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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1% (1)
#눈 떠 보니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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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하기만 한 의식 속에서 보명은 깨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왜 또 이렇게까지 깨어나고 싶은지, 살아남고 싶은지 알 수 없지만, 하루아침에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하고 싶진 않았다. 견뎌온 지난날이 억울했다.
움찔,
애를 쓴 끝에 가까스로 손가락 한 마디를 움직였다. 잔 떨림이었지만, 어쨌든 보명은 아직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다음은 조금 더 수월했다. 둔하게 움직이는 손가락들을 하나씩 접었다 펴길 여러 번.
‘이상해······! 무언가 잘못됐다!’
생소한 감각, 불길한 기운이 보명을 엄습해왔다. 어서 눈을 떠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움직이고 있는 손이, 자신의 손이 아닌 것만 같았다.
번쩍! 가까스로 두 눈을 떴다.
갑작스럽게 두 눈을 찌르고 들어오는 빛에 보명은 눈이 시렸다. 커튼을 친 방 안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보명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눈을 비비던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역시나. 뭉툭하고 거칠었던 원래의 보명의 손과는 달리 너무 희고 고운 손이었다. 심지어 작기까지 했다.
‘뭐, 뭐지?’
보명은 얼른 주위를 살폈다. 병원 침대 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명이 있는 곳은 병원이 아닌 가정집의 방 안이었다. 학생이 쓰던 방인지 맞은편에는 책상이 놓여 있고, 방 벽에는 여자 아이돌 그룹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밀키웨이? 도대체 언제 적···.’
벌컥. 방문이 열리며 40대 초반의 여인이 들어왔다.
“도욱아! 얘가 왜 이렇게 못 일어나. 얼른 일어나라니까! 너 그러다 지각해.”
마치 갓 만들어진 구형 로봇처럼 굳은 채 보명은 천천히 여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어나 있었네? 일어났으면 답을 해야지, 얘가. 얼른 씻고 학교 갈 준비해!”
넋이 나간 보명의 표정을 잠이 덜 깨 그런 것으로 치부하며 여인이 소리 질렀다. 얼른 잠 깨라며 여인이 보명의 등짝을 퍽, 소리 나게 후려쳤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아팠다.
“윽.”
“얼른 깨고 나와!”
여인이 나간 뒤에도 보명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죽어서 사후세계에 왔다고 하기엔 너무 현실세계와 전혀 다름이 없는 환경이었다.
‘트루먼 쇼 같은 건가?’
아니, 그냥 꿈속이라고 하는 게 가장 설득력 있었다. 그러나 모든 감각이 너무나 선명했다.
보명은 떨리는 발걸음으로 벽에 붙어 있는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키는 현실의 자신과 비슷했다. 173센티미터 정도. 그러나 키 외엔 모든 것이 달랐다. 앳되지만 눈이 크게 뜨일 만큼 잘생긴 얼굴도, 벌어진 어깨도, 단단한 체형도 모두 보명의 것이 아니었다.
‘이, 이럴 수가. 이건······.’
보명은 거울 속으로 들어갈 듯 바짝 붙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더듬거렸다. 생소하지만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한 얼굴이다.
‘도대체 이 얼굴을 어디서 봤을까?!’
생각도 잠시였다. 이내 누구의 얼굴이었는지 떠올랐다. 이건 강도욱의 얼굴이었다. 얼떨결에 들은 이름이지만 여인도 이 몸을 향해 도욱이라 했었던 것 같다.
보명은 정신없이 방 안을 돌아다녔다. 책상 위에 늘어진 교과서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이름을 확인했다. 강도욱. 강도욱이 맞았다. 의자에 걸쳐진 목에 거는 학생증에도 적혀 있는 이름이었다.
<청단고 2학년 8반. 강도욱.>
침대 옆 협탁에 구식 폴더폰이 놓여 있었다. 얼른 폴더폰을 열어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9월 13일. 날짜는 같았으나 연도가 달랐다. 정확히 15년을 거슬러 올라와 있었다.
