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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11화 (11/313)

[11]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어지러운 편의점 내부였다. 벌써 털린 듯 엉망으로 어지럽혀진 내부였지만, 그렇다고 물건이 모두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걸 먼저 확인한 나는 눈을 굴리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러자 보이는 건 한참을 처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벽에 기대고 있는 남학생이었다. 더러운 교복에는 얼굴에서 흘린 피가 묻어 있었고 움직이지는 않았다. 혹시 죽었나 하고 자세히 바라보니 가슴팍이 규칙적으로 솟아올랐다 내려앉는다. 살아 있었다.

그놈들은 절대 사람들을 때리지 않는다. 그놈들은 그렇게 친절한 녀석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 학생을 피떡으로 만든 사람은 같은 생존자의 짓이 분명했다. 머리에 빨간 비상등이 켜진다. 서둘러 자세를 바꿔 반대쪽을 살펴보자 역시나 생존자가 더 있었다. 그들이 여태 들리던 소음의 원인이었다.

내가 단칸방 창문에서 본 세상은 망했다. 틀이 무너지고 인간의 존엄성은 그놈들 이빨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졌다. 인간을 통제하던 법이 사라지고,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윤리가 무너진다. 사람은 원초의 시대로 돌아간다.

법도 사라지고, 범죄라는 의식도 흐릿해진다. 약자는 잡아먹히고, 강자는 살아남는다. 말 못 하는 괴물이 나타나자 말하는 괴물도 나타난다.

가장 먼저 보인 장면은 한 남성이 여성을 겁탈하려 하고 있었다. 여성은 당연히 반항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남성의 눈은 성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성의 눈에는 독기로 가득했지만, 서서히 힘이 빠지는지 절망스러운 눈으로 변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침착해진다. 세상이 이렇게 될 건 예상하고 있었다. 대낮에 편의점에서 여자를 강간한다. 괜한 실소가 나왔다. 밑바닥을 본 자의 여유였을까. 아니면 내가 그동안 단칸방에서 그놈들을 바라봤던 차가운 분노였을까. 내 눈에는 저 남성과 괴물의 차이는 없었다.

살며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자기 할 일이 바쁜지 내가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남자는 알아듣지 못할 고함을 내뱉으며 여성의 옷을 벗기려 했고, 여성은 필사적으로 반항하며 눈물을 흘리고 이렇게 말했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그런데도 남자의 태도가 변하지 않자 여자는 연신 한쪽에 있는 남학생을 바라보며 울었다. ‘오빠 제발…… 제발!! 진수 죽을지도 몰라 제발…….’

저기 맞고 쓰러져 있는 남학생 이름이 진수인가 보다. 난 조용히 편의점 문을 잠갔다. 그리고 편의점 밖 사방을 살피고, 조용히 뒤돌았다. 문을 잠그고 뒤를 돌아보자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여성 역시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바라보자 기분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남성은 일어서려 하는지 바지 버클을 끌어 올리고 있었고, 여성의 눈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왜, 내 꼴이 히어로 같은 모습은 아니었나? 남자는 잔뜩 당황한 얼굴로 나에게 이렇게 외쳤다. ‘너, 너 뭐야!’

난 담담한 얼굴로 남성을 바라봤다. 안경 낀 얼굴에 몸도 평범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 모든 생존자가 그렇듯 불안감이 한가득 끼어 있었다. 그 남자는 가만히 창을 들고 있는 나를 불안하게 쳐다보더니 이내 기선제압이라도 하려는지 큰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너 뭐냐고 시발새끼야!!!’

나 그 욕설에 불쾌감을 느꼈다. 단지 욕을 먹어서가 아니라 그 남성이 큰 고함을 내질렀기 때문이다. 이 미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음은 필수적이다. 그런 기본적인 원칙조차 지키지 못하는 남성에게 난 상당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 이질감은 쓰레기를 바라보는 더러운 느낌이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 남성은 얼굴이 붉게 변했다. 그리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던 평범한 남성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이런 담담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혼란이 교차할 것이다.

