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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109화 (109/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109화

인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셀린은 ‘진짜’ 텔러가 아니다.

본인은 애써 그 사실을 숨겨 왔겠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전부 다. 셀린이라는 텔러는 그만큼 쉽게 잊을 수 없을 만큼 내 삶에 큰 발자취를 남겼었다.

“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설마, 소문이 퍼진 겁니까? 아니면 다른 텔러가…….”

“정곡을 찔렸군. 너 지금 너무 흥분한 거 알아?”

당황하며 말이 빨라지는 셀린의 눈동자는 처음 봤을 때와 다르게 충격으로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며 나를 더욱 강렬하게 노려봤다.

그래도 선은 넘지 않으려고 다짐했겠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겨를이 없을 거다.

“지금 흥분하지 않게 생겼……!”

“이 사실은 아무도 몰라. 오직, 나만 알지.”

‘네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라고 나는 우회해서 말했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진짜야. 너의 정체에 대해 아는 건 오직 나뿐이야.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않아도 좋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은 누구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

셀린이 입술을 잘근 깨무는 것이 보였다. 결국, 좋든 싫든 그녀는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약점을 손에 쥔 것은 나니까.

“……바라시는 게 뭡니까?”

“뭐가?”

“저한테 뭘 바라니까, 그러신 거 아닙니까?”

“내가? 너 혹시 내가 이걸 약점 삼아서 널 뭐 어떻게 하려고 든다거나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었습니까?”

정말 몰랐다는 듯 되묻는 셀린의 태도에 나는 기가 막혔다.

얘는 나를 대체 어떤 놈으로 본 거야.

“뭐, 네가 나를 나쁘게 보고 있다는 것 하나는 알겠어. 그런데 그거 알아? 질문은 내가 너한테 먼저 했다는 걸.”

“질문이라고…… 아.”

이제야 떠올린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시화실의 텔러로서 시화를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셀린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면서, 조금 전의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마치, 내가 약점을 잡아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고민 끝에 내놓은 답은 그게 전부였다.

나는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똑같은 질문을 받았어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을 거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애초에 이건 답이 정해진 문제가 아니거든.”

“답이 정해지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내 뒷말을 따라 중얼거리는 그녀의 태도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대화할 마음이 들었나 보군. 셀린 사원.”

내 지적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처음의 포커페이스로 돌아온 그녀였지만, 상기된 얼굴에는 아직도 그녀의 당혹스러운 감정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철벽처럼 쓰고 있던 가면 속이 드러난 것이 부끄러운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나를 힐난하는 눈빛으로 흘겨봤다.

거, 참. 무서워라.

“……제가 진짜 텔러가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게 중요한가?”

“중요합니다.”

“그렇군.”

‘진짜’ 텔러가 아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자못 이상하게 비칠 수 있겠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텔러란 무엇인가?’

텔러는 만들어진 종족이다. 혼성계를 돌아다니며 하계의 존재들을 선별해, 상계의 성령들에게 보여 준다. 그들의 삶과 그들의 이야기를.

시화(示話).

그게 그들의 역할이고 존재 의의다.

‘하지만, 텔러라는 존재가 꼭 만들어져야만 하는가? 시화는 꼭 텔러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확실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시화를 하는 것은 텔러라고 다들 알고 있지만, 시화는 텔러들의 특권이 아니다. 당장 우리 회사만 봐도 안다. 시화를 하는 텔러는 시화실 소속이고, 나머지 실 소속 텔러들은 다른 일을 하니까.

바꿔 말하면 텔러가 아니라도 시화를 선보일 수 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바로 ‘외부 인원’이다.

“셀린. 너는 외부 인원이지.”

“…….”

너는 숨길 것도 없기에 그녀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외부 인원. 그것은 텔러로 태어나지 않았음에도 텔러가 되길 바라는 자들이었다.

정확히는 시화를 하고 싶어 하는 타 종족이라고 봐도 좋았다.

시화란 텔러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곳 하계의 인간도, 허가만 떨어진다면 텔러의 역할을 안고서 시화를 선보일 수 있다. 애초에 텔러를 제외한 종족이 반드시 시화를 해서는 안 된다거나 그런 법도 없었다.

