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12화
하늘은 검고 낮았다. 끝없이 휘몰아치는 눈보라의 속에서, 바다에서 맡았던 폭풍의 냄새가 났다.
바닥에 떨어진 눈은 녹지 않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눈 알갱이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해, 쌓이고 쌓인 세상은 하얗지만 어두웠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로 차가운 기운이 들어와 몸속마저 얼려 버리려는 것 같았다.
바깥에 나오는 순간 탐색대원들은 각자 조를 나누어서 흩어졌다.
10여 명씩 총 10개의 조였고, 유현은 그중에서 가장 마지막인 10조였다.
그리고, 조로 나뉜 10명은 각자 2명씩 짝을 지은 채 5개의 팀으로 나뉘어 움직였다.
“그런데, 왜 당신과 함께하게 된 걸까요.”
유현은 자신의 옆에서 묵묵히 눈보라를 헤치며 걷고 있는 레안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레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잡설 자체는 일절 하지 않겠다는 그 단호한 모습에 유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참.’
어차피 누군가와 같이 움직이게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니 레안 저 남자가 직접 나올 줄이야.
왜 그런지 이유를 물어도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기에 유현은 탐색대로서의 업무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되죠?”
“……우리는 미탐사 구역으로 향한다.”
업무에 관한 거라면 대화를 나눠도 된다는 건가.
참 재미없는 남자다. 저 행동을 보면 비슷하게 딱딱한 말투를 구사하는 다른 녀석이 떠올랐다.
‘그래도 최도윤에 비해서는 부드러운 편인가. 아니, 걔는 그냥 사이코패스지.’
적어도 탐색대원들에게 살아 돌아오라는 등, 동료를 아끼는 발언을 하는 레안은 최도윤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미탐사 구역이라면 어디로?”
“지도를 봐라.”
레안은 지도를 펼쳐 보였다. 거기에는 대륙의 북부가 세세히 그려져 있었는데, 지도는 북대륙을 크게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있었다.
그중에서 절반 이상은 붉은 글씨로 X자가 그어져 있었다.
표시가 된 곳은 탐사를 끝마친 곳이고, 그러지 못한 곳은 아직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유현이 오늘 돌아다닐 곳은 가르디안에서 북서쪽에 향하는 곳이었다.
방향을 확인한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다시 레안과 움직이려는 순간 저 멀리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였다.
“저건 프리첸 황제? 그리고 그 부하들까지…….”
프리첸이 부하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탐사대원과 다르게 그들은 수십 명씩 뭉쳐서 움직이고 있었다.
탐색대들이 먼저 나온 이후로 따라 나온 것인가?
유현이 레안에게 그것을 전하는 것보다 먼저 레안이 입을 열었다.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쓰지 말라니. 저건 아무리 봐도 개인 행동 아닌가요?”
“어차피 말을 해도 듣지 않는 남자다. 그리고 저들도 저들 나름대로 탐색대의 일을 하는 셈이니까 뭐라고 할 수도 없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나아. 이쪽이 건드리지 않는 이상, 저쪽도 이쪽에 참견하지 않으니까.”
“……저쪽도 함께 도우면 좋을 텐데.”
유현이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레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눈보라를 헤치며 아직 탐사가 끝나지 않은 땅을 돌아다녔다.
갈라진 얼음 절벽의 틈새를 뛰어넘고, 커다란 빙산을 옆으로 돌아서 움직였다.
간혹 눈과 얼음 말고도 다른 것이 보이기도 했다.
뾰족하게 자라나 있는 나무들이 뭉쳐 있는 숲이었는데, 나무들은 검게 죽어 있고 이파리가 하나도 없었다.
미라의 숲.
유현이 이곳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였다.
레안은 오른손에 낀 장갑을 벗고는 맨손으로 나무의 검은 결을 매만졌다.
“롱글로브 사과나무로군.”
“이런 곳에 사과나무가 자라나 보네요.”
“북부의 땅은 원래도 춥지만, 그래도 옛날에는 풍족했으니까. 롱글로브는 그중에서도 생명력이 아주 강해서 그 혹독한 북대륙의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대표적인 나무 중 하나였다. 이 나무가 전해 주는 열매는 북부 가르드인에게는 축복이나 다름없었고.”
가르드인에게 롱글로브 사과나무는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이었다.
그랬던 롱글로브 나무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거겠죠?”
“아직은. 하지만 살리겠다고 나무를 뿌리째 뽑는 순간 바로 죽을 거다. 그저 이 상태에서, 어떻게든 마지막 생명줄을 붙잡고 버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
결국, 언젠가는 죽고 마는 것이다.
북대륙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이 나무조차도, 동토의 저주를 이겨 낼 수는 없었다.