이럴 수가! 보명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보명은 지금 강도욱이 열일곱이던 시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시금 거울 앞에 서 숨을 골랐다. 침착하자, 속삭이며 자신을 타일렀다.
강도욱은 아이돌 그룹 케이케이의 멤버였다. 서강준이 속해 있던 그룹 맨투맨에 밀려 2등 그룹으로 남았지만, 그래도 잠깐 동안은 꽤 인기가 있었던 그룹이었다.
맨투맨과 같은 시기 활동한 케이케이를 보명은 응원하기도 했었다. 두 그룹이 함께 1위 후보에 오르면 케이케이에게 문자투표를 했었다. 그렇게라도 누군가 서강준을 이기길 바랐었던 과거의 보명이 있다.
아무도 서강준을, 서강준이 속한 그룹을 이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더구나 케이케이는 연이은 멤버들의 사건, 사고로 인해 4년 만에 흐지부지 활동을 접고 사라졌었다.
‘그런데 내가 왜 강도욱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7명의 멤버로 이루어진 케이케이 안에서 강도욱은 인기 3, 4등을 오가던 평범한 멤버였다. 잘생긴 얼굴로 시선을 끌긴 했지만, 외모만으로 큰 인기를 끌기엔 능력이 부족하고 키가 작은 게 흠이었다. 노래도 가수로서 내놓을 수준은 아니었고, 크게 끼가 있는 타입도 아니라 얼굴 외엔 어필하지 못하던 멤버였다.
이쪽에 관심이 있었던 보명이 아니라면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는 정도의 유명세였다.
벌컥, 다시 한 번 방문이 열리며 여인이 들어왔다.
“빨리 안 나오고 거울 앞에서 뭐하니?”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상황상 저 여인은 분명 강도욱의 모친일 것이다. 보명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어··· 엄마?”
“왜 불러. 밥 해놨으니까 얼른 먹어. 엄마는 출근한다.”
“······네.”
“네에? 얘가 갑자기 웬 존댓말이야? 잠 덜깼니?”
“어, 어, 얼른 출근해!”
“그래. 꼭 밥 챙겨먹고 가라.”
“으응.”
우물쭈물하는 보명, 아니 도욱을 조금 수상한 눈으로 쳐다보곤 여인은 잰걸음으로 출근을 서둘렀다.
부엌으로 나가 차려진 밥상 위의 밥을 먹으며, 보명은 강도욱의 신상 정보를 기억하려 애썼다.
강도욱이 나왔던 토크쇼를 본 적 있었다. 강도욱이 외동이라는 것과 교수 부부 아래서 부유하게 자랐다는 것, 아이돌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받았다는 것 정도가 기억이 났다.
방송을 보면 별말 없이 늘상 여유로운 태도였던 것 같다. 별로 다 아쉽지 않다는 듯이.
보명은 씻고 등교를 위해 교복을 챙겨 입었다. 벌써 십 년도 더 전에 입어보고 입지 않았던 교복이었다. 심지어 남의 학교 교복이라니.
그러고 보니 이 집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나가서 청단고를 찾을 수 있을지도 확신하기 힘들었다.
“후······.”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이후에는 활동도 뜸한 이름만 연예인인 존재가 된다지만, 강도욱은 단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나 사랑, 관심 같은 것을 받아본 적 없이 살아온 김보명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산 이였다.
데뷔 전의 삶조차도 보명과 달랐다. 당장 이 방이나 집만 해도, 보명은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넓고 쾌적한 공간이었다.
사고로 시공간이 뒤틀리기라도 한 건지, 영혼이 뒤바뀐 것인지.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었다. 다만 보명은 지금 강도욱이 되었다.
하필이면 서강준의 맨투맨이 활동하던 시기에 함께 나왔던 케이케이의 멤버 강도욱.
‘그래. 하필이면 말이지.’
보명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이건 기회일지도 몰랐다. 아니, 기회였다.
