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190. 숭배자(1)
“죽을 뻔했네.”
지하 벙커에 들어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눈보라에 집어삼켜져 얼어붙었을 터.
배식을 받기 위해 방을 나섰다.
“샬런 님, 오셨습니까?”
“예, 식량은 충분합니까?”
“당연하죠. 이런 일에 대비해서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식량은 이곳에 저장합니다.”
식량을 관리하는 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식량 창고에 음식이 가득했다. 아껴 먹는다면 이곳에서 1년은 넘게 버틸 양.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마공학을 이용해서 벙커를 만들었기에 전혀 문제가 없을 겁니다.”
시설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마공학을 이용하여 전기를 만들고 물을 만들어 낸다. 식량만 잘 갖춰진다면 평생 여기서 지낼 수 있을 터다.
“여기 식량입니다.”
“너무 많이 주시는 것 같은데.”
이야기를 끝낸 이가 식량을 뭉텅이로 건네주었다. 대식가인 강수호에게도 많아 보이는 양.
“괜찮습니다, 힘쓰시는 분인데 이 정도는 먹어둬야죠.”
용병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게 근육과 마나 양이 많다. 그렇기에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회복력이 빨라지고 강해진다.
1급 용병은 이곳에서 꼭 필요한 존재기에 당연한 일.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작별 인사를 나누고는 곧장 방으로 향했다.
“으……. 배고파.”
일렌도 마나를 뭉텅이로 두 번이나 소모해서 그런지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다.
마나를 빠르게 재생시키기 위해서는 먹을 게 필요한 상황.
“일렌, 먹을 거 가지고 왔어. 이것 좀 먹고 있어.”
“오오! 먹을 거다!”
빌빌대던 일렌이 고급 육포를 보더니 달려들었다.
손에 집히자마자 입 안에 넣는 일렌.
“맛있는데?”
“특별히 좋은 걸 주셨거든.”
샬런과 마찬가지로 일렌도 입맛이 까다로우며 대식가다. 그런데도 만족할 정도로 맛있는 육포라니. 상당히 좋은 음식을 준 건 확실했다.
“그런데 눈보라는 언제쯤 그칠까?”
육포와 함께 따뜻한 수프를 마신 그녀가 물었다.
눈보라와 마나 폭풍이 시작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폭풍은 아마 이 상태에서 적어도 일주일은 넘게 지속될 것이다.
“일주일은 있어야겠지. 인공적으로 일으킨 폭풍이니까.”
“뭐, 여기서 쉬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네.”
“쉬었다 간다고 생각하면 되지. 나중이 문제긴 하지만.”
좀 쉰다고 생각하여 나중에 올라가면 된다.
인공적으로 만든 마나 폭풍이니, 길게 지속되진 않을 것이다. 마나를 계속 사용해야 하니까.
문제는 악마 간부였다.
‘그 아이…… 상당히 강했는데.’
나나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
그 정도의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 자체가 위험이었다.
아직 밖에서 일렌과 내가 나오길 기다릴 수도 있었다. 그럴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지만.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거 없다.
“후우……. 배부르다. 나 이제 좀 잘게. 무슨 일 있으면 깨워줘.”
“응, 자고 있어.”
그녀가 편히 자는 걸 보고 옆에서 강수호도 잠을 청했다.
몸을 크게 쓰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를 경우를 위해 회복도 필요하고, 마땅히 할 일도 없어서 눈을 감자 금방 잠이 들었다.
* * *
“이상입니다.”
“돌아 버리겠군……. 전쟁이라도 치르겠다는 건가?”
“대규모 이동이라니……. 그것도 악마까지 동행하면서.”
“…….”
다양한 유명 인사들이 모인 곳의 회의장.
회의장에 참석한 이들이 저마다 탄식을 뱉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들어 마인 협회가 갑자기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마인 협회만이 아니었다.
“천마가 움직인다 하더군요.”
한국 협회장, 이용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들었으니 확실한 정보였다.
“사실입니까?”
“예, 믿을 만한 정보원에게서 얻은 정보입니다.”
“세상이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건가…….”
모두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된다면 인간과 마인의 전쟁이 될 것이다.
최대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디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아십니까?”
“중국 주변을 돌아다니더군요. 아마 강수호 헌터와 마일런을 찾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런.”
천마가 돌아다니는 위치 또한 심상치 않았다. 하필이면 세계급 헌터들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다니…….
“뛰어난 헌터를 보디가드로 세워 큰 문제가 있다면 연락이 올 테니 너무 큰 걱정은 마십시오.”
“큰 문제만 발생하지 않으면 다행이긴 합니다.”
“조금은 안심이 되는군요.”
하지만 안심만 될 뿐, 원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럼 이만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보도록 하죠.”
더 이상 나눌 이야기는 없었다.
워낙 바쁜 이들이라 회의에 오랜 시간을 쓰기도 어렵고.
“들어가십시오.”
간단한 작별 인사와 함께 모두 회의장을 떠났다.
곧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바빠지리라 예상하며.
* * *
“흐아아암~ 이제 일주일 지났나.”
