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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108화 (108/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108화

볼일을 끝마치고 협회로 돌아가던 나와 권지아는 서로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딱히 대화를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침묵을 유지했지만, 권지아는 조금 다른 이유인 것 같았다.

나를 향한 약간의 불편함, 혹은 망설임.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내가 워낙 예민하다 보니 확실히 느껴졌다.

“지아 씨.”

결국, 사무실에 도착하기 전에 참다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음?”

“혹시, 저한테 무슨 하고 싶은 말 있어요?”

“내가? 너한테?”

“네.”

그녀는 평소처럼 같은 딱딱한 표정으로 ‘헛소리하지 마라’라고 짜증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잡티 하나 없는 고운 이마를 찌푸린 그녀는 조금 망설임 끝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있었던 일 때문에 말이다.”

“어? 진짜 할 말 있었어요?”

“뭐라고?”

“아뇨. 아닙니다. 계속하세요.”

“그러니까, 네가 그…… 모함을 당했던 일 말이다.”

뒷말을 들은 나는 왜 그녀가 나를 보며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권지아는 내게 아주 미약하지만, 죄책감을 지니고 있던 것이다.

“그 여자 이름이 누구인지도 기억 안 나지만, 아무튼…… 분명 그 여자는 내가 처리해야 할 문제였다. 분명, 네가 여기에 휘말린 것도 나 때문이겠지. 이번에 벌어진 일은 내 책임이 없지 않다는 소리다.”

억울한 척하며 내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던 김지유를 떠올렸는지, 그녀는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워낙 예쁘다 보니, 이런 얼굴도 한 폭의 그림이 됐다.

“뭐, 솔직히 저도 갑자기 그런 일을 겪어서 당황스럽기는 했는데. 그래도 일은 잘 마무리됐잖아요? 그럼, 된 거 아닌가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자존심이라 했지만, 아마 그거일 거다. 회귀자로서 나와 대등한 계약을 맺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민폐를 끼친 것을 어떻게든 바로잡으려는……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저 녀석에게만큼은 빚을 지우기 싫다는 경쟁 심리?

[혐오감 아니야? 킥킥.]

‘죽는다. 너.’

백련의 말을 뒤로하고, 나는 권지아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녀는 회귀자답게 뻔뻔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의 볼은 미약하지만,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괜찮습니다.”

이번 일에 권지아의 책임은 없다. 김지유가 움직인 목적이 그녀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을 권지아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아무리 봐도 무리가 있었다.

“지아 씨 잘못이 아닙니다. 잘못한 것은 결국, 혼자 제 열등감을 이기지 못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던 그 사람이죠. 왜 본인이 미안해합니까?”

“누, 누가 미안해했다는 거냐?”

“지아 씨요.”

내 지적에 권지아는 잠시 입술을 오므리더니, 이내 거칠게 고개를 털듯이 저었다.

“아니. 전혀 아니다. 혼자 무슨 착각 속에 빠지기라도 한 건가?”

“안 미안하면 그걸로 됐고요. 요지는 이미 끝난 일 들먹일 필요는 없다는 거죠.”

바라지 않던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보면 잘 해결됐다. 오히려 나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어서 어느 정도 속이 후련할 정도였다.

“……정체를 밝히지 않았나.”

권지아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뭐, 분명 이제 컬렉터들 사이에서 하계에 내려온 텔러 강유현에 대한 소문이 쫙 퍼질 것이다. 이미 나에 대해서 수소문을 하고 있던 클랜도, 내 정체를 짐작하고 있다가 이번 건으로 확신하게 됐겠지.

나름 비밀주의로 가려고 했던 걸 생각하면 그녀의 시선에선 이것도 타격이라고도 볼 수도 있겠다.

“언젠가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은 이미 했습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으니, 아쉬울 것도 없죠.”

오히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계기가 마련돼서 미련은 없었다. 혜림 씨도 확실하게 떴고, 이제 권지아만 성장하면 되는 상황이라 아쉬울 리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오늘 벌어진 일은 참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내가 괜찮다고 했는데도, 권지아는 무언가를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왜 이런가 곰곰이 생각을 했다가,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까?”