유현은 어딘가 씁쓸함이 담긴 레안의 옆모습을 보며 문득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어째서 자신이 케이라의 모습을 취했는지 알고 있냐고.
케이라가 시스템과 무언가 거래를 맺었고, 이 세계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서 뭘 하려고 했는지 아냐고.
“저기…….”
“쉿.”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고 말을 전하려는 순간, 레안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더니 숲의 바깥에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서리 거인이다. 숫자는 둘.”
그 말에 유현도 귀를 기울여 보니 휘몰아치는 바람의 틈새 사이로 어렴풋이 다른 소음이 섞여 오는 것이 들렸다.
서리 거인으로 추정되는 무거운 발걸음과 거기에 저항하듯 외치는.
사람의 비명.
“……마주쳤군요.”
“움직인다.”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안의 뒤를 따랐다.
눈으로 뒤덮인 언덕을 넘자 커다란 두 거인이 탐색대를 쫓는 것이 보였다. 쫓기는 자들은 둘. 한 명은 기절해 있고, 나머지 한 명이 필사적으로 그를 등에 업은 채로 뛰고 있었다.
업힌 사람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지나가는 길마다 붉은 핏방울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고, 휘몰아치는 눈이 그 위를 덮었다. 붉은 흔적이 순식간에 지워졌다.
그 뒤를 서리 거인이 바짝 붙은 상태였다.
유현이 뭐라고 외치기도 전에 레안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우워?
눈밭을 미끄러지듯 내려간 레안은 이윽고 선두에 선 서리 거인의 발밑에 당도했다. 거기까지 도착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레안은 눈밭에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았다.
거인이 갑자기 시야 아래에서 나타난 불청객을 인지하는 것보다 레안의 칼집에서 검이 뽑혀 나오는 것이 더 빨랐다.
서걱.
한 줄기 빛이 눈보라를 가르며 거인의 목을 스치듯 지나갔다.
달리던 거인의 몸이 기울어지더니 이윽고 지면에 쓰러지며 주르륵 밀려났다. 단 일격에 서리 거인을 쓰러뜨렸지만, 레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레안 대장님!”
“어서 거리를 벌려라! 놈은 죽지 않았어!”
그 말대로 쓰러진 거인의 몸이 들썩이더니 무수한 얼음의 가시가 사방으로 솟아났다. 레안은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목을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짝 부족했던 건가.
거인은 몸을 일으켰다. 반 이상이 잘려 나간 목이 대롱거리더니 꾸드득 소리와 함께 다시 몸에 붙었다.
그 순간, 뒤에서 달려오던 다른 거인 하나가 레안을 지나치며 도망치는 탐색꾼 둘을 쫓았다.
레안이 거인을 막으려는 순간, 앞서 목을 재생한 서리 거인이 양팔을 얼음의 칼날로 바꾸며 레안에게 달려들었다.
“큭! 어서 도망쳐!”
레안은 서리 거인의 검을 몸으로 막으며 탐색꾼 둘에게 외쳤다. 하지만 그보다도 거인의 움직임이 훨씬 더 빨랐다.
서리 거인이 두 다리에 힘을 주더니 높게 뛰어올랐다. 그대로 포물선을 그린 거인은 덩치에 믿기지 않는 날렵함으로 지면에 착지했다.
쿠웅.
거대한 충격과 함께 주위에 쌓였던 눈이 치솟아 올랐다.
도망치던 탐색꾼은 그 충격에 휩쓸려 다리가 꼬여서 넘어졌다. 숙였던 몸을 일으킨 거인은 자신의 발치를 나뒹구는 탐색꾼을 향해 발을 들어 올렸다.
“안 돼!”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안이 소리 질렀지만, 거인은 멈추지 않았다.
사늘한 냉기로 이루어진 발이 탐색꾼의 머리를 터뜨리려는 순간, 거인의 머리 뒤에서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뛰어오르며 목덜미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우워어어어!!
칼이 박힌 서리 거인의 발이 탐색꾼의 바로 옆에 떨어졌다.
레안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서리 거인의 목에 칼을 박아 넣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케이라의 모습을 한 유현이었다.
‘그녀가 대체 왜?’
유현은 발버둥 치는 거인의 어깨 위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레안은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봤다.
“으아압!”
유현이 기합을 내지르며 서리 거인의 목에 박아 넣은 검을 옆으로 크게 휘둘렀다. 동시에 얼음 조각이 튀며 서리 거인의 목이 잘려 나갔다.
그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지켜보던 레안은, 이윽고 입술을 깨물고는 자신과 힘겨루기에 들어간 거인의 공격을 곧바로 옆으로 흘려 냈다.
쿠웅.
