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47화 (247/388)

◈ 82. 인정할 수밖에 (4)

♩♪ ♬♩♪

여전히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무도회장 안.

전과는 달리 구석진 곳에서 일리아 린제이를 바라보고 있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옅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로이드 영지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내적인 성장을 이룬 그였다.

자신이 세운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검에 대한 열망도, 향상심도, 투쟁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의 자신이 있도록 도와준 ‘주변 사람’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예정보다 빨리 린제이 가문으로 날아온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주디스, 브랫과 더불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이끌어 줬던 존재.

자신의 소중한 친구, 일리아 린제이.

‘그래, 친구. 분명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눈을 감은 지금도 계속 일리아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그녀와 함께했던 추억들이, 전과 조금 다른 의미로 자신에게 다가온다.

그것이 좋았다.

한데 이상하게 두려웠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 경험이 또래보다 몹시 부족하다고는 해도, 지난 몇 년간 여러 사람과 부대끼며 꽤 사교성을 키워 왔던 아이른이다.

허나 이성과 관련된 일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주변의 수많은 연인들을 볼 때도.

결혼으로 맺어져 가정을 이룬 이들을 볼 때도.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이인 브랫&주디스 커플을 볼 때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이 순간 격렬한 파도가 되어 아이른을 흔들었다.

‘……잠깐 바람 좀 쐴까.’

후우, 아이른이 재차 숨을 내뱉었다.

꽤 노력했지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명상도 소용없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의 마음을 더욱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한 장소가 필요했다.

생각을 마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무도회장 밖으로 나서는 오늘의 주인공 중 하나를 보며, 몇몇 이들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그거 아나? 저 친구, 옛날에는 나태 공자라는 멸칭으로 불린 적도 있다고 하더군.”

“음? 그게 무슨 소리야, 소드마스터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믿기 힘든 이야기긴 한데, 또 마냥 거짓말 같지는 않아서.”

“나도 듣긴 했어. 뭐, 어렸을 적에 린제이 영애를 만나고 사람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허어! 그렇다면 내가 제대로 봤군. 오늘 둘이 춤추는 모습을 보면서 내내 느꼈는데, 둘만큼 어울리는 한 쌍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맞아. 나도 그렇게 느꼈어.”

“하, 이거 내일이면 소문이 쫙 퍼지겠군. 가십거리 좋아하는 귀부인들 입 몇 개만 거치면 왕국은 물론이고, 서부 대륙 전역에 그냥…….”

“쉿!”

“응? 왜…… 헙!”

뒤를 힐끔거린 귀족이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조슈아 린제이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리아 린제이의 시선 또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모두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가주도 가주지만, 영애 또한 자기 이야기가 멋대로 도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들의 걱정과는 다르게, 일리아는 귀족들을 보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은 무도회장을 떠나 정원 쪽으로 사라진 자신의 친구, 아이른 파레이라 쪽을 향하고 있었다.

‘잠깐 바람 쐬러 나간 거겠지? 다시 돌아오겠지?’

알고 있었다.

오늘의 만남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의 생신 잔치가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아이른 일행이 가문에 머물기로 했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쉬웠다.

조금 더 얼굴을 보고 싶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손님들께 인사를 하는 와중이라 아주 잠깐씩 힐끔거리는 게 다였음에도, 그렇게라도 계속해서 눈에 담고 싶었다.

‘아니, 진정해.’

일리아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이른과 달리, 그녀는 상대를 이성으로 인식한 지 꽤 시간이 흘렀다.

덕분에 지금의 감정을 주체못해 그의 뒤를 쫓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괜찮아. 그렇게 조급할 필요 없어.

애초에 따라가서 뭐 할 건데?

묻고 싶은 게 있다고?

질문을 던질 용기도 없잖아?

순식간에 떠오른 생각들이 그녀를 얌전하게 만들었다.

