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63화 (63/313)

[63]

여자의 흐릿한 눈동자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눈동자는 분명히 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여자는 왠지 모르게 우리와는 다른 이면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일행은 잠시 말없이 서서 연신 살려달라고 중얼거리는 여자를 바라봤다.

이대로 시간을 죽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난 내밀고 있던 대검을 치우고 총을 둘러멨다. 그리고 여자에게 천천히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저 기억납니까?’

그러자 여자는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아니, 내지르려고 했다. 어느새 내 옆까지 다가온 노인은 여자가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벌리자 재빠르게 다가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허술하게 할래?’

노인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나를 노려봤다. 노인의 재빠른 대처가 아니었으면 마트까지 불나게 뛰어야 할 뻔 했다. 난 노인에게 감사인사를 조용히 건네고 시선을 돌려 여자를 바라봤다.

패닉에 빠진 여자다. 어떤 돌발행동을 해도 이상할게 없었다. 여자는 노인에게 입이 막혀 읍읍 소리를 내질렀다. 고개를 계속해서 흔들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게 큰 정신적 쇼크를 받은 모양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안정을 시켜야 하나? 난 과거에 받은 교육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하지만 조급함과 불안함 때문에 저 멀리 날아간 기억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대화는 시도해봐야 했기에 나는 눈물을 흘리는 여자 앞으로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저 기억납니까? 그쪽 에덴 소속 맞죠?’

에덴? 내가 에덴이란 말을 꺼낸 순간 여자는 움찔하며 도리질을 멈췄다. 이게 스위치인가? 난 변화하는 여자의 분위기를 캐치해냈고 내가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에덴 소속이 맞으십니까?

그러자 여자의 빈 동공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읍읍 거리던 비명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포로 젖은 눈물이 여자의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 내렸다. 난 여자에게 강조하듯 말했다.

‘이 손 놔드릴 테니 절대 비명 지르지 마세요.’

그러자 여자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노인을 조심히 바라봤고 노인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손을 치우기 시작했다. 여자는 다시 비명을 지르지 않았고 계속해서 울먹였다. 그리고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살려주세요……. 제발요…….’

노인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정신이 나갔어.’

얼핏 말을 알아듣긴 했지만 정상적인 대화를 하기엔 무리가 있어보였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이곳에서 시간을 죽치고 있기엔 영 불안했다. 난 순간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말없이 노인을 바라보자 노인도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다급하게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건물들 사이로 지기 시작하는 해를 바라보며 빠르게 용팔이를 불렀다.

‘용팔아 업어라.’

‘엑? 제가요?’

여자를 업으라는 소리에 용팔이는 기겁했다. 하지만 노인이 뒤통수라는 만병통치약을 놔주자 용팔이는 얌전히 다가와 여자를 업었다. 이 여자에게 머리끄덩이를 잡혔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는지 연신 투덜거리긴 했지만 우리는 그 투덜거림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준비가 끝나자 우린 다시 방향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우린 걷는 내내 말이 없었다. 사실 짐이 무거운 것도 있었고 연신 중얼거리는 여자 때문이기도 했다. 이 여자를 구한 표면적인 이유는 사실 인도적인 문제였다. 우리가 모두를 구할 의무는 없지만 적어도 인간성마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나만이 알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에덴과의 접점을 잇기 위해서였다.

사실 탐색조 무리가 전멸을 당할 때 에덴과의 연락책은 완전히 끊겼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렇기에 난 후련함보단 아쉬운 감정을 먼저 느꼈던 것이고 그 아쉬운 감정은 털보네 지하실에서 발전기와 전구를 발견했을 때 더더욱 짙어졌다.

전구에 불이 들어왔을 때 느꼈던 그 감동. 전기라는 일상의 잔재가 주는 그 벅찬 기분! 나는 전구를 본 그날, 일행들과 이 기분을 같이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그리고 그 욕구 속에서 가장먼저 생각난 건 에덴에 있다던 태양광 발전기였다.

