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67화>
66. 하데스의 후퇴
암펠리안이 멀리서 본 소드를 그대로 내리찍는다.
검기가 미간을 노리며 뻗어 온다.
멀리서 검기를 날리는 그의 기세는 예전보다 훨씬 흉험하다.
하나 이제는 대처가 가능하지.
옆으로 피하면서 견제용으로 번개를 뿌린다.
암펠리안이 손을 뻗자 번개가 그리로 빨려 들어간다, 잠시 멈추는 암펠리안.
[강해졌군.]
그가 검을 다시 들더니 갑자기 한 걸음을 내딛는다.
순식간에 확대되는 암펠리안의 신형.
이 정도는 충분히 대응 가능하다.
가속으로 피하고, 화염 전차를 소환해 녀석에게 돌진시킨다.
틈틈이 쏘는 뇌신은 덤.
몸이 불타오르는 암펠리안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귀찮게 하는구나.]
화염 전차를 손으로 쥐어 우그러뜨리는 암펠리안.
워낙 크기가 커서 단번에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존재감이 크게 축소된다.
그러며 본소드로 자신의 몸을 툭 치는 암펠리안.
몸에 붙은 불꽃이 검으로 빨려 들어간다.
역시, 그다지 효과는 없군.
녀석의 공격은 단조로워서 피하기는 쉽다.
가속과 위험 감지의 시너지는 굉장해서, 암펠리안이 이리저리 검을 휘둘러도 아직 여유가 있다.
다만 내 공격도 안 먹히는 게 문제.
조화의 축복에 신성력까지 더해졌는데, 별로 피해를 입지 않는다.
[일어나라. 망자들이여.]
내 공격을 막던 암펠리안이 손을 하늘로 뻗자 땅에서 하얀 유령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내 근처에도 유령이 올라왔으나, 헤파이스토스의 갑옷이 저절로 남색 기운을 뻗쳐 그들을 잡아먹었다.
잡스런 공격은 이거로 다 커버하네.
그렇게 유령을 제압하고 있는 사이, 암펠리안이 한 걸음, 한 걸음 거리를 좁혀 왔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검기를 피하기도 점차 쉽지 않았다.
[헤르메스의 힘인가? 빠르긴 쥐새끼처럼 빠르구나.]
계속 거리를 벌리면 피할 만하겠지만…….
그렇게 피하기만 해 봤자 답이 안 나온다.
지금 힘이 있을 때 타격을 입혀야지.
SP가 많이 사라질 것 같아서 다른 공격을 먼저 했지만, 전혀 안 통했으니 이거밖에 없군.
영기 발출을 써 본다.
“집중 강화. 영기 발출.”
여의를 단번에 확장하며 영기 발출에 집중 강화를 시전한다.
새하얗게 피어오르며 늘어나는 여의.
[SP가 3,200 감소합니다.]
와! 3,200 감소라니 너무 큰데?
전 재산의 4분지 1이 날아갔다…….
으으. 무조건 한 방 먹여야 해.
암펠리안의 일격, 이 격 사이의 틈을 향해 파고들어 녀석과 거리를 좁힌다.
내가 오히려 덤벼들자 좋다고 검을 휘두르려던 암펠리안이 갑자기 동작을 멈춘다.
[아니. 이건 헤라클레스 님의……!]
헤라클레스?
영문을 몰랐지만 녀석이 동작을 멈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암펠리안의 커다란 몸통을 사선으로 가르는 여의.
검이 두부를 베듯 아무 막힘없이 적을 통과한다.
암펠리안의 상체가 바닥에 툭 떨어지며, 하체는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다.
[크아아아아!!]
전장을 뒤흔드는 비명.
땅바닥에 주저앉은 암펠리안의 상체는 움직이지도 못한 채 비명만 내지른다.
그 비명이 워낙 처절해서 내 몸이 움찔할 지경이었다.
영기 발출이 이렇게 센가?
일단 좋은 기회가 왔으니 빨리 제압하자.
검을 한 번 더 내리찍으려는 순간, 암펠리안의 몸이 시뻘건 핏빛 보호막으로 휩싸였다.
그리고 그대로 튕겨 나가는 여의.
“김지호 각성자.”
보호막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핏빛 막이 가시고, 하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 능글능글하던 그가 그 어느 때보다 굳은 표정이었다.
