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준비된 인재 (2)
#준비된 인재 (2)
“작곡이요?”
“네.”
김숨이 버릇처럼 땋아진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밴드의 앨범을 낼 돈을 모으기 위해 키보드 레슨을 하고 있었다. 밴드에서 작곡도 담당하고 있으므로 가르치려면 가르칠 수는 있었지만, 아직 그 정도 실력은 아니라는 게 김숨 스스로의 평가였다.
“작곡도 배우고 싶은 거예요? 저는 누굴 가르칠 실력은 아니라. 알아보면 다른 좋은 선생님 많을 거예요.”
“저는 선생님께 배우고 싶은데요.”
확고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였다. 김숨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김숨은 의아했다. 자신이 작곡으로 유명한 것도 아니고, 길 가다 간판 보고 들어왔다는 학생이 담당도 아닌 작곡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 갑작스러운 게 당연했다.
보명도 김숨의 당황을 눈치챘다. 보명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레인보우 밴드 키보드 치시는 분··· 맞으시죠?”
“세상에, 레인보우를 알아요?”
“네. 제가 좋아하는데 여기서 뵙네요. 레인보우 곡들 쓰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아요!”
대번에 김숨의 당황스러움이 반가움으로 바뀌며 얼굴이 붉어졌다.
“레인보우 노래들 다 좋아하는데. 어떻게 배울 수 없을까요?”
“어린 학생이 우리 노래를 알다니 신기하네요. 음악에 정말 관심이 많은가 봐요!”
사실 보명이 좋아하는 건 김숨의 발라드 곡들이지 인디밴드 레인보우 앨범의 수록곡들은 아니었다.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김숨이 작곡한 발라드 곡들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시점. 레인보우의 곡들을 좋아한다고 설명하는 게 가장 설득력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옳은 판단이었다.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레인보우의 노래를 고등학생이 좋아한다고 해오니 김숨은 들뜬 기분이 됐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지막지하게 호감형 외모인 데다 심지어 요즘 고등학생 같지 않고 예의가 발랐다. 업무 미팅을 나왔다고 해도 손색없을 어투였다.
과연 잘 가르칠 수 있을지 고민이 되면서도, 한번 해보고자 하는 의욕이 김숨에게 생겨났다.
“피아노는 배운 적 있어요?”
“예. 그런데 어릴 때 배웠던 거라 손가락이 다 굳었어요.”
중학교 1학년 때까진 피아노 학원을 다녔었다. 어려운 형편에 보명이 꿈을 위해 다닌 유일한 학원이었다. 보명의 몸이라면 지금이라도 피아노를 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지금 몸은 강도욱이었다. 머리로는 기억하지만, 몸으로는 익힌 적 없는 상태.
‘과연 강도욱의 손으로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김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악보는 볼 줄 알겠네요. 코드는 얼마 정도 알아요? 작곡하려면 코드 정도는 알아야 해서요.”
“네. 코드는 다 압니다.”
“다행이네요!”
그때 학원 문이 열리며 30대 초반의 남자가 들어왔다. 더벅머리를 한, 셔츠 카라 깃을 세운 촌스러운 차림새의 남자.
‘김우연이다!’
보명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큐 엔터를 다닐 때 회사 복도에서 한두 번 마주쳐 본 게 다인 김우연이다. 김우연의 과거 모습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긴, 상상할 수 있었던 일은 어제부터 아무것도 없지.’
김우연이 들어오자 김숨이 얼른 우연에게 보명을 소개했다.
“여기, 보컬 레슨 받고 싶어서 온 학생이에요.”
“아, 그래?”
심드렁한 얼굴로 김우연이 보명을 위아래로 훑었다.
“잘생겼네. 노래는 배워서 뭐하게요? 여자 꼬시게?”
“예?”
“아님 가수?”
“가수요.”
“그래. 개나 소나 가수되겠다고 덤비는데 어리다고 못 덤빌 것도 없지.”
이게 첫인상이라면 김우연은 시니컬하다 못해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 보명은 잠시 멍해졌다. 1집 앨범 이후 실의에 빠져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복도에서 만나면 말단 직원인 보명의 인사도 꼬박꼬박 잘 받아주던 김우연을 생각하면 더욱 충격이었다.
“어휴, 일단 자리에 앉아요. 앉아서 얘기 나누세요.”