에덴, 정체를 모르기에 그들이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에덴이란 존재는 나에게 안개로 가려진 신대륙과 같았다. 발을 디디는 순간 느껴질 설렘과 걱정. 그것이 섞인 미묘한 감정을 난 걸음을 걷는 내내 느끼고 있었다.

우리만 있어서는 에덴과 접촉하지 못한다. 하지만 에덴 탐색조 소속인 이 여자가 살아있고 제정신만 유지해 준다면 에덴과 우리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내가 생각에 빠져 정신없이 걷고 있는데 얌전히 내 뒤를 따라 걷던 노인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하단 말이야.’

난 정신이 빠져 있다가도 심각해 보이는 노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네? 왜요?’

그러자 노인은 불안한 얼굴로 사방을 살펴보며 경계했다. 그리고 들고 있는 총을 양손으로 꾹 잡고 용팔이에게 업혀오는 여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절대 놓칠 녀석이 아닌데…….’

노인의 말을 들은 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사실 쉼터에서 그 녀석을 쫓아낸 건 천운과 같았다. 그만큼 강대한 적이었고 악마 같은 면모를 보이던 놈이다. 하지만 그런 녀석이 저 여자를 놓친다? 그것도 밤에? 좋게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불안감을 느꼈다. 설마 그녀석이 저 여자를 일부러 살려둔 걸까? 아니, 아니야. 그 정도로 똑똑한 녀석일 리가 없어. 내 머릿속에서 서로 상반된 주장이 끊임없이 부딪혔다. 저 여자를 두고 가야 하나? 하지만 에덴은?

내가 표정을 굳히고 걸음을 멈추자 용팔이 형제도 불안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세상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빠른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내 머릿속은 아직도 복잡했다. 노인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동윤아.’

‘네?’

나는 얼이 빠진 상태로 대답했다. 그러자 노인은 굳은 표정으로 시계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일단 데려가자. 통할지는 모르겠는데, 방법이 하나 있어.’

방법? 노인이 말하니 알 수 없는 믿음이 가기 시작했다. 난 얼굴을 쓸어 올리며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뛰는 심장을 달랬다. 그러자 노인은 착검하고 있던 대검을 빼내고 천천히 여자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여자가 입고 있던 파카를 천천히 벗겼다.

여자는 자기 파카를 벗기고 있음에도 반응하나 없이 가만히 업혀있었다. 노인은 그런 여자의 파카를 완전히 벗겨낸 다음 대검을 들고 파카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안에 있던 오리털은 흘러나오고 나름 비싸보이던 파카는 여러 조각으로 찢겨버렸다.

그 조각들을 모두 챙긴 노인은 조용히 나를 바라봤다. 노인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것이다. 난 용팔이 형제를 바라보며 다시 마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급하게 사방을 살피며 일행들에게 걸음을 재촉했다.

거의 뛰다시피 움직이니 나와 일행들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숨소리 사이에 무언가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 걸음을 옮기면서도 뒤를 살며시 바라봤고 그곳에는 대열 후방에서 파카 조각을 사방에 던지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하나는 길거리, 또 하나는 골목 옆 집안이나 주차장. 파카 조각들이 던져지는 곳은 아무런 규칙성이 없는 무작위 위치였다. 난 별다른 사족을 달지 않고 일행들을 이끄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저 멀리 마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 * * * * *

정말 찰나였다. 우리가 마트로 뛰어가 뒷문을 두드리는 순간 세상은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강수련이 다급하게 문을 열 때는 황혼이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조금만 그곳에서 망설였다면 거리에서 밤을 맞이할 뻔 했다.

우리는 황급하게 마트 안으로 들어왔고 들고 있던 시멘트와 여자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른 일행들은 시간이 늦도록 들어오지 않은 우리 때문에 불안했었는지 뒷문에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나는 강수련이 내미는 물과 수건을 받아들고 거칠게 달아오른 숨을 골랐다. 하지만 노인은 숨을 다 고르기도 전에 털보를 바라보며 외쳤다.