거인의 두 팔이 레안을 지나쳐 지면에 떨어지고, 동시에 레안의 검이 움직였다.
한번. 두 번. 세 번.
첫 검격에 두 팔을.
두 번째에 양 발목을.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에 목을.
눈 한번 깜빡할 찰나의 순간에 이어진 공격에 거인의 얼음덩어리 몸이 눈밭 위를 뒹굴었다.
레안은 서리 거인의 시체를 뒤로하고 쓰러진 탐색꾼에게 다가와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부상자의 상태는?”
“기습을 당해 팔을 크게 긁혔을 뿐,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곧바로 돌아가서 치료해라. 거인에게 팔을 베였다면 팔이 얼어붙을 수도 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탐색꾼은 그렇게 말하며 동료를 둘러업고 자리를 떠났다.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그는 유현을 보며 고맙다고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이윽고 두 사람이 사라지자 레안은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유현에게 다가갔다.
“방금 그건…….”
“뭐가요?”
“왜…… 싸웠지?”
레안은 아직도 유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서리 거인을 상대로 무모하게 달려드는 것은 용감한 가르드 전사들도 쉽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현은 그것을 해냈다. 거인의 목덜미에 칼을 찌르고, 그대로 목을 베어 냈다.
조금이라도 망설였다면, 혹은 조금이라도 검을 잘못 휘둘렀다면 거인을 죽이지 못하고 죽는 것은 유현이 됐을 거다.
그 놀라운 결단력보다도 레안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몸을 사리지 않은 유현의 태도였다.
“왜냐고요?”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유현은 레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이 죽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
“…….”
레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은 머나먼 과거의 모습을 봤다.
‘안 돼.’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준 그녀.
겁먹지 말고 용기를 내서 싸우라며, 사람을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두르라고 조언을 해 주던 그녀.
이제는 그 잔혹한 흔적밖에 볼 수 없던 레안에게, 유현의 행동은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떠올리지 마.’
레안은 자기도 모르게 유현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희망을, 되새기지 마.’
잊어야 한다. 그냥 전부 잊은 채 살아야 했다.
‘나는…….’
“괜찮아요?”
유현이 레안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그녀가 손을 뻗으려 하자, 레안은 발작하듯 유현의 손을 쳐 냈다.
유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레안이 쳐 낸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아.”
레안은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는 말을 더듬었다.
“나, 나는…… 그러니까…….”
“……알았으니까 얌전히 있어요.”
유현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레안이 자기도 모르게 떨어뜨린 검을 쥐어서 그의 칼집에 꽂아 줬다. 레안은 그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 다 됐으니까 이만 가죠. 어차피 오늘은 더 이상 뭘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그러지.”
레안은 순순히 유현의 말에 따랐다. 처음 이곳으로 올 때만 해도 레안이 앞서 나갔지만, 돌아갈 때는 유현이 앞서는 기묘한 광경이 연출됐다.
그리고 그날.
기적처럼 탐색대에서 사망자가 없었다.
* * *
유현이 탐색꾼으로서 첫날을 성공적으로 보낸 이후, 그에 대한 인식은 확실히 달라졌다.
위험을 무릅쓰고 서리 거인을 쓰러뜨린 소문이 퍼진 덕분에 탐색대 사이에서 유현을 무시하거나 혹은 경계하는 시선은 사라졌다.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면 그건 아주 명예로운 행동이다.
가르드의 전사들로 이루어진 탐색꾼들은 그것을 아주 중요시하게 여겼다.
그리고 소문은 더욱 퍼져서, 가르디안의 생존자들도 이따금 유현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거나 혹은 말을 거는 정도까지 됐다.
당장에도 유현은 탐색꾼들과 도시 외곽의 야외에 두런두런 모여 앉아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하하. 이렇게 든든한 전사가 와 준다면야 우리야 더 고맙지.”
“누나. 그보다 다른 사람들 이름은 알아요?”
링우그의 물음에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링우그는 이때다 싶어서 주변 사람들을 소개시켜 줬다.
“여기 털북숭이 아저씨는 에단이에요.”
“야! 나 아저씨 아직 아니거든!”
“본인은 팔팔한 청춘이라 주장하지만, 좀 그렇죠?”
링우그의 장난스러운 말에 주변 동료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여기 한쪽 눈에 안대를 한 든든한 누님은 스가라 씨. 단검술이 끝내주죠. 이쪽 형님은 한슨. 최고의 눈을 지녔어요. 여기 흉터 가득한 아저씨는 두르프 씨. 20년 동안 탐색꾼을 해 온 베테랑이고, 엄청 무거운 양날도끼를 휘둘러요.”
링우그는 그렇게 자리에 모인 10여 명의 탐색꾼들을 유현에게 소개시켜 줬다.
