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인정할 수밖에 (3)
♩♪ ♬♩♪
무도회장에 은은하게 깔리는 음악.
그보다 조금 부담스러운 사람들의 시선과 그로 인해 형성된 묘한 분위기.
그렇다.
조슈아 린제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건만.
지금,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마치 자신과 아이른 파레이라만을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중에서도 아이른을 향해 쏟아지는 관심이 더욱 컸다.
물론 그것은 일리아 린제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 친구를 바라보며, 그녀는 자꾸만 깨지려는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이틀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검술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 이후 아이젠마르크트에서 재회해 함께 여행을 다녔을 때도, 아이른이 치장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녀였다.
물론 상관없었다.
애초에 일리아가 아이른을 마음에 품게 된 것은 외적인 요소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무너지고 쓰러질 때마다 자신을 일으켜 주고, 방황할 때 함께 곁에 있어 준 선하고도 진실한 마음씨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껏 차려입고 나타난 아이른의 모습은, 그녀가 항상 봐 왔던 아이른의 모습보다 훨씬 파괴적이었다.
‘이상해. 엄청 힘을 준 느낌은 아닌데…….’
그런데도 굉장히 달라졌다는 인상을 받는다.
일리아는 몰랐다.
아이른이 오늘의 만남을 위해 지난 이틀간 쏟은 노력도, 그의 곁에 센스 있는 스타일리스트인 빌 스탠튼이 내내 붙어 있었다는 것도.
지금의 모습은 그로 인한 결실이었다.
검은색과 흰색을 베이스로 아주 옅게 들어간 푸른빛이 과하지 않게, 또 심심하지 않게 아이른의 흰 피부를 받쳐 줬다.
체형에 어울리는 핏과 신발에 들어간 포인트, 깔끔하게 손질된 머리와 특훈을 통해 몸에 밴 예법이 젊고, 세련되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레이디?”
“아!”
재차 자신을 부르는 아이른 파레이라.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본 일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상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늦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손을 잡았다.
삐걱삐걱, 마스터의 육체 능력에도 불구하고 어색하기 그지없는 걸음걸이로, 두 청춘은 무대의 중심으로 움직였다.
“뭐야?”
“뭐가?”
“오늘…… 아니.”
무언가 물으려던 일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야 뻔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꾸미고 왔냐고.
단순히 이곳이 무도회장이기 때문에,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그런 거냐고.
아니면 혹시…….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조금 더 나아가면…….
‘아이른 역시, 나한테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어서?’
바뀐 옷차림.
그것 하나에서 출발한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허나 일리아는 그중 어떤 것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어색하게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아이른이 물었다.
“왜 그래?”
“응?”
“뭐 뭘어보려던 거 아니었어?”
“아, 응. 그랬는데, 잊어버렸어.”
“그…….”
“그, 그것보다, 춤 꽤 잘 추네? 나야 아단 왕국 사람이니 이쪽의 춤에 익숙하지만, 아이른은 아니지 않아?”
아이른의 말을 끊은 일리아가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무서웠다.
지금이 너무 좋지만.
아이른이 평소보다 훨씬 신경 쓴 차림으로 나타난 것도, 용기 있게 다가와 자신에게 춤을 신청한 것도 너무너무 좋지만.
‘혹시라도 내가 생각한 이유가 아니라, 그냥 적당히 분위기 맞추기 위해 그런 거라면…….’
그러면 조금.
아니, 많이 실망할 것 같았다.
일리아는 일리아였다.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왔고,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었으나 여전히 자신감이 부족했다.
뛰어난 배경과 출중한 재능, 아름다운 외모와 고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나 그것은, 아이른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떨리네.’
심장이 두근거린다.
처음 잡아 보는 손이 아닌데도 굉장히 어색하다. 맞닿은 피부로 느껴지는 상대의 감촉이 그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사실은 먼 발치에서 바라볼 때부터 그랬다.
일리아가 아이른의 바뀐 모습에 크게 당황했듯, 그 역시 오랜 친구의 처음 보는 드레스 차림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음악 괜찮네.”
“……그러게.”
주변의 관심이 지워진다.
쏟아지는 시선도, 자신들을 대상으로 한 속닥거림도.
나중에는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의문과 걱정, 고민도 하나씩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서로에 대한 순수한 감정으로 채워 갔다.