‘털보!’

그러자 털보는 깜짝 놀라며 노인 곁으로 뛰어왔다.

‘네, 어르신.’

‘좀 급해서 그런데 덫을 대충이라도 설치 못하나?’

털보는 급하다는 말에 인상을 굳히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는지 잠시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다 눈을 번쩍 뜨더니 황급하게 뛰어가 철물점에서 가져온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인을 향해 말했다.

‘시멘트보단 약하겠지만 방법은 있습니다.’

노인은 그거라도 해달라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리고 소리 내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털보는 작게 대답하고는 덫들과 가방을 들고 옥상위로 올라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눈치 챈 여자들은 아이들을 다독이며 휴게실로 이끌었고 아이들도 지시를 따라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난 그들에게 오늘밤은 무슨 소리가 들려도 절대 나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강수련에게 다가가 우리가 데려온 여자를 가리키며 조용히 말했다.

‘충격을 심하게 받았어요. 조금 보살펴주세요.’

엎질러진 물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녀를 제정신으로 만들고 에덴과 접촉을 해야 했다. 강수련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우물쭈물 고개를 숙였다. 안가고 뭐하는 거지? 무슨 할 말이 있나싶어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팔을 벌렸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와 나를 꼭 끌어안았고 난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우리는 뜻하지 않게 체온을 나누며 그 자세로 몇 초간 서있었다. 강수련은 살며시 팔을 풀더니 내 귀에 조용히 속삭인다.

‘다치지 마요.’

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수련은 만족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나에게 작게 손을 흔들었고 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채연이 부탁해요.’

* * * * * *

내가 크로스 보우와 총을 챙기고 옥상으로 향하는데 계단 중간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노인이 말했다.

‘쫄지 마! 확실한 거 아니니까. ‘

맞다, 확실한 거 아니다. 그녀석이 저 여자를 일부러 살려뒀다는 건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어쩌면 오늘밤 아무 일도 없을 수 있었다. 난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지우며 바쁘게 걸음을 옮겼고 이내 옥상위로 올라왔다.

유난히 어두운 저녁이다.

흐린 하늘이 달빛조차 가려버린 침묵의 시간. 용팔이와 두식이는 난간 구석에 박혀 조용히 앉아 있었고 털보는 자세를 낮춘 상태로 분주히 기어 다녔다. 한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는데 아마 덫을 설치하는 모양이었다.

일단 제일 큰 크로스보우는 털보가 들었다. 그리고 중간 것은 내가, 제일 작게 만들어진 리커브식은 노인이 들었다. 두식이에게는 무엇을 줘야할까 한참을 고민했고, 결국 대검이 착검된 빈총을 쥐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팔이에게는 가장 중요한 대형 손전등을 맡겼다. 물론 본인은 크로스 보우대신 손전등을 받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난 용팔이에게 이 역할의 중요성을 침이 마르도록 떠들어댔다.

빈말이 아니고 정말 중요한 포지션이었다. 오늘같이 달빛도 없는 밤은 정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이곳은 그녀석의 독무대였고 싸움이 벌어진다면 우리에겐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시야확보를 위한 손전등이 꼭 필요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녀석의 치명적인 약점은 빛이다. 강수련이 든 작은 손전등에도 강한 거부감을 느끼던 녀석인데, 대형 손전등의 효과는 어떠할지 불 보듯 뻔했다.

비록 용팔이가 체구도 작고 겁도 많았지만 눈치와 센스는 어딜 가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포지션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설명해주자 용팔이는 감동받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고 난 부담스러워 자리를 피했다.

오늘은 보초 개념이 아니다. 교대도 없었고 수면도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등을 기대고 옥상 주변 모든 곳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해가 간절히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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