유현은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유현의 활약을 다들 들어서 알고 있기에 그들은 웃는 얼굴로 유현을 반겨 줬다.
“그리고, 저기 혼자 무뚝뚝하게 앉아있는 아저씨는…… 라히얀 아저씨. 봐서 알고 있죠?”
“어.”
라히얀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과 홀로 고독하게 앉아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설원을 달리는 한 마리의 늑대 같았다.
“저렇게 보여도 실제 나이는 엄청 많아요. 거의 50대죠.”
“정말?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라히얀은 아무리 높게 쳐도 3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수염도 없고 얼굴에 주름이 없어서 더욱 그렇게 보였다.
“라히얀 아저씨는 저희 탐색대에서 가장 경험이 많아요. 무려, 32년 동안 탐색꾼으로 활동을 했죠. 사실상 레안 형님과 함께 행동해 온, 이 가르디안의 살아 있는 역사기도 하고요.”
“링우그. 헛소리는 그만해라.”
그 낯 뜨거운 칭찬을 별로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라히얀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에이. 아저씨가 지금까지 쓰러뜨린 서리 거인의 숫자만 몇인데요. 아저씨는 그런 소리를 들을 만하죠.”
“나는 그저 명예로운 전사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야.”
“어휴. 라히얀 대장은 항상 저렇게 고리타분한 말만 한단 말이야. 저러니 저 나이 먹고도 짝이 없지.”
“크하하! 스가라. 너무 그러지 마. 대장도 뜻이 있겠지.”
“맞아요. 전 라히얀 아저씨가 멋진걸요. 저렇게 강한데 겸손하기까지 하잖아요.”
링우그까지 두둔하며 나서자 스가라는 못 말리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려는 순간,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불쑥 다가왔다.
“이봐 아가씨. 지난번에 큰 공을 세웠다며?”
프리첸 황제.
그가 유현에게 친근하게 굴며 말을 걸었다.
주위에 있던 탐색꾼들의 표정에 김장감이 맴돌았다. 프리첸이 무슨 목적으로 이 자리에 찾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썩 좋은 의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요?”
“하하. 너무 경계하지 말라고. 나는 그저 이번에 재밌는 소문이 들려서 확인 차 왔을 뿐이니까. 탐색대에 들어가, 전우를 구하고 서리 거인을 쓰러뜨렸다. 내가 그때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칭찬하는 이유가 뭘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욕보였음에도 프리첸은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놓거나 하는 거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유현은 더욱 프리첸을 경계했다.
이 남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프리첸. 끼어들지 마라.”
라히얀이 프리첸을 쏘아봤다. 프리첸은 그런 라히얀을 힐끔 보더니 두 손을 들고 뒤로 물러났다.
“뭐, 기회는 나중에도 있는 법이니까. 다음에도 멋진 활약을 기대하지.”
프리첸은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저 남자가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서 친하게 지내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현은 경계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판단했다.
그보다 평소에 얌전한 라히얀이 프리첸에게 입을 열 때만큼은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레안의 오른팔이라, 레안에게 대적하는 프리첸을 혐오하는 건가?’
게다가 프리첸은 2인자고 라히얀은 3인자라고 했다. 아마 그런 격차 또한 서로 사이가 나빠지는 데 지대한 몫을 했을 것이다.
라히얀은 어딘가 고리타분하고 무뚝뚝하지만, 프리첸은 능글맞고 제멋대로니까.
두 사람의 성향은 그야말로 정반대였다.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중요한 건 레안의 경우니까.’
레안은 그날 이후로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지, 평소보다 더욱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물론 탐색대가 나가는 날이면 빠지지 않고 참여했지만, 이전처럼 유현과 같이 다니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 다니면 피해 다녔지.
유현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럴 기회를 잡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 * *
그렇게 유현이 이곳에 오고서 1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유현은 4번이나 되는 탐색에 참여했고,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탐색에 성공을 할 때마다, 유현은 자신의 몸 안에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그들과 친해지고, 서리 거인을 쓰러뜨릴수록.
그의 몸에는 적지만, 이야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아직 완전한 시화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물꼬는 틀었다는 거겠지.’
이거라면 일단 수명이 몇 주는 더 연장된 셈이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리 거인을 쓰러뜨리고, 주위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동토의 저주의 원인을 찾는 거니까.
거기에 더해서 이 세계 어딘가에 있는 코덱스의 파편도.
‘오늘 가는 곳에서 무언가 찾으면 좋겠는데. 이번엔 누구랑 같이 움직이려나.’
그렇게 유현이 이른 아침 광장에 나왔을 때.
“어…….”
“…….”
먼저 나와 있는 레안과 마주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