“…….”

정답이었다.

“혹시 뭐, 오늘 김지유 말고 더 숨기고 있는 사람 있습니까?”

“숨긴 적 없다! ……그저 내가 기억하고 있지 않을 뿐. 혹시 모르지 않는가. 내가 모르는, 이제는 잊어버린 다른 누군가가 내게 악심을 품고 또 너를 공격하려 들지도 모르지.”

“회귀자면서도요?”

“회귀자가 무슨 만능인 줄 아나?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데, 회귀 전의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은 또 어떻게 기억하고? 그 김지유인가 뭔가 하는 사람만 있으면 좋겠지만, 앞일을 모른다. 그녀 말고도 다른 누군가가 더 있을지도.”

결국, 권지아가 하는 말은 그거였다.

자신이 과거에 맺은 악연이 자신뿐만이 아닌 나에게도 닥칠지도 모른다는 것.

그녀는 그 점을 염려하고 있었다.

회귀자 특성 때문에 당당하고 뻔뻔한 모습으로 말해서 그렇지, 그녀의 속마음은 내게 여실히 전달됐다.

“뭐, 확실히 누군가 또 뒤에서 이를 갈고 저희를 노릴지도 모르죠.”

“그러니…….”

“그래도 괜찮습니다.”

나는 권지아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저는 피하지 않을 테니까요.”

“……너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세상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어떻게 삽니까? 가끔은 나도 모를 위험이 튀어나올 때도 있고 뭐 그런 거죠.”

중요한 것은 그거다.

의도치 않은 돌부리에 걸려서 휘청이고, 혹시 균형을 잡지 못해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서 달릴 수 있을 것인가?

“분명, 짜증은 나겠죠. 그런데 제가 짜증을 내면 이 세상이 ‘예, 알겠습니다.’ 하고 물러나진 않죠. 세상에는 불가항력이라는 것도 있다는 걸, 납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그걸 바라지 않더라도?”

“바라지 않다면, 혹시 모를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라도 하겠죠. 그런데 뭐, 그런 일이 대비한다고 다 되겠습니까?”

오늘 협회 바깥에서 시위를 벌이던 종교 단체만 봐도 그렇다.

나는 그들의 움직임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더욱 날뛰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증오하거나 탓할 생각이 없었다. 과거의 내 행동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입니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는 결국 앞을 보지 않을 수 없죠. 조금 자리에 멈춰 설 수는 있습니다. 가끔 뒤를 돌아볼 수도 있죠. 하지만 거기에 묶여서 포기하는 건 안 됩니다.”

“……그런가?”

권지아는 조금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내 말이 그녀의 고민에 무언가 해답이 되길 바랐지만, 그런 게 쉽게 될 리가 없겠지.

“그리고, 그걸로 저한테 미안해하실 필요도 없고요.”

“미안해한 적 없다니까.”

“뭐요?”

* * *

천체주식회사 지원실 소속 사원 셀린.

그녀는 강유현의 관조자의 방에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조금 복잡한 심경이 됐다.

처음 그녀가 유현에게 품었던 감정은 약간의 적대감이었다.

그가 대단하다는 건 알았다. 유례가 없는 속도로 대리로 승진한 그는 분명, 천체주식회사의 살아 있는 전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 사실 때문에 유현에게 반감을 품었다.

‘본인은 그걸 알면서도 개의치 않는 것 같지만.’

마치, ‘네 할 일은 그래도 알아서 해라.’라고 말하는 듯한 유현의 행동은 셀린의 상식 바깥의 것이었다.

보통 그녀의 상사는 그녀의 이런 딱딱하고 비협조적인 태도를 접하는 순간, 눈이 뒤집힌다. 어딜 건방지게 정사원이 그러는 거냐, 네가 그렇게 잘났냐.

그것도 모자라 이유 없이 그녀를 깎아내리거나, 그녀가 알아서 머리를 숙이길 바라는 자들도 있었다.

‘무능한 놈들.’

지원실 교육 과정에서 겪은 일을 떠올리자 셀린은 기분이 팍 상했다. 그러나 그 감정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강유현 대리는 달랐다.’

