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무수히 많은 (3)
대륙 중부는 서부와 더불어 가장 안전하다고 알려진 지역이지만, 악마가 발호한 이후 그것은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며 몬스터를 처리하던 신성왕국 아빌리우스, 그리고 그 밖의 왕국 병사들이 온통 악마의 흔적을 뒤쫓는 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밤이 될 때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마물도 문제였고, 혼란의 영향을 받아 더욱 흉포해진 들짐승도 문제였다.
여행자와 상인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력이 어정쩡한 이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일 뿐.
금패 용병이자 소드 엑스퍼트를 리더로 둔 베테랑 모험가 파티로서는 별다른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하압!”
촤아아악-!
파티의 리더, 에단이 강하게 검을 내리그었다. 일격. 단 한 번의 공격에 고블린의 숨이 끊어졌다.
어둠을 머금어 2미터의 신장을 자랑하는 녀석이었지만, 엑스퍼트의 검술을 버텨 낼 수는 없었다.
터엉!
퍽!
터엉!
뻐억-!
에단뿐만이 아니었다.
순박한 모습으로 타인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 줬던 조반니, 그 역시 만만치 않은 실력자였다.
라운드 쉴드로 단단하게 공격을 막아 내고, 한손 메이스로 착실하게 데미지를 축적한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과감한 시도로 싸움을 마무리한다. 그야말로 은 등급 용병패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엘프 마법사 쟈린?
몰락 귀족 출신의 방랑기사, 키난 레예스?
둘 역시 조반니에 뒤지지 않았다. 효율적인 마법으로, 깔끔한 검술로 착실하게 몬스터의 수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후우, 끝났다. 모두 고생했어!”
“이걸로 나흘 연속이구만.”
“으, 짜증 나! 견갑에 고블린 피 묻었어!”
“대충 닦고 참아. 내일이면 큰 도시가 나오니까, 거기서 하루 이틀 푹 쉬자고.”
마침내 몬스터 처리가 끝났다.
변종 고블린을 포함해 20마리라는 적지 않은 수, 게다가 매일같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라 피로한 와중이었으나 파티원들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앓는 소리를 하기에는 그들의 경험이 너무나도 풍부했다.
실제로 엘프 마법사 쟈린의 경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법의 불을 일으켜 화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 역시 놀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시체를 옮겨 불구덩이에 집어 던지고, 주변을 정리하고…….
그렇게 전투의 뒤처리마저 끝나가고 있을 때였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에단의 옆에, 쟈린이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어때?”
“응? 뭐가…… 아, 저 친구?”
“어. 저 자칭 아이른.”
“아니, 이제 아이른이라고 안 하잖아. 아론이라고, 저 친구 이름은.”
“하여튼! 어때?”
“실력 말하는 거야? 나쁘지 않지. 너도 봐서 알잖아? 마물이나 몬스터 상대로 쫄지도 않고, 피 봤다고 토 쏟지도 않고. 밸런스도 좋고 힘도 있어. 경력만 쌓이면 은패는 충분히 받겠던데? 굳이 위조 용병패 아니더라도 말이야.”
“……그것뿐?”
“아니, 그럼 무슨 얘기가 듣고 싶은…… 설마?”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을 본 쟈린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니, 뭐…… 대충 얼버무린 그녀가 대화를 끊고 멀어졌다.
잠시 뒷모습을 바라보던 파티의 리더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설마, 진짜 마스터냐고 물어보려던 건 아니겠지.’
아주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10년 가까이 용병 일을 한 베테랑이라고는 하나, 쟈린은 어디까지나 마법사다.
검술에 관한 조예가 깊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런 그녀가 볼 때, 나이에 맞지 않게 침착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아론이 비범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 실제로 비범한 게 맞기도 하고.
‘첫 인상이 우스워서 더 그럴지도. 실제로 나도 놀랐으니까…….’
하지만, 얼토당토않은 생각이다.
에단이 살짝 시선을 위로한 채 아론의 검술을 떠올렸다.
기교와 임기응변을 최소화하고, 대검의 무게감과 단단한 코어의 힘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모습.
훌륭했다.
허나 놀랍지는 않았다.
또다시 웃음을 흘린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유명 검술관, 아니면 왕립 아카데미 출신 정도.”
