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꿈 (2)
루루가 긴 잠적을 깨고 복귀하기 전.
그러니까 용사의 제전이 막 시작됐을 무렵의 주디스는 그다지 대륙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녀가 약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허나 대륙에서 손꼽는 강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상, 20대 초반의 애송이에게는 설 자리가 없었다.
실제로 우승을 노리는 이들은 이그넷 크레센시아 정도만을 견제했을 뿐, 젊은이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았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은 머지않아 밝혀졌다.
우승 후보로 꼽히는 용병왕 자쿠앙과의 신경전에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엑스퍼트의 끝자락에 다다랐다고 알려진 이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 주었다.
심지어 10대 검사에 버금가는 실력을 갖춘 흑기사단장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쥘 뻔하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 모든 활약을 ‘마스터가 아닌’ 상태에서 보여 줬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주디스는 엑스퍼트였다.
대륙의 정점을 노린다면 마땅히 숙달해야 할 오러 운용 6개념인 축기, 강화, 경화, 감각 개화, 집중, 발현.
이 모든 부분이 소드마스터와 비교하여 현저히 떨어졌다.
그런데도 그녀가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은, 현대 검술의 상식을 뛰어넘을 만큼 굉장한 불꽃을 가슴속에 품었기 때문이었다.
단점을 메우는 장점.
약점을 지워 버리는 강점.
그야말로 야만적인, 그렇기에 더욱 폭발적이고 위력적인 검술을 발휘하는 주디스에게 있어서, 마스터의 칭호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러 소드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스승과의 대련을 앞둔 그녀의 검에는 강렬한 불꽃이 휘감겨 있었다.
“…….”
주디스가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딱히 원해서 오른 경지는 아니었다.
마스터라는 허울 좋은 칭호에 얽매였던 건 이미 한참 전.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강해지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화기(火氣)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했고,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러 소드가 맺혔다는 것은, 주디스의 기본 실력 자체가 말도 안 되게 상승했다는 이야기였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가능하다.
일부러 오러 소드를 뽑아 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솟아난다.
그 정도로 밀도 높은 기운이, 열기로 가득한 오러가 검날을 타고 춤을 추었다.
마스터를 능가했던 엑스퍼트가.
비로소 마스터에 도달했다.
남들보다 조금 늦었을지언정 대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허나, 상대를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긴장으로 가득했다.
‘이길 수 있을까?’
꿀꺽, 주디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쿤.
대륙의 3대 검사이자, 최속의 검사.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방식의 강함을 추구했던 존재.
아마 스승 역시 엑스퍼트 때부터 마스터를 능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고, 그렇기에 대륙 최강을 논할 수 있었겠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제자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과 달리 스승에게는 이정표조차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기적이었다.
“퉷.”
주디스가 거칠게 침을 뱉었다.
걱정을 멈췄다. 불안감도, 고민도, 그 밖의 모든 감정도 전부 불꽃에 던져 주었다. 검날의 오러가 더 크게 타올랐다.
화르르륵-!
기운을 모았고.
터엉!
그것을 터뜨렸다. 폭발과 함께, 그녀의 신형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쿤은 피하지 않았다.
짓쳐 드는 제자를 가라앉은 눈으로 또렷이 지켜보던 스승이, 발을 굴러 마주 앞으로 달려 나갔다.
퍼어엉
서걱-
“……!”
주디스의 검이 허공을 스쳤다. 아무것도 베어 내지 못했다. 세상천지를 뒤덮은 불길은 노인의 옷자락마저 태우지 못했다.
사락
반면, 젊은 검사의 옷에는 확연한 패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매끈하게 잘려 아래로 떨어지는 소맷자락.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제자를 향해, 쿤이 말했다.
“더 할 테냐?”
“……당연히 더 해야죠.”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 텐데?”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
콰아아아앙!
채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유령처럼 주디스의 눈앞에 나타난 쿤이 주먹을 뻗었다.
붉은 머리 검사는 뭐가 어찌 된 것인지 영문도 모른 채 100미터를 날아가 바위에 처박혔다. 굉음과 함께 자욱하게 먼지구름이 피어났다.
“대충 그럴 거라 예상은 했다. 너는 나보다도 고집이 세니까.”
“커헉, 쿨럭, 쿠허……!”
“하지만 잊지 마라. 나는 사정 봐주는 사람이 아니야. 더군다나 이곳은 요술 세계지. 죽어도 부활할 수 있는 신비로운 공간.”
키이이잉……!
쿤의 검이 점차 투명해졌다.
검뿐만이 아니었다. 몸뚱이마저 흐릿해졌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던 주디스가 그 모습을 봤다. 그리고 경악했다.
기운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육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를 느꼈고, 지금의 자신이 절대로 스승을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적당히 몇 대 쥐어박는 정도로 끝내지 않을 거다.”
“…….”
“그러니 포기해라.”
“…….”
“대답은?”
그런 주디스에게, 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후통첩.
더 버텼다가는 제자에게 몹쓸 짓을 할 수도 있다는, 절대자로부터의 마지막 경고.
이에 또다시 몸이 떨리고, 머리털이 쭈뼛 서는 감각을 느낀 그녀가…….
화르르륵
재차 검을 들었다.
“…….”
“…….”
정적이 감돌았다.
그 고요함을 뚫고 둘의 시선이 부딪혔다. 스승은 제자의 눈빛을 읽었고, 생각을 읽었다.