‘다만, 그 조건을 만족시키는 게 꽤나 빡세니까 안 하지.’

텔러는 태생부터 [제네시스 시스템]에 소속되지만, 외부 인원은 그러지 않다.

외부 인원이 중계에 소속된 텔러의 권한을 얻기 위해서는 [제네시스 시스템]이 내민 조건을 만족해야만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걸 통과한 존재는 아주 극소수라는 것만 어렴풋이 들었다.

그렇다고 통과했다고 바로 텔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혼성계 3대 텔러 조직 중에서 외부 인원에 대해 유일하게 관대한 것이 바로 천체주식회사뿐이다. 희극단패와 엑소도스는 허락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천체주식회사 텔러들이 외부 인원을 좋게 볼 리도 없었다.

텔러 중 시화는 자신들만 펼쳐야 하는 전유물로 생각하는 자들이 매우 많은 탓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외부 인원이란 자격도 없는 것들이 뭣도 모르고, 자신의 영토를 침범하는 불청객이었다. 같은 동료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셀린이 자신이 외부 인원임을 숨기고 있는 거였고.

“천하의 기익족이나 되는 녀석이 뭐가 아쉬워서 이런 길을 택한 거지?”

기익족은 혼성계에서도 상당히 상위의 종족으로 꼽힌다. 굳이 급을 매기자면 내 동기인 아리샤가 변한 모습인 적마인과 동급이라고 해도 좋았다.

같은 하계의 존재라 하더라도, 인간보다 까마득히 높은 격을 지닌 자.

마음만 먹으면, 저 별에 가까운 2세대 성령까지도 최대한 근접할 수 있는 종족. 그게 바로 기익족이었다.

내 입장에서 기익족이 시화를 위해 외부 인원 텔러가 된다는 것은 재벌 3세가 공장에서 인형 눈이나 붙이는 짓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도 자의로 말이다.

[그렇게 잘난 녀석이 대체 왜 텔러 같은 걸 하는 건데?]

‘그건 나도 몰라.’

전생에서 녀석이 외부 인원이라는 것만 들었지, 대체 왜 텔러로 활동하려 했는지 그 이유는 나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물어봤지만…….

“…….”

아무래도 그녀는 쉽사리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불신하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목표를 함부로 밝히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겠지.

“너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나도 딱히 대답을 독촉하거나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나는 네가 외부 인원이니 뭐니.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 널 깔보지도 않을 거고, 비웃지도 않는다. 이 소문을 남들에게 퍼뜨릴 생각도 없어.”

설마 내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는지, 셀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도 그것이 걱정이었을 거다. 기껏 외부 인원이라는 것을 숨기고 이곳에 들어왔는데, 들통나게 된다면 심한 차별을 받게 될 테니까.

실제로 전생의 그녀는 외부 인원이라는 것이 들통나서 여러모로 힘든 삶을 살았다.

‘그래. 그랬었지.’

그녀는 지금은 지원실 소속이지만, 나중에는 자기가 바라는 대로 시화실로 옮기게 된다.

하지만, 외부 인원이라는 것이 들킨 그녀에게 다른 텔러들이 제대로 된 시화를 하게 놔둘 리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이야기의 불모지인 지구로 좌천됐다.

모든 것이 버려진, 종말 이후의 지구에.

펜타그램 부서와 엑소도스 녀석들이 지배하는 지구에서 그녀가 대체 뭘 할 수 있었을까?

능력이 있어도 그것을 선보일 수 없어서 하루하루를 괴롭게 살아가던 게 그녀였다.

나는 그때 그녀를 만났다.

사람이 죽길 바라는 다른 텔러들과 다르게, 무언가 다른 그녀를.

그런 그녀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내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해 줬는지, 지금의 나는 여전히 그 의중을 모른다.

그건 동정심이었을까. 아니면 동질감이었을까. 혹은 더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감에 누구라도 좋으니, 하나 붙잡고 울분을 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그녀에게 나름의 도움을 받았다는 거다.