“영기 발출까지 사용하다니. 진짜 골치 아픈 사람이군요.”
“하데스!”
“이런 곳에서 암펠리안을 소멸하게 둘 수는 없는 일. 제가 졌습니다. 후퇴하지요.”
“후퇴?”
아니.
그렇게 지구를 부숴야 한다고 목 놓아 부르짖던 하데스가 후퇴한다고?
[사령대제. 어딜 도망치려고 하느냐? 김지호 각성자. 지금이 다시없을 기회다. SP는 얼마든지 내가 주겠다. 하데스를 공격해!]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쏟아진다. 사령대제와 그 주위를 감옥의 창살처럼 막아 가는 빛 무더기.
하나하나가 막대한 신성력을 포함하며 서서히 조여든다.
하나 하데스는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암펠리안의 상반신을 안았다.
그리고 나를 보며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보였다.
“클클. 김지호 각성자. 다음에 만나면 제가 드릴 도주 스킬입니다. 이렇게 시연하게 되는군요. 자. 아테나의 신성력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시지요. 카오스 홀(Chaos Hole).”
하데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와 암펠리안의 주변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러더니 갑자기 황무지에서 시커멓게 변하는 주변.
하늘 위에서 커다란 낫을 들고 있던 리치도 그리로 휙 내려온다.
그러더니 하데스 일행이 암흑에 잠긴 채 모습을 감춘다.
조여 오던 신성력 빛 무더기도 암흑 공간에 막혀 멈춰 있었다.
“김지호 각성자. 승리를 축하하지요. 또 보십시다. 금방 보게 될 거예요…….”
이거로 진짜 승리?
얼떨떨했다.
겨우 영기 발출 한 번 휘둘러서 암펠리안 반 토막 냈는데 하데스가 도망가네.
그럼 이대로 행성 복구 성공인가?
지구 해방?
해피 엔딩?
와우!
[아…… 아쉽구나. 하데스가 반신의 능력일 때 제압했어야 했는데. 여기서 영기 발출로 제압했다면 하데스가 수백 년간 봉인되었을 것이다.]
빛 속에서 아테나의 음성이 들린다.
그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영기 발출이 뭐기에 이렇게 강해요?”
[신의 불사(不死)를 무효화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특히 신의 분신에게 영기 발출로 타격을 입히면 본체에게도 큰 타격이 가니, 하데스가 저렇게 도망친 것이지.]
“아하…….”
적 SP만 불태우는 줄 알았더니 또 그런 효과가 있나 보네.
내 남은 SP야 얼마 안 되지만, 하데스랑 싸우게 되면 아테나가 물량을 팍팍 대 줬겠군.
잡지 못해서 좀 아쉽긴 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혼돈 세력에도 한 다리 걸치고 있으니 무사히 도망가게 놔두는 게 나을지도.
어쨌든 승리네?
“그럼 이제 지구엔 혼돈의 군주가 안 오는 겁니까?”
[그래…… 이제 강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자세한 건 천사가 대신 설명할 것이다.]
그러더니 아테나의 빛이 하늘 위로 황급히 올라간다.
뭐 급한 일이라도 있나?
그것보다…… 오오오!
진짜 이렇게 이기는 거야?
암펠리안이랑 제대로 각 잡고 싸우려다가 허무하게 끝나서, 똥 싸고 뒤를 안 닦은 기분이긴 하다만.
어쨌든 최종적으로 승리했으니 된 거지!
[용감한 지구인들이여.]
천사가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지구인 부대를 향해 서서히 내려왔다.
빛의 날개가 사방으로 크게 뻗어 나가고, 황량한 대지에 풀이 자라기 시작한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당황한 지구 각성자들이었지만, 다들 승리 분위기를 느끼고 기쁜 얼굴이었다.
[그대들이 승리했다. 비록 특출난 한 명의 힘이 컸다 하더라도, 그대들 모두의 분투가 아니었으면 이런 결과가 나오진 못했으리라.]
솔직히 내가 다 하긴 했지.
그래도 천사라 그런지 지구인 생각해서 잘 포장해 준다.
“진짜 이긴 거야?”
“왜? 아까 데스나이트 엄청나던데?”
“김지호 헌터가 무슨 일을 한 거지?”
“에이 뭐, 어쨌든 이겼다잖아! 완전 질 줄 알았는데……!”
“와아아아!! 이겼어!!”