그는 텔러임에도 가호를 포기했고, 인간들의 사이에 섞이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직접 검을 쥐고 사상세계에 들어가 싸우기까지 했다.

셀린이 보기엔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했다가는 바로 목숨이 날아가는 상황이 아닌가? 실제로 유현을 따라 하려다가 소멸한 텔러까지 생긴 마당이다. 더욱 조심하지는 못할망정 겁도 없이 달려들다니.

하지만, 셀린에게 유현의 모습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몰고 올지 모르는 철부지의 그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선택한 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더라도, 그것을 안고 갈 각오가 된 거였어.’

그것을 확신한 것은 오늘 유현이 컬렉터 협회 본부에서 겪은 일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휘어잡고, 그러면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무심하게 일침을 날리던 그 광경.

셀린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처음 유현에게 품은 첫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하지만, 유현이 정말로 그렇게 나쁜가? 그가 정말로 죄를 지었는가?

‘아니.’

셀린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나약한 마음에서 나온 투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유현은 나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유현이 나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길 바랐다.

셀린은 자기도 모르게 미워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고 말았다.

언제나 확고하고 이성적이어야 할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지금 상당히 구석에 몰려 있었다.

‘나는…….’

착잡한 시선으로 한쪽 벽에 꽂힌 책들을 살펴보던 순간.

“오. 있었네?”

업무를 끝마친 유현이 관조자의 방으로 돌아왔다.

“오셨습니까?”

셀린은 순식간에 태도를 전환하며 유현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감정이라고는 한 줌도 섞여 있지 않은 절도 있는 행동.

‘상사로서 존중은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라고 행동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어땠어?”

유현은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 관조자의 방에 들여놓은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뭐긴, 업무지. 힘들거나 하는 건?”

“없었습니다.”

“그런가. 난 또 혹시나 잘못하거나 힘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울컥.

약간이지만 깔보듯 하는 말에 셀린은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요동쳤다.

“……절 놀리시는 겁니까?”

“그렇게 보였나?”

셀린은 유현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순간, 그가 일부러 자신의 이런 행동을 유도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유현은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혹시, 저 책장에 꽂힌 책 읽어 봤어?”

“안 읽었습니다.”

“궁금하지 않았어? 나를 최단기간 대리로 만든 이야기인데?”

“자랑입니까?”

“자랑이라면?”

“읽으란 말씀이 없어서 읽지 않았습니다.”

“거, 참. 딱딱하네. 여기 들어왔으면 자유롭게 읽어도 상관없는데.”

“명령입니까?”

“명령이라면. 따르기라도 할 건가?”

“…….”

“그냥, 권고야. 싫으면 읽지 않아도 좋아. 강제성은 없으니까. 뭘 하든 그건 네 자유지.”

자유.

유현이 꺼낸 그 단어에 셀린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그 단어를 곱씹었다.

무한 경쟁을 추구하고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천체주식회사의 텔러가 입에 담을 말은 절대 아니었다.

유현은 셀린이 찰나의 간극에 보인 반응을 눈치채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한 게 신기해?”

“아닙니다.”

“너도 오늘 봐서 알 거 아니야. 나는 다른 텔러와 다르다는 걸.”

“…….”

셀린은 차라리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흐름이 그녀를 붙잡고 이끌어 가는 것 같았다.

유현의 목소리는 그녀가 아무리 저항해도, 파도처럼 물러났다가 다시금 다가와 서서히 그녀의 정신을 좀먹는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랑비에 자기도 모르게 옷이 젖어 가는 기분이었다.

“내 입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좀 특이한 녀석이야. 그리고 시화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지.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셀린 사원.”

“무엇을 말입니까?”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야?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대체…….”

“너 원래는 진짜 텔러가 아니잖아.”

“……!”

유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그 누구에게도 꺼낸 적이 없는 진실이었다.

그걸 어떻게?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는 유현의 행동에 셀린은 처음으로 포커페이스가 무너졌다.

“셀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강제로 입고 있는 기분은 어떻지? 답답하지 않나?”

“다, 당신은 대체…….”

셀린은 이쪽을 향한 유현의 미소가 처음으로 두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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