또 손님이 오는 것을 보며, 일리아는 부모님과 함께 어색한 미소로 그들을 맞이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들썩이게 만드는 일이, 무도회장 곳곳에서 벌어졌다.

“하아, 좀 더운데? 잠시 산책이라도 갈까…….”

“술을 많이 마셨나? 갑자기 바람 좀 쐬고 싶네.”

“흠흠흠, 흐흥흥…….”

“뭐지? 여보, 딸래미 어디 갔어요?”

“응? 그러게, 방금 전까지 옆에 있었는데.”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는 귀족 영애들.

적당한 핑계를 대고, 혹은 말없이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들이 향하는 방향을 지켜보던 일리아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무도회장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영애들의 의도를 본능적으로 직감한 그녀가 오러를 끌어올렸다.

샤샥.

“음?”

“엇?”

“분명히, 방금 전까지 앞에 있었는데…… 그, 그렇지 않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일리아 린제이.

이에 깜짝 놀란 가문의 손님들이 말을 더듬고 있을 때였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감지한 조슈아 린제이 또한 딸을 따라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그냥 좀 내버려 둬라. 창피하게 흐즈믈그…….”

“…….”

귓가를 파고드는 백작 부인의 조용한, 허나 무섭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가주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 * *

슈슉-!

“어디지? 아, 저기!”

극한으로 오러를 운용한 일리아 린제이가 무도회장 밖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푸른 드레스는 보기에는 아름다우나, 과격한 동작을 수행하기에는 몹시 불편한 복장이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허나 진심을 다한 마스터의 육체 능력은 일반인의 상식을 능가했다.

덕분에 그녀는 한참 늦게 움직였음에도 다른 귀족 영애들을 거의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경!”

“아이른 경! 잠시 시간 좀…….”

“너 누구야? 아이른 경이랑 아는 사이야? 뭔데 마음대로 이름을 불러?”

“그쪽이 무슨 상관이죠? 그리고 지금 그쪽도…….”

“아니, 너랑 말하다가 뒤로 밀려났잖아!”

“파레이라 님! 실례가 안 된다면, 저와 함께 정원을 거닐며 잠시 얘기라도 나눌 수 있을까요?”

“앗! 우연이네요! 저도 마침 파레이라 님께 하고 싶은 질문이 몇 가지 있었는데…….”

‘늦었다!’

하지만 거의 따라잡았다는 것은, 어찌 됐건 조금은 늦었다는 뜻과 같았다.

일리아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에 아이른의 주변을 점령한 영애들을 보면서, 그녀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아이른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지금의 일리아는 예전의 일리아가 아니다.

이그넷의 그늘 밑에서 자존감을 깎아 가며, 자신을 깎아 가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때와 달리, 현재의 그녀는 조금씩 마음의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허나 눈앞의 상황에서 태연할 수는, 결코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크다 보면, 상대가 훨씬 대단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와 반대로 자신은 몹시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의 일리아가 그랬다.

수많은 아리따운 여성들 사이에 둘러싸인 아이른 파레이라.

그의 모습이 더욱 멋있게 느껴졌다.

당황스러운 표정은 순수하게 느껴졌고, 다가서는 여자들을 내치지 못하는 행동도 선한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에 비해 자신은 어떤가.

아이른과 아무 관계가 아닌데도.

꽤 친하기는 하지만, 그래 봤자 연인이 아닌 친구밖에 안 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못난 질투심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그 감정이 어찌나 진한지, 지금 당장 기세를 일으켜서 영애들을 쫓아낼까 하는 생각도 잠깐이지만 들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된다.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저 가냘프고 연약한 귀족 영애들에게 기운을 뿜어낸다?

그것도 마스터의 기운을?

물론 잘 조절하면 큰일이야 없겠지만, 지금의 일리아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복잡하고 격렬한 감정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마치 자신이 펄펄 끓는 냄비라도 된 것 같았다.

“……후우.”

결국, 영애들의 무대포 돌진을 지켜보던 일리아가 조용히 뒤를 돌았다.