김숨이 보명과 김우연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의자를 끌어당겼다.
“한 달 뒤에 기획사 오디션이 있어요.”
김우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보명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뭐? 한 달 뒤? 한 달 만에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건 아니지?”
당연하게도 김우연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네. 아닙니다. 기초부터 제대로 배우고 싶어요. 만약 그 오디션에 붙게 되더라도 기획사와는 상관없이 선생님께 계속, 끝까지 배울 생각입니다.”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보명의 시선에 김우연의 표정이 묘해졌다. 반반하게 생겨 어디서 연예인하라는 소리나 듣고 만만한 가수를 하겠다고 나선 것 같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했다. 그런 애들은 가수를 하면서도, 보컬 트레이너를 하면서도 발에 채일 만큼 많이 봤다. 자신이 보아왔던 어중이떠중이들과 눈앞의 소년은 뭔가 달랐다.
“언제 봤다고 선생님이야? 누가 네 선생한대?”
원장이 봤다면 제 발로 찾아온 수강생을 두고 기가 막힐 태도였다. 김우연은 마치 이런 태도여도 자신에게 수업을 받을 것이냐는 듯 보명도 모를 시험을 하고 있었다.
물론이었다. 성격이 어떻든 김우연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보컬리스트였다. 유명하지 않은 지금에도 김우연보다 더 좋은 보컬 선생이 있을 거라 보명은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 학원 아닙니까? 사람들 가르쳐주는 곳이요. 학원에 고용된 강사시고요.”
잘라 말하는 보명에 김우연이 헛웃음을 지었다. 뭐라고 해도 기가 안 죽는다. 겉보기에도 그렇지만,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좋아. 그럼 불러봐.”
“예?”
“기본 실력을 알아야 가르칠 거 아냐. 노래 불러보라고!”
당당했던 직전까지의 태도와 달리 보명이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럼 레슨이 끝났는지 드럼 담당 강사와 수강생이 연습실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아랑곳 않고 김우연이 보명을 재촉했다.
기본 실력 체크야 당연한 것이지만, 수강 등록을 하기도 전이었다. 게다가 연습실도 아니라 학원 복도. 김숨까지 하면 보는 눈만 넷이었다.
보명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이 입으로 불러봐서 알았다. 얼마나 노래 실력이 엉망인지 말이다. 비웃음을 당할 게 분명했다. 보명은 과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누군가에게 비웃음 당하는 일에 극도의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성격이 됐었다.
“안 불러? 보릿자루야?”
“···부릅니다.”
꾹 눈을 감았다 뜬 보명이 노래를 시작했다.
김우연의 1집 타이틀 ‘꿈이었으면’이었다.
.
.
“됐어. 그만.”
보명이 후렴구를 세 소절 쯤 불렀을 때. 김우연이 노래를 멈추게 했다. 보명은 곧바로 노래를 하느라 벌어져 있던 입을 합하고 다물었다.
“음.”
괴로움에서 나오는 신음 같은 것이 김우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 노래를······.”
김우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신의 노래를 알고 있다는 놀라움보단 이 노래를 이렇게 형편없이 부르다니, 하는 짜증이 섞여있는 말투였다.
보명은 바짝 얼어 김우연의 혹평을 기다렸다. 보명의 내면은 바짝 얼어있을지언정, 강도욱 외면은 특유의 무감각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업은 내일부터.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씩. 보통 그게 내 커리큘럼인데. 넌 세 번은 와야되겠네. 시키는 과제 안 해오면, 사람 고막에 유해하지 않은 수준까지 가는 데 십 년은 더 걸릴 거야. 잘해 와도 일 년?”
막힘없이 쏟아내는 김우연에 보명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노래할 거면 때려치우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보명은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을 차례대로 살폈다. 보명을 비웃고 있거나, 우스운 노래 실력에 웃음기를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보명의 노래는 좋게 말해도 분명 잘한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 진짜 가수가 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다. 김우연을 비롯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그 열정을 눈치챌 만큼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모두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배우는’ 것이다.
“예의 없게 고개만 까딱?”
“아, 아닙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는 보명에 김우연은 피식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진 웃음을 뱉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우연은 자신이 무리하게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노래를 시켰음에도 보명이 노래를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보명에게 자신만의 합격을 준 상태였다. 보명의 진지한 노래를 듣자니 잃었던 자신의 노래에 대한 열정까지 되살아나는 듯했다.