천사가 승리를 확정 짓자 환희에 젖는 사람들.
다들 폴짝폴짝 뛰며 서로를 껴안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제 곧 이 세계는 닫히고, 다시 재생될 것이다.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으니, 귀환하라. 조금 있으면 강제로 귀환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천사의 명에 하나둘씩 귀환하는 사람들.
이제 귀환하면 다시는 못 오는 건가?
와서 진짜 싸움만 진탕 하다 가네.
그러고 보면 오크 부대와 드래곤이 올 때까지 버티면 천사와 드래곤이 합심하여 적을 제압하는 그런 그림이 그려졌을 거 같은데…….
이거 원 영기 발출로 끝내 버렸네.
“그래도 좋다.”
뭔가 허무하지만 날로 먹으니 좋다.
안 그랬으면 점점 강해지는 언데드 군단과 사투를 벌이다가 사령대제 앞에서 목숨을 건 사투를 했겠지.
이길지 질지도 모를 전투를 하다가 사령대제가 저렇게 쨌으면 엄청 짜증 났을 거 같아.
“지호야!”
“지호 씨!”
나에게 달려오는 이진성.
그 뒤를 강시아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다.
예전에 사도 지휘자 부대에 속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너 대체 뭐 한 거야?”
“아니, B급이 되고 신기술을 썼거든? 근데 그거 한 방 맞고 갑자기 후퇴하네.”
“B급? 억! 벌써 B급이냐?”
“벌써 B급이 되셨어요?”
“대장님이 벌써 B급이라니…….”
“이 정도면 명실공히 지구 최강이군요.”
놀라는 사람들.
그중에는 아주 눈을 부릅뜨는 정보 당국 인원들도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귀화시켜야 합니다.”
“혼돈의 군주가 강림하지 않는다고 해도 B, C급 던전은 앞으로 골칫거리가 될 것입니다. 미국에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영상은 찍었죠?”
“예. 이를 바탕으로 국회에서 백지수표를 위임받겠습니다.”
안 들리게 속닥속닥하는 거 같은데 신체 능력발 때문인지 다 들립니다.
캬.
돈 받고 미국 갈까?
이제 멸망은 끝난 거니 인생을 좀 즐겨야지.
B급 던전이야 뭐 껌일 테고. 위험 지역 적당히 쓸어 버리면서 대가를 받으면 되겠지. 하하하하.
“엇. 강제 귀환 메시지 떴다. 야. 그럼 지구 가서 오랜만에 퍼마시자.”
“오케이. 지구서 봐.”
이진성이 손을 흔들며 빛으로 변해 사라진다.
그와 함께 하나둘씩 사라지는 주변 사람들.
“지호 씨는 디아나 님을 만나고 갈 예정이시죠?”
“아. 그래야죠.”
맞다. 디아나 만나야 하지.
하도 갑작스럽게 이겨서 잠시 깜빡했다.
“앗, 저도 강제 귀환 메시지가 떴네요. 그럼 지구에서 뵐게요.”
“네. 지구에서 봐요.”
강시아도 귀환하자 주변이 한산했다.
그 많던 지구인들도, 언데드 군단도 사라지고 조용하기만 했다.
푸른 풀밭만 무럭무럭 자랄 뿐.
“보상 받으러 갈까.”
가속을 쓰며 세계수를 향해 달린다.
처음에는 얼떨떨한 기분이 강했지만, 달리면 달릴수록 기분이 너무 상쾌했다.
이겼어!
이겼다고!
천사화도 무사히 넘기고, 지구도 무사해.
던전이 생기는 게 좀 마음이 걸리긴 하지만, 던전 내 부산물인 마나석 같은 자원은 신기술에도 도움이 되니.
거기에 던전 덕에 아이러니하게도 내 입지는 굳건하겠지.
만세다. 만세.
기분 좋게 달려서 세계수로 오니, 뭔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나무가 너무 큰 데다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디아나가 어디 있다는 거야?
콕콕.
내가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바람이 불어오며 내 어깨를 무언가가 툭 두드렸다.
어깨 쪽을 보니 소녀 형상의 바람의 정령이 날 수줍은 표정으로 건드리고 있었다.
“디아나의 정령인가?”
바람의 정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바람의 정령을 따라 거대한 세계수의 나무 기둥 쪽을 향해 갔다.