저들을 헤치고 아이른의 앞에 설 자신도 없었지만.

설령 앞에 서더라도, 그의 앞에서 예쁜 모습을 보여 줄 자신 또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끝끝내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아, 개미 기어가는 속도로 정원에서 멀어지려던 때였다.

“죄송합니다.”

“네? 무슨…….”

“아! 저야말로 죄송해요! 사색을 방해했군요. 이만 물러갈게요. 하지만 괜찮으시다면 나중에라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없습니다.”

“……왜죠?”

“요즘 검술 수련할 시간이 워낙 부족해서 말이죠.”

“…….”

“혹시라도 저와 검으로 어울려 줄 자신이 있으시다면, 지금 같이 연무장으로 가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그만 가 볼게요.”

완곡한 거절.

아니, 아이른의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꽤 매몰찬 거절이었다.

실제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여리디여린 레이디들에게 검술 대련을 청하다니.

속된 말로 꺼지라고 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쳇.”

“아무리 마스터라고 해도, 매너가 너무 없는 거 아니야?”

“남자가 자기만 있는 줄 아나.”

“어이없어서.”

토라진 표정으로 우르르 무도회장으로 돌아가는 귀족 영애들.

그러거나 말거나 멍한 표정으로 아이른을 쳐다보고 있는 일리아 린제이.

그리고 지친 듯 숨을 내쉬다가, 뒤늦게 그녀와 눈이 마주친 아이른 파레이라.

“어?”

“아?”

“여기 있었어? 언제부터…….”

“아, 아! 아니야. 지금 왔어. 안이 조금 더워서, 밤공기 좀 마시려고 나왔는데, 그, 어, 뭔가 시끌시끌한 분위기라…… 네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네.”

“아아, 그렇구나.”

“응, 그렇지.”

“…….”

“…….”

정적이 감돌았다.

아이른은 생각을 정리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리아와 마주치자 머리가 멈춰 버렸고, 일리아 역시 아이른이 직전에 한 말을 떠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검으로 어울려 줄 자신이 없으면, 죄송하다고?

무슨 의미지?

어쩌면…….

‘나를 생각하고 한 말이야?’

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냥 적당히 둘러댄 거라는 대답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말이 목에 걸렸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오늘의 일리아는 더욱 용기가 없었다.

그렇기에…….

“일리아.”

“응?”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가볍게 대련이라도 할까?”

“…….”

일리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른이 아차했다.

생각해 보니 너무 어이없는 말이었다.

자신도 그렇지만, 상대의 복장은 도저히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무도회 드레스를 입은 여성에게 대련하자고 하다니!

말을 내뱉은 자신을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실수였다.

“응! 그러자!”

“어?”

“가자! 연무장으로!”

하지만 일리아의 대답은 긍정이었다.

그것도 보통 긍정이 아니었다.

정말로 마음에 드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손을 잡아 끄는 모습.

이에 아이른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네 생각을 안 해 준 것 같은데. 복장이…….”

“괜찮아. 우리 마스터잖아? 이 정도는 문제도 안 되지. 응, 그렇고말고!”

“그, 그렇긴 한데…….”

아리송한 표정으로 끌려가는 무도회 복장의 청년, 그리고 쾌활한 얼굴로 연무장으로 진격하는 드레스 차림의 레이디.

이를 정원 풀숲에 숨어 지켜보던 키릴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저 사람들은 무슨…… 기승전 검술이야…… 이거 맞아? 이렇게 흘러가도 되는 거야?”

“으음. 하지만 둘다운데?”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루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빌 스탠튼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조금 진도가 답답하긴 하지만, 저 두 분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풋풋하면서도 단단한 분위기가, 저는 정말 좋다고 생각합니다.”

“……흥.”

키릴이 고개를 돌렸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빌 스탠튼의 말에 더 반박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 역시 망나니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정말로 오랜만에 열린 린제이가의 축제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