딱 그 정도다.
물론 그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이긴 했다. 아니, 오히려 부러웠다.
어린 시절부터 용병판에서 굴러왔던 에단은 체계적인 검술에 대한 약간의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몰락 귀족인 키난 레예스에게 가르침을 청했던 적도 있으나, 이미 몸에 익어 버린 검술을 통째로 뜯어고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그러한 실망감이 질시의 감정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자신이 기사들의 검술을 부러워하는 만큼, 기사들 역시 자신들의 경지를 부러워하기도 했으니까.
‘나는 엑스퍼트다.’
바닥부터 시작한 그는 수 없이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강해졌고.
남에게 가르칠 만큼 체계적인 무언가는 없지만, 자신에게 딱 맞는 검술을 일궈냈다.
서부 5왕국의 기사들조차 무시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검술을.
그거면 충분했다.
최고의 기사는 아니지만, 최고의 기사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검술 인생을 걸어온 사람.
“……그게 나다, 키난.”
“…….”
“그게 나라고. 알겠어?”
“뭔 개소리야 갑자기. 술 마셨어?”
“리더한테 말투가 그게 뭐야?”
“리더가 리더다워야 대우해 주지. 헛소리 말고 와서 밥이나 먹어.”
“오, 밥!”
키난 레예스의 독설에도 불구하고 에단의 표정은 해맑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원래도 괜찮았지만, 아론이 합류한 이후 식사의 퀄리티가 더욱 좋아졌다.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감탄한 표정으로 고기를 한 입 베어 문 그가 금발 청년에게 말했다.
“와, 진짜 맛있는데? 어떻게 이렇지? 고기가 다른가?”
“불 조절을 잘해서 그래. 너는 평생 가도 이렇게 못 구워.”
“아니, 아론한테 말했는데 왜 네가 지랄이야?”
“같이 구웠으니까.”
“같이 굽긴, 아론이 다 했겠지. 아론 오기 전에 네 고기는 신발 밑창처럼 질겼어.”
“앞으로 진짜 신발 밑창 구워 주기 전에 그만해.”
“아무튼 대단해. 진짜 맛있어. 이게 사랑의 힘인가?”
“사랑의 힘이죠. 저도, 일리아도 소고기를 제일 좋아해요.”
“하하, 자꾸 그러다가 린제이 가주라도 찾아오는 거 아니야? 그 양반, 듣기로는 엄청 딸 바보라고 들었는데.”
“나도 들은 적 있어. 어쩌면 진짜 쫓아올지도 몰라. 혹시라도 자네 얘기가 아단까지 전해지면 말이지.”
“괜찮아요. 이 정도는 앞에서도 할 수 있는 말인걸요.”
“푸흫헣! 이 친구, 배짱만 따지면 나보다 윗줄인데! 이야…….”
아론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 자신을 아이른이라 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그와 관련된 농을 던지면 부드럽게 잘 받아 주는 편인 그였다.
그게 또 마음에 들었다.
모난 곳도 없고, 생긴 것과 다르게 내성적인 느낌도 아니고. 귀찮고 피곤한 일도 빼지 않고 열심히 하고.
‘신성왕국에 도착하면 따로 다닐 생각이었는데…… 그냥 같이 다녀도 괜찮겠어. 저 친구만 괜찮다면 말이지.’
검술이라도 조금씩 알려 주면 사이가 더 돈독해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물론 서로 검술 스타일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대련의 형식을 취한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이었다.
“아니, 그 많던 고기가 어디 갔나 했더니 쟈린이 다 처먹었네. 뭔 엘프가 이따위야?”
“개소리야. 엘프는 숲에 사는 걸 좋아하는 거지, 채식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진짜 개소리 들어 봤어? 나 잘하는데. 어디 지금부터 해 줄…….”
“아, 다들 헛소리 그만해. 술도 안 마셨는데 웬 헛소리들만 주구장창…….”
“그럼 네가 건설적인 화제 좀 꺼내 봐.”
“그럴까? 용사의 제전 얘기는 어때?”
“용사의 제전?”
“그래. 이번 대회, 누가 우승할까?”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는 키난 레예스.
모두의 표정에 흥미가 돌았다. 심지어 마법사인 쟈린조차도.