그리고 그 혼란은 두 가지로 변할 수 있다. 인정과 함께 오는 부끄러움. 혹은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이유 없는 분노. 그 남성은 자신의 치부를 들킨 것에 대해 분노를 표하고 있었다.

그 남자가 나에게 달려들었지만, 너무나 느리게 느껴졌다. 방을 나서기 전에 나였다면 아마 잔뜩 당황에서 저 남성과 바닥을 뒹굴고 있지 않았을까? 죽음의 고비를 몇 번 넘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나 자신이 이제야 변화하고 있었다.

그래도 육박전을 할 자신이 없는지라 난 창을 두 손으로 들었고 어설픈 동작으로 훙 휘둘렀다. 남성은 내가 설마 창을 휘두를지는 몰랐다는 듯 어어? 하는 얼굴로 멈춰 섰다. 그리고 아, 하는 신음성과 함께 자신의 오른쪽 손을 바라봤다.

오른쪽 손등에는 피부가 갈라진 듯 선홍빛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시중에서 파는 공장제 싸구려 식칼이라 할지라도 돼지고기 정도는 가볍게 가른다. 하물며 사람 살이라고 다르겠는가? 그냥 ‘오지 마’라면서 휘두른 창이 의도치 않게 상대를 제압했다.

그 남성은 얼이 빠진 얼굴로 엉덩방아를 찍었다. 그리고 피가 흐르는 손을 붙잡고 나를 바라봤다. 아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줄줄 흐르는 피를 바라보고 입을 헤 벌리는 게 한순간 정신적 혼란이 온 모양이었다.

난 천천히 남성에게 접근했고, 그는 이제야 고통이 찾아오는지 입을 벌려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난 남성이 비명을 지르기 전에 마대자루를 거꾸로 들고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러자 남성은 눈을 뒤집으며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난 남성이 기절한 걸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여성은 언제 그곳으로 갔는지 정신을 잃은 남학생을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연신 ‘진수야’, ‘진수야’ 하고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쓴 입맛을 다시고 고개를 돌렸다.

난 여자에게 위로의 말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일단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챙겨야 하는 걸 찾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물을 찾아 등산 가방을 반쯤 채웠다. 그리고 식량을 찾기 시작했는데, 통조림과 보존 기간이 긴 식품들은 모두 없어져 있었다. 일찍이 털린 모양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편의점 창고로 가 봤지만, 그곳도 상황은 똑같았다. 아쉬운 마음에 부피가 작은 과자들과 초콜릿을 담기 시작했다. 라면이 눈에 들어왔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고 외면했다.

그리고 채연이가 좋아할 만한 껌과 사탕들을 소량 담고, 마지막으로 원래 목적인 핫팩을 찾기 시작했다. 핫팩은 편의점 창고에 쌓여 있었다. 자주 보던 회사 상품이라 의심 없이 가방에 담을 만큼 담고, 남은 핫팩은 창고 한구석에 숨겨뒀다. 나중에 핫팩이 떨어지면 또 찾으러 올 생각이다.

무거워서 다 가져가지 못하는 물품도 핫팩이랑 같이 숨겼고,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라면도 박스에 담아 숨겨 놓았다. 나중에 이곳을 지나칠 때 가져올 생각이다. 그리고 혹시 이불과 담요는 없을까 찾아봤지만 도통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이곳에 볼일은 없었다. 내가 일어나 묵직한 가방을 메고 나가자 여태 울면서 가만히 있던 여자 쪽에선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도와주세요.’ 난 흠칫 놀라며 그쪽을 바라봤고, 여자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난 천천히 남학생의 모습을 살폈다. 얼굴은 잔뜩 부어 있고, 의식은 없어 보였다. 입술이 찢어졌는지 입술에선 피를 흘렸다. 코는 다행히 부러지지 않았지만 당분간 정신을 차리기는 힘들어 보였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와주지도 않았다. 내가 남성은 제압한 건 그저 위험요소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남성이 무기를 가지고 있었거나 위협적인 사람이었다면, 난 도와주지 못했을 것이다. 난 그런 인간이니까.