바람의 정령이 나무 기둥을 향해 톡톡 노크를 하자 기둥 일부가 나무 문 형상으로 변했다.
들어가라고 손짓하는 바람의 정령.
나무 안으로 들어가는 건가?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나무 문을 열었다.
끼이익.
들어가자 보이는 건 은은한 불빛, 그리고 커다란 침대였다.
새하얀 침대보와 푹신해 보이는 이불.
그리고 그 안에는 디아나가 미소를 지으며 등을 기대앉아 있었다.
미소가 사뭇 요염하다. 그녀 몸에 나는 빛이 은은한데 괜히 침이 꿀꺽 삼켜졌다.
“오셨군요. 지호 님.”
“예. 디아나 님.”
이불로 몸을 가슴 부근까지 가린 디아나.
이불 위에는 맨살이다.
이거 분위기가 좀 야릇한데…….
“저는 지호 님이 이렇게 케브리안을 위해 승리를 가져오실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답니다. 케브리안의 일원으로서, 오늘 꼭 보답하고 싶어서 누추하지만 제 방으로 지호 님을 초대했어요.”
끈적끈적한 목소리.
날 보는 눈빛이 색기가 넘친다.
후우우우.
하나 마음은 쿵쾅쿵쾅해도, 머리 한편은 차가웠다.
C급 때였으면 단번에 달려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올림포스와 로키에게 뒤통수를 맞고 나니 조심성이 늘었다.
갑자기 엘프리안의 마지막 메시지가 떠올랐다.
‘올림포스가…… 헤르메스가 저를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이는 마지막으로 남기는 저의 사념…… 최후의 유산은 디아나에게 남겼으니 그녀를 찾아가 주시길…… 그녀를 찾아가면 인장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세요.’
최후의 유산을 디아나에게 남겼다는데 지금 분위기는 그런 거는 온데간데없고 딱 봐도 날 꼬드길 분위기.
“지호 님…….”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디아나.
이불이 흘러내리며 그녀의 나신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억.
잠깐.
몸매가 너무 완벽한데?
갑자기 차가운 이성이 흩어지는 느낌이다.
[명경지수가 발동했습니다.]
아…… 안 돼. 진정하자. 일단 인장을 확인하자.
“인벤토리.”
인벤토리를 열자 엘프리안의 인장이 있었다. 그걸 쥐자 갑자기 방 안에 녹색 빛이 나기 시작한다.
디아나에게로 모여드는 녹빛.
요염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던 디아나의 나신이 빛으로 가려진다.
[이 기운은 엘프리안……! 으으윽. 아직도 이렇게 힘을 남기다니!?]
갑자기 디아나의 머리 위에 금빛의 유령이 튀어 올라온다.
찡그린 유령의 얼굴을 보자 바로 넋을 잃었다.
와.
저런 미모는 난생처음 본다.
디아나나 아우렐리아보다도 이쁘다.
그냥 ‘아, 이 얼굴을 이길 미인은 없겠구나.’란 생각이 든다.
대체 누구야?
[당신. 왜 떠먹여 줘도 못 먹죠? 바보야?]
오히려 나한테 성을 내는 유령이 곧 모습을 감췄다.
왜 지가 성내는지 어이가 없었지만, 괜히 아쉬워지네.
“아…… 앗!”
디아나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이불로 몸을 감싼다.
그래. 이게 정상 반응이지.
근데 머리에선 ‘왜 떠먹여 줘도 못 먹죠?’란 말이 떠나질 않았다.
“디아나 님. 괜찮아요?”
“아. 지호 님…… 괜, 괜찮습니다. 제 기억이 모두 왜곡된 거였다니…… 엘프리안 님을 잊다니…….”
충격에 빠진 채 땅에 주저앉은 디아나.
그녀는 중얼중얼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고, 그녀에게 모여들었던 녹색 빛은 방 벽면을 방어하듯이 막아서고 있었다.
뭐라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서 있는 채 몇 분이 지났을까.
디아나가 갑자기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났다.
이불을 내팽개친 채.
환히 빛나는 나신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이대로라면…… 지호 님이 위험해.”
“어…… 디아나 님?”
“지호 님. 아까 하려던 걸 계속하죠.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네? 뭐요?”
“으…… 그러니까…… 그거요.”
“그거라뇨?”
그러자 디아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빽 외쳤다.
“아, 진짜! 그러니까 섹…… 성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