그녀가 전해 준 텔러에 대한 지식이 지금의 내게 아주 약간이라도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설마, 그녀를 여기서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는 그녀를 꽤나 반갑게 여기고 있었다.

‘적어도 그 종말 속에서 그녀가 가장 인간적으로 비쳤으니까.’

물론, 셀린뿐만이 아니다. 종말 속에서 항상 악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그중에서는 역시 ‘그녀’도…….

“…….”

흐릿한 기억 속에서 힘없이 웃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 나는 애써 그것을 티 내지 않으며 셀린에게 웃어 보였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셀린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녀도 나름 복잡한 심경을 어떻게든 다스리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절 도우려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기껏 말한다는 게 그거인가?

“내가 널 좋게 봐서 그런 거라면? 이게 순수한 호의라면?”

“전 순수한 호의라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특히 텔러의 그것이라면 더더욱.”

본인도 텔러면서 잘도 말하네. 물론, 다른 선천적인 녀석들과 외부 인원인 그녀는 입장이 다르긴 하지만.

결국, 저런 말을 한 시점에서 그녀도 다른 텔러와 자신을 남남처럼 대하고 있다는 거다.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합니다. 저에게는.”

“그렇군.”

그녀는 대답을 독촉하는 시선을 내게 보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상사를 향한 예의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결국 그게 그녀의 성격이라는 거다. 대쪽 같고 굽히지 않는다.

정말로 그녀의 존경을 얻고 싶다면, 나는 앞으로 그에 걸맞은 업적과 행동을 보여 줘야만 했다.

결국, 과제가 하나 더 늘었군.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리켰다.

“눈빛.”

“네?”

“네 눈빛 말이야.”

내 말에 셀린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자신의 눈가를 매만졌다. 그렇다고 자신의 눈빛이 어떤지 알지도, 그것을 바꿀 수도 없을 텐데 말이다.

“네 눈빛 때문이지. 그게 마음에 들어서 널 돕기로 한 거야.”

“제 눈빛이 어땠다는 겁니까?”

“뚝심.”

“뚝……심?”

전혀 의외의 단어가 나오자, 그녀의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변했다. 필사적으로 표정을 억누르려고 하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뚝심. 혹은 신념. 너는 입을 꾹 다물고, 차가운 태도로 주변의 것들을 일관적으로 대하지. 하지만 네 눈빛은 전혀 달라. 그 차가운 행동의 안쪽에는 다른 무엇보다 뜨겁게 타오르는 심지 하나가 떡하니, 박혀 있거든.”

“제가……말입니까?”

“그래. 그래서 돕는 거다. 네가 아니라, 네 마음속 맹렬하게 요동치는 무언가를. 네가 지금은 숨기고 있는 그것이, 나중에 과연 어떻게 나올지, 나는 그게 정말로 궁금하거든. 그게 전부야.”

“……그게 정말입니까?”

“괴짜한테 뭘 바라냐?”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셀린은 잠시 몸을 움찔 떨었지만, 이내 허리와 목을 꼿꼿하게 세웠다.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으려는 줄 알겠군.

나는 서재에서 뽑은 한 권의 책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가호를 포기했을 때, 강혜림이 처음으로 검후로 각성했을 때의 이야기. [싸우는 텔러와 검후의 이야기]의 첫 권이었다.

“읽어 봐. 읽어 보면, 혹시라도 나중에 네가 시화를 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게 될 거야.”

그녀는 말없이 내가 건넨 책을 받아들였다. 다시 원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그녀는 책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의 눈빛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타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책에서 눈을 뗀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봤다.

“저, 그…….”

“네가 앞으로 얼마나 잘하게 될지, 나는 모르지.”

나는 그녀의 말을 굳이 들으려 들지 않았다. 어차피, 순간의 감정에 휘둘려서 나오는 말이다. 거기에 그녀의 진심이 담겨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한번 열심히 내 곁에서 보고, 최선을 다해 기술을 훔쳐 봐라. 지금 하려는 뒷말은 그때 가서 들어주지.”

진심을 담아 말을 할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말해라.

나는 그 말을 남기고 내 서재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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