진행하고 있는데······.”
권 이사가 입을 뗐다.
“각 분야의 예술인들을 모아서 광고를 찍는다고 하네요. 그들이 직접 만든 예술 작품을 토대로 말이죠.”
도욱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 광고인가···?!’
도욱은 한때 커다란 인기를 끌었던 아폴론의 광고를 기억해냈다.
온갖 패러디가 속출할 만큼 인기가 있었던 바로 그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