늘어지게 하품하는 것과 동시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런 생활도 벌써 일주일 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매일 밥 먹고, 자고, 주변을 살피는 생활이 반복되어 좋을 것 같았지만…….
“아직도 치네.”
문제가 하나 있었다.
벙커 밖에서는 아직도 눈보라가 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눈보라를 이곳에 고정한 것처럼…….
‘가능한 이야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그 악마라는 놈의 마기가 무한하지 않은 이상.
“아직도 치고 있어?”
“응, 도통 갈 기미가 안 보이네.”
어느새 일어난 그녀도 마나를 통해 밖을 살폈다.
결계는 부서지지 않았지만, 눈보라는 계속 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 달은 넘게 이곳에 있어야 할 듯하다.
“겨울이 지나면 괜찮은데, 그 이상은 좀 아닌데…….”
최대 세 달은 잡고 있었지만, 만약 이대로 상태가 유지된다면 큰 문제가 있다.
“숭배자.”
“숭배자.”
생각에 잠긴 끝에 둘이 동시에 입에서 내뱉었다.
지구에 마인 협회가 있다면 이곳에는 제단이 있다. 그것도 악마를 숭배하는 제단.
그들의 말대로 정말 악마의 숭배자가 있다면 상당히 골치 아파진다.
‘그들을 찾지 못한다면 평생 이곳에 갇힐 수도 있다.’
평생을 이곳에 살 수 있다는 뜻.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극히 적었다.
“일단 찾아보자.”
“내가 먼저 영주님한테 가서 말해 볼게.”
“오케이. 나는 먼저 찾아보고 있을게.”
그래도 혹시 모른다.
미래는 예언자라 해도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영주님.”
“음? 무슨 일인가?”
보통 사람들과 같은 방을 사용하는 영주의 방에 들어갔다.
그녀와 나눈 대화를 모두 설명했다.
일주일 넘게 정체되어 있는 눈보라. 악마의 숭배자가 이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예감.
“그렇군…….”
영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검문을 뚫고 들어온 악마 숭배자가 있을 수도 있는 법.
“한꺼번에 모아서 검사하지 않고 기사와 함께 한 방, 한 방 둘러보도록 하지.”
영주는 꽤나 똑똑했다.
도망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 몰래 한 방, 한 방 둘러보아 숭배자를 잡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오늘 밤에 하는 게 낫겠지?”
“예, 저도 기사들과 함께 참여하겠습니다.”
“그러지.”
영주도 동의했다.
지하 벙커의 식량이 적지는 않지만 무한정은 아니니 최대한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것이다.
예의를 갖추고 영주 방을 나왔다.
“숭배자…….”
인상을 구기며 천장을 쳐다봤다.
악마의 숭배자는 평범한 마인 같은 집단이 아니었다. 지구에 있는 마인들보다 몇 배는 까다로운 괴물들.
‘잘못하면 도시 전체가 망가질 수 있다.’
도시 전체를 괴멸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을 빠르게 찾아내야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 * *
“샬런.”
시간이 지나 밤이 되고 곧이어 숭배자를 찾는 시간이 되었다.
똑똑.
“문을 열어주십시오.”
먼저 기사가 주민들의 방문을 두드린다.
문이 조심스레 열리자 곧바로 기사가 들어가 검사를 시작한다.
샬런은 뒤에서 대기한다.
“아닙니다.”
“다음 방으로 이동하죠.”
그것의 반복이었다.
수만 명이 넘어가는 사람들.
시간은 한정적이고 수가 많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후우, 다했군요.”
다행히도 하루 안에 모든 검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근처 의자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뱉는 기사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끝나서 기쁘기도 했지만, 다른 의미로 기쁘기도 했다.
“다행히 악마 숭배자는 없는 것 같군요.”
“그거 하나는 정말 다행입니다.”
악마의 숭배자가 주민들 중에 없었으니까.
그거 하나만은 정말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다.
‘숭배자가 주민들 중에 없었다고?’
‘이상해…….’
하지만 일렌과 강수호는 긴장의 끈을 풀지 않았다.
눈보라가 벙커 바로 위에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경우다.
‘분명히 있다.’
숭배자가 분명히 숨어 있다.
주저앉은 몸을 일으켜 세워 기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기사들도 검사를 해 봐야겠습니다.”
“당연하죠! 동의하지 않는 놈는 없지?”
동의하지 않은 기사는 없었다.
그만큼 믿음직한 기사들로 넘쳐나는 기사단.
모든 병사를 불러 검사를 시작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없습니다.”
“…….”
모두가 침묵한 채로 일렌과 샬런을 바라봤다.
그들이 말한 대로 되지 않아 불평, 불만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숭배자가 나오지 않아 정말 다행입니다.”
“하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기사들은 오히려 기뻐했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하여 검사를 진행했지만 다행히도 숭배자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다행이긴 한데…….”
분명히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듯, 계속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그 사실을 알리듯 아직도 밖은 눈보라가 계속 몰아치고 있었다.
‘숭배자가 있다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없다는 건…….’
한참 혼자서 생각에 빠져 있을 때쯤.
“영주.”
“…….”
이 도시의 영주는 아직 검사를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