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오버헤드 캐스팅 (1)
#오버헤드 캐스팅 (1)
간식으로 사 온 건강 음료를 나눠주며 오백호는 멤버들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고지했다.
“음······. 내일은 음악 방송 끝나고, 잡지사 인터뷰가 하나 더 잡혔어. 간단한 인터뷰니까 따로 준비할 건 없지만 다들 말조심하고.”
음악 방송 이후에 또 스케줄이 있다는 얘기에 멤버들은 오백호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데뷔를 하기 전에는 소속사 선배 가수인 몬스터 멤버들이 왜 음악 방송만 하나 하고 와도 널브러져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방송에 나가는 건 3분에서 길어야 4분.
‘하루에 무대 한 번 했다고 저렇게 힘들어 하는 건가?’ 하는 순진한 생각들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3분을 위해 새벽 네 시부터 일어나 준비를 하고, 저녁까지 애를 쓰는 것이다. 내내 무대 위에서 격렬하게 노래하고 춤을 추는 거 아니지만, 여러 번에 걸친 리허설과 긴 대기 시간 등이 출연진을 지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상황 봐서 정하겠지만 1위에서 내려오면 바로 후속곡 준비하러 들어갈 거고, 2주 안에 다시 음악 방송 나갈 거다.”
멤버들은 병뚜껑을 따기도 전에 전달받은 일정 때문에 손에 힘이 빠졌다. 내일도 빡빡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앞으로는 더 빡빡한 일정이었다.
“열심히 할 거지?”
“네!”
그러나 곧 오백호의 물음에 전원이 큰 소리로 ‘네’ 하고 합창을 했다. 다들 바쁜 스케줄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알았다. 지방 공연이나 행사는 아직 시작도 안 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바쁘다는 것이 인기의 척도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다시 가서 연습해라.”
그렇게 각자의 위치로 가 연습을 하고 있던 때.
연습실 문이 활짝 열렸다.
투피스 정장을 차려 입고 7센티미터 굽의 빨간 하이힐을 신은 여성이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울리며 연습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맞춰 정신없이 연습을 하던 멤버들이 거울에 비친 여성을 보고는 모두가 움직임을 일시에 멈췄다.
“···조 팀장님?!”
여자를 알아본 건 오백호 실장뿐이었다.
오백호가 얼른 여자의 곁으로 달려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신인개발팀 임성안 팀장이나 앨범제작팀 석준 팀장을 대할 때도 오백호가 깍듯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이만큼은 아니었다. 분위기가 달랐다.
오백호의 깍듯하다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듯한 분위기에 케이케이 멤버들 역시 덩달아 긴장했다.
사실 오백호가 그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겉모습에서 풍겨지는 포스에 멤버들은 이미 잔뜩 얼어 있는 상태였다.
다들 누군지도 모르고 오백호가 팀장님이라고 하니 인사부터 했다.
“조 팀장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여기 멤버한테 볼 일 있으니까 왔겠죠?”
조 팀장은 팬-마케팅 팀의 팀장이었다.
원래는 회사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전략기획팀에서 팀장으로 일했다. 그러다 배우나 가수를 매니지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할 부분은 팬-마케팅이라는 생각으로 직접 인사이동 신청해 팀을 옮겼다.
임성안 팀장 뺨치게 일을 잘하는 것은 물론이고, 포스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물론 그 어마어마한 포스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덕분이라는 평도 많았다. 조 팀장은 힛 엔터의 대주주 중 한 명의 무남독녀였다.
“저희 멤버 애들이 뭐 잘못이라도.”
“소개부터 해주시죠.”
“아, 네. 제가 소개를 깜박했네요. 얘들아, 여기는 마케팅팀 팀장님이신······.”
“조애나예요. 조는 풍양 조. 애나는 영어. 헷갈리지 마시고.”
오백호의 소개를 치고 들어온 조 팀장의 인사에 모두 멍하니 입이 벌어져선 고개만 끄덕였다.
조애나. 강렬한 소개였다.
와중에 외국에서 살다와 한국어로 분위기 파악이 조금 느리고, 호기심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김원이 물었다.
“한국 이름은요?”
조애나가 기다란 인조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그건 나중에.”
안형서가 더 뭔가 말하려고 하는 김원의 옆구리를 찔렀다.
또각. 또각. 조애나가 발을 옮겨 맨 끝에 선 도욱의 앞에 섰다. 다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네가 강도욱?”
안 그래도 보통 여자보다 키가 큰 데다 하이힐까지 신어 조애나의 키는 도욱과 엇비슷했다. 조애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도욱을 꼼꼼히 살폈다.
‘조애나······. 원래는 이 자리에 있었던 거군.’
도욱은 조애나의 날카로운 살핌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시선을 마주했다.
오백호가 부장이 되었을 때쯤, 조애나는 힛 엔터테인먼트의 대표가 되어 있었다.
지금 부사장이 사장직을 이어받고 몇 년 안 되어 힛 엔터는 한 번 정도 큰 위기를 맞이한다. 케이케이의 부진으로 인한 수입 부재도 그 위기 중에 하나였다. 그때 힛 엔터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게 조애나였다.
‘엔터테인먼트 업계 최초 여자 대표라는 타이틀은 아무나 갖는 게 아니다. 집안이 좋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맥을 못 추던 힛 엔터를 세울 만큼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
성공 CEO 사례로 자주 등장하는 여인이었다.
‘그런 조애나를 이렇게 만나는구나. 미래의 대표······. 오백호 실장과의 관계가 향후 일이 년에 있어 중요하다면, 조애나와의 관계는 ‘십년대계’다.’
도욱의 눈빛을 마주한 조애나가 입꼬리를 한쪽만 올리며 비웃었다.