‘하긴, 이거만 한 이야깃거리가 없기는 하지.’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싸움과 밀접한 삶을 살고 있는 용병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누가 가장 강한가, 어떤 검사가 대륙 최강인가?’는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 주제였다.
실제로 3대 검사 중 누가 제일인가, 룬텔의 왕이 이안 관주와 일대일로 싸우면 어떻게 될 것인가 따위의 논쟁을 수도 없이 이어 오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차세대를 이끌 최고의 용사’를 가리는 검투 대회가 개최되었다.
그야말로 검사들에게 있어서는, 용병들에게 있어서는 흥분되어 미쳐 버릴 만한 판이 깔린 셈이다.
“아무래도 레이 가문의 캄린 레이가 유력하지 않을까?”
“으음. 강하지, 캄린 레이.”
조반니의 말을 들은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세대 최강’을 가린다는 취지에 맞게, 이번 검투 대회는 60세 미만만 참가 가능이라는 나이 제한이 있다.
즉, 3대 검사나 5대 검술명가의 수장들과 같은 기존의 강자들은 나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을 고려할 때, 캄린 레이는 충분히 우승 후보로 거론될 만한 강자였다.
5대 명가인 레이 가문의 2인자이자, 대륙 10대 강자의 바로 밑 실력이라 평가받는 괴물.
그러한 배경과 명성 덕분에, 현재 대부분의 서부인들은 그의 우승을 기정사실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흑기사단장 아닐까? 신성왕국이 이번 대회를 개최한 이유가 이그넷을 자랑하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있던데…….”
“으음. 하지만 너무 젊지 않나? 이제 겨우 30대 초반인데, 50대의 마스터들을 상대로는 좀…….”
“마냥 제쳐 둘 수 없기는 하지. 누가 뭐래도 역대 최고의 천재니까.”
“뭐, 4강 안에 들 것 같기는 해. 하지만…….”
“하지만?”
“캄린 레이도, 이그넷도 우승은 무리야. 우승은 남부 출신 검사들 중에서 나온다. 100퍼센트 확신해.”
“쯧. 또 나왔구만, 지역부심.”
“아니, 지역부심이 아니라 진짜 그렇다니까?”
조반니의 비아냥에 키난 레예스가 발끈했다.
비록 가문이 폭삭 망하긴 했지만, 언제나 남부의 귀족 태생이라는 것을 자랑스레 생각해 온 그였다.
서부, 중부 출신 검사들 이야기에 반감을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남부의 검사들 역시 명성만 부족할 뿐, 실력으로는 그들에게 거의 뒤지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솔직히 70대 이상의 노땅들은 별거 없어. 나도 인정해. 듣기로는 술, 여자에 빠져서 수련도 제대로 안 한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젊은 층은 달라. 남부 3대 검사라고 들어 봤어?”
“오, 전혀 못 들어봤는데.”
“그럼 지금부터 들어, 새끼야.”
“아니,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우선 남부 마칸 왕국 출신 쟈롯부터.”
키난 레예스의 이야기가 길게 흘러나왔다.
남부의 호랑이 쟈롯, 그와 절친한 사이라 알려진 남부 용병계의 왕 자쿠앙.
두 50대 후반 마스터가 쌓아 왔던 전설적인 일화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조반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사실 그도 전부 아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 자식은 남부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너무 심해서 문제야.’
조반니가 듣기 싫은 티를 냈던 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평범하게 자랑스러워하는 정도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정도가 심했다.
순수하게 남부 출신 검사들의 칭찬만 한다면 모를까, 은근슬쩍 다른 지역의 강자들을 깎아내리기 일쑤였다.
특히 자기 고향인 동부는 전혀 없는 동네 취급하는 게 싫었다.
그런 분위기를 에단도 읽었다.
‘키난 녀석, 평소엔 그래도 자중하더니 오늘따라 더 심하네.’
그가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싸해지는 분위기도 모른 채 끝도 없이 자기 말만 하는 모습. 자신으로선 말릴 길이 없었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에단이 쟈린을 곁눈질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키난 레예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는 그의 턱을 퍽 소리 나게 때렸다.
퍼억-!
“크헉, 응? 어엉?”
“좀 닥쳐.”