삼십삼 년의 인생 동안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던 기회가 한 번에 몰아서 온 것일지 몰랐다. 그래 이건 천운이었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볼 천운!
***
다행이 집 근처에 청단고로 가는 버스가 있는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버스에 올라 바지 주머니에 있는 지갑의 카드로 버스비를 냈을 땐 남의 돈을 맘대로 쓰는 듯한 찝찝함을 지우기 힘들었다.
어쨌든 학교에 도착해 어찌어찌 2학년 8반 교실로 찾아갔다. 가는 동안 몇 학생들이 인사를 해와 눈치껏 인사를 받아줘야만 했다. 아무리 어린 학생들이라지만 생판 모르는 이에게 반말을 하며 인사를 해야 하다니 어색했다.
교실로 들어가자 키가 180은 돼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학생이 어깨동무를 해왔다. 보명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며 손짓을 피할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여어, 강도욱. 웬일로 일찍 왔네?”
교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보명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라기엔 등교시간인 8시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시각이었다. 평소 강도욱의 학교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제 넘 달려서 1교시는 끝나야 기어 나올 줄 알았더니.”
“···달려?”
“두 병은 달린 것도 아니라는 거냐? 새끼.”
‘······지금 고등학교 2학년 아닌가?’
확실히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놀다니. 보명의 학창시절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보명을 괴롭혔던 중학생 시절의 서강준 무리를 생각하면 놀랍지도 않은 일이지만. 혹시 강도욱도 그런 일진이었던 건가? 보명은 순간적으로 메스꺼움을 느꼈다.
‘아니야. 아직 모른다. 내가 몰랐던 것일 수도 있지만, 강도욱은 일진 논란 같은 것도 한 번 없었어.’
보명은 물끄러미 낄낄대는 상대의 이름표를 확인했다. 윤진성. 강도욱의 가까운 친구로 보였다.
보명의 초등학교 친구들은 중학교에 올라와 흩어졌고, 중학교 때는 왕따였으니 보명에게 친구라는 존재는 요원했다. 왕따와 함께 큰 사건을 겪고 전학 후 진학한 고등학교에서는 아무도 보명을 몰랐지만, 보명은 이미 깊은 교우관계를 유지하기엔 마음이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대학에서는 친구를 몇 두었지만, 어린 시절 친구와는 또 달랐다.
단짝 친구. 보명은 가져본 적 없으나 누구보다 바랐기 때문에 잘 알고 있는 분위기였다. 장난스럽고 허물없는 편안한 분위기.
윤진성이 어깨동무를 한 채 도욱의 몸을 잡아끌었기에 보명은 어려움 없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었다.
“음. 도욱아, 이거.”
그때 한 여학생이 다가와 음료수 캔을 건넸다. 이지혜. 얼른 이름은 확인했지만, 음료수를 건넨 이유까지 파악하긴 힘들었다.
“···뭐야?”
‘앗, 이렇게 싸가지 없게 말하려던 건 아닌데.’
내면은 김보명이었으나 외면이 강도욱인 탓에 말투 또한 강도욱 특유의 느릿하면서도 무심한 말투가 나오고 말았다.
“너 마시라구. 그냥!”
얼굴을 붉힌 이지혜가 제자리로 후다닥 도망가듯 돌아갔다.
“새끼, 인기 많아서 좋겠다. 얼굴만 번드르르한 거 뭐 좋다고.”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닌 듯 윤진성이 투덜댔다.
“이지혜는 어때? 그래도 반에서는 젤 낫지 않냐?”
“···별로.”
물론 이지혜는 보명이 잠깐 보기에도 예쁜 편이었다. 다만 어떻게 강도욱의 열여덟 몸으로 들어오게 된 건지도 모르는 판에 내면은 서른셋인 보명이, 열일곱 여자애를 어떻게 평가할 상황은 아니었다.
“하여튼, 복 터진 놈!”
윤진성이 답답하단 듯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