“아주 눈에 독기가 있네?”
도욱은 답하지 않았다. 독기. 천성이 순하게 태어나 당하고만 살았던 김보명의 인생에선 가져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던 말이었다.
누군가를 해치겠다는 악랄한 마음까진 아니지만, 누군가를 이겨보겠다는, 그리고 최고가 되겠다는 굳은 결심이 매 순간마다 들끓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건 ‘독기’라 불릴 만했다.
멤버들은 그저 당황스러워했고, 오백호는 조애나 팀장이 한 말의 저의를 파악하려 애썼다.
함께 숙소 생활을 하며 정이 든 탓도 있겠지만, 오백호는 진심으로 도욱이 잘되길 바랐다. 성실하고 스타성을 모두 갖춘 재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오백호도 조애나가 말하는 ‘독기’가 무엇인지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오백호가 높게 평가하는 도욱의 성실함도 거기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잘하겠다는 의지와 욕망. 중요한 것은 조애나가 단번에 파악한 도욱의 그러한 모습이 맘에 들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조애나 팀장 같은 사람에게 밉보여서 좋을 일이 하나 없었다.
조 팀장의 배경을 다 차치하고서라도, 팬-마케팅팀에서 제작 및 배포하는 컨텐츠는 케이케이 내외부에서의 인기를 좌지우지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팀의 팀장이었다. 앞으로 누구를 중심으로 팬을 모을지는 조 팀장에게 달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며.”
“네? 아, 네. 심 팀장님 통해서.”
도욱은 곧바로 팬-마케팅 팀 팀장인 조애니가 왜 찾아왔는지 이해했다.
“그래. 해 봐.”
조애나 팀장은 얼마 전 심준 팀장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케이케이 멤버 중 하나인 도욱이 직접 팬들이 사용할 응원 도구 관련해서 할 말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무대나 잘하지 별걸 다 신경 쓴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사실 그 ‘별걸’ 신경 쓰는 아이돌 멤버는 흔치 않았기 때문에 호기심이 생긴 게 사실이었다.
때문에 팬-마케팅팀 직원 중 하나를 보내려다 조애나 팀장은 직접 얘기를 들어보러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제가 드리려던 말씀은··· 팬들을 위해 특별한 응원 도구를 제작하고 싶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 그건 들었어. 구체적으로?”
“색깔만 다르고 다른 그룹과 똑같은 것 말고요. 야광봉 모양에 케이 모양을 형상화한다든지, 저희 로고를 딴다든지. 케이케이만의 무언가가 있어야겠죠.”
옆에서 함께 선 멤버들은 조애나의 기세에도 눌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도욱에게 다시금 감탄했다. 또 저런 생각들은 언제 하고 있었는가 싶어서 또 놀랐다.
“···고급스러울수록 좋을 것 같고요.”
“네가 낼 거야? 제작비?”
도욱은 잠시 말을 골랐다. 조애나를 향한 공격적인 어필이 어디까지가 적당한 선인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맞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면, 조금이라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게 도욱이 회사를 다니는 동안 여러 상사와 동료들을 겪으면서 터득한 나름의 노하우였다. 노하우를 써먹을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확신은 가지고 있었다.
“전 아이디어를 낸 것뿐입니다. 수익을 어떻게 낼지는 고민해봐야겠죠.”
“제법이네. 아직 새파랗게 어린데.”
“또 다른 의견도 드려도 됩니까?”
도욱의 말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멤버들과 오 실장의 얼굴이 굳었다. 조애나 팀장의 표정도 좋지만은 않아서 더욱 그랬다.
좋은 아이디어였지만, 오백호로선 도욱이 조애나 팀장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가수가 아니라 직원이 하고 싶은 거야? 뭔데, 말해봐.”
“팬 카페 말고도······ 다른 창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소통? 말은 좋지.”
조애나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답했다.
그러나 도욱에게는 팬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는 형태의 그룹이 되어야 할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맨투맨은 현재 신비주의 컨셉을 유지 중이었다. 똑같은 신비주의 컨셉으로는 대형 기획사에서 나온 데다 먼저 데뷔한 맨투맨을 이기기 힘들었다.
도욱은 케이케이만의 강점을 살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현재로선 멤버들 모두 인성적으로 흠잡을 데 없었고, 각자의 끼도 있었다. 그것들을 모두 보여주기에 방송은 너무 한정적이었다.
그 이상의 공실제로 방송 이후, 도욱의 인터뷰는 인터넷상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도욱은 빠르게 인터넷에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간이 있다면, 케이케이의 인기를 높이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강도욱, 자네 의견은!”
조애나 팀장이 도욱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때 다시 한 번 연습실 문이 열리며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이번엔 앨범제작팀 심준 팀장과 댄스 선생이었다.
“다들 여기 모여 있다고 해서 왔지! 애나 팀장님, 오랜만이야!”
시끌벅적하게 등장한 심준의 옆구리에는 노트북이 끼워져 있었다.
조애나 팀장의 뒷말을 듣지 못해 다행이라고 연습실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누가 봐도 도욱에게 크게 한 소리 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었다.
“후속곡 안무가 나와서 보여주려고 왔지!······ 근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무겁네?”
“아닙니다. 심 팀장님. 후속곡 안무라니 무척 궁금하네요!”
심준 팀장이 눈치를 보자, 오백호가 얼른 노트북을 받아들며 답했다. 차라리 빨리 안무를 확인하고 분위기를 전환하는 게 좋을 거란 생각이었다.
그렇게 노트북이 켜지고, 모두 모여 댄스팀이 녹화한 후속곡 안무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모두가 안무 영상에 집중한 사이, 조애나가 도욱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도욱, 이따 혼자 팀장실로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