“아니, 지금 이게 뭔…….”
“3달 전에 네 목숨 구해 준 거, 이걸로 퉁쳐.”
“…….”
“할 말 없지? 조용히 좀 해.”
‘아니, 난 그렇게까지 하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에단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쟈린의 마법 지원이 워낙 좋다 보니, 파티원 모두가 한 번쯤은 그 도움을 받았다.
그렇기에 자존심 강한 키난이라도 그녀의 말은 듣지 않을까 해서 쳐다봤던 건데, 이렇게 과격하게 처리할 줄은 몰랐다.
“재밌는 친구들이구만.”
“그거 아십니까? 키난은 쟈린한테 처맞을 때가 제일 멋있어요.”
“들었지? 고마워해. 내가 너 멋있게 만들어 줬어.”
“어? 어어, 고맙다. 근데 생각보다 많이 아픈데…….”
그래도, 확실히 분위기가 괜찮아졌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드워프 양반도, 짜증이 드러나던 조반니도, 때린 쟈린과 얻어맞은 키난 레예스도 다들 유쾌하게 웃었다.
바보 같지만 정겨운 모습이었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아론을 쳐다봤다. 그 역시 지금의 분위기가 편했는지, 푸근한 미소와 함께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다.
이 친구는, 나이에 비해 꽤 단단한 실력을 갖춘 아론은 누굴 우승 후보로 생각하고 있을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예?”
“용사의 제전 말이야. 누가 우승할 것 같아?”
“음…….”
“아, 하나 딱 집어서 말하긴 어려운가? 그럼 대충 좋은 성적 거둘 것 같은 사람들 아무나 읊어 봐.”
“그래, 나도 궁금하네.”
“설마 아이른 파레이라를 뽑는 건 아니겠지?”
조반니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 농담이었다.
아무리 아이른 파레이라가 손에 꼽히는 천재라고 해도, 현재 대륙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이라 해도, 이번 경쟁 상대들은 차원이 다르다.
그보다 두 배나 더 산 괴물들이.
200명 밖에 없다고 알려진 소드마스터들 사이에서도 유독 빛나는 별들이 모인 자리에서 두각을 보이기에는,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제전에서 가장 젊은 축인 이그넷 크레센시아에 비해서도 6살이나 어렸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이그넷 크레센시아.”
“음.”
이윽고, 그의 입에서 첫 번째 이름이 흘러나왔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어린 나이 때문에 호사가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지만, 신성왕국 측의 유일한 참가자라는 점에서, 또 쟈린이 말한 소문 덕분에 꽤 많은 지지를 얻고 있었다.
우승자로는 애매할지언정 우승 후보로 놓기에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
“일리아 린제이.”
“어?”
“흐음…….”
허나 다음 이름이 나왔을 때는, 반응이 좋지 않았다.
일리아 린제이.
이그넷에 비견될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이자, 장차 대륙 서부를 떠받칠 최고의 유망주.
허나 이제 겨우 22세인 그녀를, 증명의 땅에서의 패배 이후 별다른 활약조차 없었던 애송이 마스터를 우승 후보 명단에 넣는다고?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브랫 로이드.”
“주디스.”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세 명의 이름이 더 호명됐다.
나름 유명한 이들이었다.
브랫 로이드 역시 거베라의 최연소 마스터로 명성을 높인 천재였고, 주디스는 그런 그와 동문수학한 크로노 검술관의 기재였으니까.
아이른 파레이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조반니와 키난이 말했던 검사들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운 이름들이지. 20년 후라면 몰라도.’
자연스레 에단의 머리를 스쳐 가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왤까?
아론의 저 황당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그는 꽤 오랫동안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
“…….”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농담 좀 적당히 하라고, 이젠 재미없다고 말할 것 같았던 조반니도.
지금까지 자기가 했던 말을 무시하냐고, 남부 검사들은 안중에도 없냐고 발끈했을 것 같았던 키난 레예스도.
여전히 아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쟈린도, 침묵을 유지한 채 아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담담히 읊은 것 같아.’
에단이 아론의 얼굴을 쳐다봤다.
여전히 선한, 그리고 순하기 그지없는. 그래서 탄탄한 검술 실력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챙겨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랬던 친구가 오늘, 지금.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