강간은 물론이고 범죄자를 보면 저절로 거부반응이 든다. 그래서 되도록 그녀를 도와주는 행동을 취했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거듭 말했지만 난 그녀를 도와줄 힘도 의무도 없었다.

난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든 게 많으니 가방은 묵직하다. 원래 마음은 가벼워야 했는데, 이상하게 마음도 무겁다. 천천히 벽을 따라 그놈들이 없는 방향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 채연이가 있는 보금자리로 갈 차례다. 그렇게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기듯이 걷고 있는데 뒤에서 작은 신음이 들린다.

뒤를 돌아보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 여자는 남학생을 부축해 낑낑거리며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가라! 가! 그렇게 외치고 멱살잡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난 그놈들이 몰려오기라도 할까 봐 그러지 못했다.

걸을 때마다 죄책감이 내 발을 잡았다. 좀 도와줄까? 아니야, 아니야, 이 멍청이야. 그런 생각 하지 마. 계속해서 상반된 생각이 내 머리를 괴롭혔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 없이 걷고 있다가 난 순간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재빠르게 구석에 몸을 숨겨서 정면을 바라봤다.

난 왔던 길 그대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올 때는 발견하지 못한 그놈들 무리랑 마주쳤다. 멍하니 모여서 걷고 있는 그놈들은 사냥감을 찾아 목적지 없이 걷는 부류인 것 같았다. 그리고 운 없게도 우연히 내가 지나가려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난 일단 주차되어 있는 차 뒤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조용히 쭈그려 앉아 심호흡을 했다. 피해서 갈까? 아니 이곳은 그놈들이 온 길을 제외하고는 빠지는 곳이 없는 외길이다. 결국, 여기서 가만히 앉아 그놈들이 모두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순간 헉하고 들려오는 소리에 난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나를 힘겹게 따라오는 여자도 그것을 발견한 모양이다. 여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벌벌 떨고 있었다. 난 짜증과 함께 불안함을 느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나와 같은 방향이다. 만약 돌발행동으로 그놈들이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나도 죽은 목숨이다.

난 여자에게 눈짓했고, 여자는 금방이라도 뛰어가 도망갈 듯한 자세를 취하다가 차 뒤에 숨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난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내 옆을 가리켰다. 그러자 여자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며 남학생을 부축하고 조심스럽게 내 옆으로 와 앉았다. 그리고 몸을 숨기며 거칠어진 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지나자 다행히 그놈들은 그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오늘 내로 도착할 줄 알았는데, 변수가 생겨 계획을 망치고 말았다. 난 불안해할 채연이를 생각하며 다급하게 손톱을 뜯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지 가뜩이나 짧은 해 때문에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곧 저녁이 다가온다는 소리다. 밤은 놈들이 활발해져 나에게 위험한 시간이니, 아무래도 근처에서 밤을 지내고 아침에 출발해야겠다. 난 그놈들이 전부 지나간 걸 확인하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여자는 내 눈치를 살피며 남학생을 부축했다.

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변덕이라도 생긴 건지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인지, 난 나도 모르게 여자와 남학생이 따라올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걸어 중간에 기억해 뒀던 공사장으로 들어갔다.

역시 아까 확인했던 대로 공사장은 조용했다. 난 공사장에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주위를 둘러봤고, 인부들 휴게실로 보이는 컨테이너 박스 집을 찾았다. 조심히 그쪽으로 다가가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안은 비어 있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밤을 지내야겠다.

뒤를 힐끗 돌아보니 짐 덩어리 두 명이 어느새 내 뒤에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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