게다가 음정이나 박자 등은 타고난 센스가 부족할 지경으로 들렸지만, 음색이 좋았다. 취향을 타지 않을, 누가 들어도 좋을 중저음의 보이스였다. 다듬으면 보석같이 빛날 숨겨진 특색도 있었다.
기본기를 다지고, 센스를 키우는 일이 가히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뒤이어 김숨이 나서 작곡 수업 스케줄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동시에 배우는 것이 힘들지 않겠냐 김숨이 물어왔으나 보명은 고개를 저었다.
힘들어도 해야 했고, 해낼 것이다.
“아직 이름도 제대로 안 물어 봤네요. 이름이··· 강도욱?”
목에 건 이름표를 보고 김숨이 물었다. 보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강도욱입니다.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김숨과 김우연을 향해 인사했다. 이제, 정말로 강도욱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
“야, 도욱! 일어나!”
엎드려 자고 있던 도욱이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도욱의 어깨를 흔들어 깨운 건 윤진성이었다.
“점심시간이야, 인마. 원래도 맨날 잠만 잤지만, 요즘 너무 심한 거 아니냐?”
“하암······.”
도욱이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입을 가릴 생각도 않고 하품을 늘어지게 하니 추해보여야 하는 게 당연한데 기다란 팔을 쭉 뻗는 모습이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괜히 여자애들이 강도욱 좋다고 꺅꺅대는 게 아니었다. 친한 친구이지만 이럴 때면 재수가 없어서 윤진성은 더 크게 혀를 찼다.
“얼른~! 급식실 줄 길어져.”
“알았어. 어··· 윽.”
자리에서 일어나던 도욱이 배를 부여잡고 찡그렸다.
“아, 배 아파.”
어제도 김우연에게 혹독한 보컬 레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소리 내는 법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며 김우연은 도욱이 숨 쉬는 것부터 서고 앉는 자세 하나하나까지 관리했다.
노래할 때 배로 소리를 내야 한다며 김우연은 도욱이 목으로 음을 내려 할 때마다 가차 없이 도욱의 복부에 힘을 가했다. 쓰지 않던 복부 쪽 근육을 사용하게 되면서 레슨이 끝나면 배가 당기고 아팠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러워져 아프지 않을 거라 김숨이 이야기해주어서 다행이었다.
레슨이 있는 날만 연습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도욱은 매일 시간을 쪼개 보컬 실력 향상과 작곡 실력을 쌓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더뎠던 발전 속도도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급식실로 향하는 복도 계단을 내려가며 윤진성이 물었다.
“너 맨날 뭐하는데 학교 끝나면 사라져 버리고 그러냐?”
“나?”
“그래. 술 마시러 가자고 해도 안 가고, 게임도 안 하고. 여자 생김?”
“여자는 무슨.”
“여자 생겼는데 말 안 한 거면 배신감 오진다, 진짜.”
“아니라니까.”
도욱은 진성 쪽을 한번 보고는 역시 자신이 오디션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게 맞지 싶어졌다. 조금 가벼워 보여서 그렇지 역시 윤진성은 강도욱의 좋은 친구였다.
“너 요즘 분위기가 달라졌어. 진지 빠는 것 같아.”
진성이 오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도욱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원래의 도욱은 의욕 없이 뭐든 설렁설렁 대충하는 느낌이었다. 잘생긴 외모 덕에 그런 것조차 멋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얘기를 조금만 나눠 봐도 쉽게 도욱이 노는 것에만 관심 있는 날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엔 똑같이 수업 시간엔 잠만 자면서 학교를 다니는 데도, 뭔가가 달랐다.
가끔 뱉는 한 마디가 놀라울 만큼 무게가 있었다. 진중하고 성숙한 분위기가 도욱을 더욱 멋있게 만들었다. 원래도 도욱을 좋아하던 여자애들은 더 난리였다.
어른스럽다. 그 말의 뜻을 진성은 최근의 도욱을 보며 생각했다.
“윤진성, 나 사실 내일 오디션···.”
그때 복도 끝에서 3학년 선배 하나가 험상 궂은 표정을 지으며 도욱에게 다가왔다.
“거기, 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