그녀는, 연속된 죽음의 공포를 끌어안고서라도 자신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내길 바랐다.
콰아앙-!
그에 마음이 약해질 스승이 아니었다.
쿤이 검을 뽑았다.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점처럼 보였던 상대가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깜짝 놀란 표정마저 손에 잡힐 듯 훤히 들어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검을 휘둘렀다. 상대를 베었다.
촤아아악-!
“……좋아. 누가 이기나 한번 끝까지 가 보자꾸나.”
결착을 낸 쿤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니, 혼잣말이 아니었다. 어느새 부활한 주디스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더욱 큰 불꽃을 품고. 더욱 뜨거운 열기를 뿜어 내며.
“당연히 내가 이기죠.”
“어째서?”
“……자식 이기는 부모가 세상에 있던가요?”
“…….”
쿤이 입을 다물었다.
주디스도 더는 말이 없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둘이었지만, 이를 따지고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묵묵히 검을 든 서로가, 가족을 향해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 * *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 말은, 주디스가 쿤으로부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패배를 당했다는 뜻이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죽음을 경험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허나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주디스가 더 스승과의 싸움을 이어 가지 않는 것은, 좁힐 수 없는 실력의 격차 때문이 아니라…….
“이제야 깨달았구나.”
“…….”
“네가 원하는 건, 그런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스승의 말이 옳았다.
주디스가 요술 공간에서, 암흑도시 고다라에서 피워 낸 검은 남을 짓밟는 검이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을 상처 입히는 검이었다.
허나 지금의 그녀가 바라는 것은 가족이었고, 사랑이었고, 관계였다.
툭, 적검을 떨어뜨린 주디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
“어떻게 해야, 계속 함께할 수 있죠?”
“그건…….”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예전에 그랬잖아요. 모든 인연을 희생하지 말라고. 욕심부리라고. 무엇 하나 손에 놓지 말고, 다 끌어안고 가라고.”
어린 시절 먹고 싶었던 케이크는 힘으로 뺏을 수 있다.
자신을 벌레 보듯 쳐다봤던 귀족의 지위도 검으로 쟁취할 수 있다.
그 밖의 것들도,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욕심도 경쟁에서 승리하여 얻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울었다. 어린아이처럼 못나게, 허나 진솔하게.
말도 안 되는 떼를 쓰는 제자를 바라보며, 스승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가 졌다.”
“……네?”
“내가 졌다고. 어이가 없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검을 위해’ 인연을 희생하지 말라 그랬지, 이미 죽은 사람 앞에서 징징거리라고 했나? 후우, 아무튼 됐어. 네 소원대로 해 주마.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점차 혼잣말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쿤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디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승의 말대로였다. 지금 자신은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지만, 그러한 가르침은 죽은 자와의 관계를 위한 게 아니었다.
브랫 로이드, 아이른 파레이라, 일리아 린제이를 비롯한 현실의 소중한 존재들을 위한 것이었다.
‘꿈에서 벗어나라고 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헌데, 갑자기 자신이 졌다니?
소원대로 해 주겠다니?
어떻게?
요술이 죽은 사람마저도 살릴 수 있다는 건가?
“따라오너라. 떠나기 전에 술이나 한잔하자.”
“……?”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지은 채, 제자가 스승의 뒤를 따랐다. 엉망진창이었던 벌판이 차차 아물어 갔다.
힘들고 지쳤던, 타들어 갔던 주디스의 마음도 차차 안정되었다.
그렇게 둘은 참으로 오랜만에 검이 아닌 술잔을 들었고.
거짓이 아닌 진실된 대화를 나누었다.
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모두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힘든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역시…….”
“역시?”
“무슨 일이 됐든 가만히 있으면 안 돼. 개지랄 한 번은 떨어 줘야…… 그래야 잘 풀린다니까?”
“…….”
“안 그래요? 엉?”
“……네가 맞는 걸로 하자.”
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를 주디스가 웃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눈꺼풀도 자꾸만 감겼다.
그러기 싫었다. 조금 더 술자리를 즐기고 싶었다.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으럅!”
그 순간, 풍경이 바뀌었다.
“…….”
주디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래 그러지는 않았다.
주변을 가득 채운 마인들.
그들의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악마들과.
그보다 어두운 곳에서 자신을 예의주시하는 더욱 강력한 존재들.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붉은 머리 검사가, 서글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꿈에서 깼네.”
그러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은 아니었다.
침을 뱉어 꼬인 심사를 풀어 낸 주디스가, 꿈속 대련으로 얻은 깨달음을 찬찬히 풀어 내었다.
* * *
“…….”
포탈을 타고 새로운 세상에 진입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정보가 떠올랐다.
자신이 지켜야 할 영지의 지리가 손에 잡힐 듯 생생히 느껴졌다. 애석하게도 악마의 정체까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구든 상관없지.’
눈을 뜬 아이른이 두 방향을 차례로 응시했다.
한쪽은 영지의 중심인 성이었고.
다른 쪽은 성에서 조금 떨어진 영주령으로, 규모가 작은 마을이었다.
영웅은 후자를 택했다.
‘아직은,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최대한 사람이 적은 곳으로.
기왕이면 빈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곳에 틀어박혀 악마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생각을 마친 아이른 파레이라가 걸음을 옮겼고, 마을에 들어섰다.
퀘스트가 시작되었다.
* * *
마을에 새로운 사람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