일단은…….
지금을 즐기자.
어느새 자연스러운 미소를 입에 건 채, 두 청춘은 오랫동안 춤을 추었다.
* * *
“흠, 크흠.”
“저 사람은 누구지?”
“건방지게…….”
돌연 무도회장에 나타나, 순식간에 린제이가의 영애를 차지해 버린 금발의 청년.
이를 멍하니 지켜보던 젊은 귀족들이 뒤늦게 불만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잠깐, 아주 잠깐 마음을 다잡을 시간만 있었어도 저 자리에 자신이 있었을 텐데.
웬 이름도, 배경도 없는 녀석이 나타나 새치기를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바른 생각이 아니었다.
무도회장에 있는 어떤 청년들보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능력 있고, 용기 있었을 뿐.
그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조슈아 린제이의 기세를 뚫어 내지 못했을 터였다.
게다가 그러한 분위기를 뚫고 도착해서 춤 신청을 했더라도, 일리아는 결코 그를 받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아이른이 빠르게 행동한 덕분에 창피를 면한 셈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허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그런 쪽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부끄러운 질투심으로 무장한 젊은 귀족들이 아이른을 헐뜯기 위해 이런저런 말을 내뱉었다.
그때, 뒤편에서 놀라운 정보가 들려왔다.
“어떻습니까? 아이른 파레이라 공의 모습이. 아주 훌륭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오빠 인물이 원래 좋으니까.”
“맞습니다. 그것이 가장 기본이지요. 하지만 그 훌륭한 인물이 더욱 빛나도록 한 이 빌 스탠튼의 노고도 잊지는 말아 주십사 하는…….”
“안 잊어, 안 잊어! 키릴이 인정 안 해도 나는 인정할게! 고양이가 보기에도 지금의 아이른이 전보다 훨씬 멋져!”
‘아이른 파레이라?’
‘20대 초반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헤일 왕국의 천재 검사?’
‘일리아 린제이를 증명의 땅에서 꺾었다는 그 사람?’
믿기 힘들었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가장 큰 특징은 그가 들고 다니는 커다란 요술검, 그리고 옆을 항상 따라다니는 요술 고양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뒤편에서 고기 요리를 먹고 있는 루루를 보며, 그들이 다시 아이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는 그를 깎아내릴 수 없었다.
출신도 불분명한 주제에 겉모습만 봐 줄 만한 놈팽이가 아니었다.
무도회장의 중앙에서 일리아 린제이와 춤을 추고 있는 저 청년은.
대륙에서 손꼽히는 재능과 실력을 가지고 있는 소드마스터였으며.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크로노 검술관을 배경으로 두고 있는데다가.
심지어 얼굴까지 잘생긴, 그야말로 흠잡을 구석을 찾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인생 부조리하군.”
“하아…….”
“술이나 마실까.”
씁쓸한 표정을 지은 남자들이 관심을 돌렸다.
몇몇은 음식과 술에 손을 댔고, 몇몇은 다른 영애들을 공략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런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오늘의 주인공, 조슈아 린제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이 그러면 그렇지. 역시 내 딸에게 너희들은 너무 아까워.’
부인의 말로는, 이번 무도회에 참가한 젊은 녀석 중 몇몇은 꽤 평가가 좋다고 들었다.
인물도, 실력도 출중한 덕분에 많은 이들이 그들을 사윗감으로 눈독 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뭔가.
그들 모두가 자신의 간단한 테스트조차 뚫어 내지 못했다.
살기를 보인 것도 아니건만, 자신이 잡아먹을 것도 아니건만 하나같이 꼬리를 만 강아지가 되어 땀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반면에…… 아이른은 나쁘지 않았지.’
시선을 돌린 그가 무도회장 중앙을 쳐다봤다.
깔끔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춤을 이어 가는 사랑스러운 딸,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그중에서도 아이른 쪽에 눈을 고정한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인정해 주마.’
검술이 뛰어난 거야 이미 알고 있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딸의 곁에 있기에 부족했다.
검 말고는 관심조차 없는 듯한 평소의 모습과 가끔 보이는 얼빠진 표정을 생각할 때마다, 그런 녀석에게 깊게 빠져 버린 일리아를 볼 때마다 조슈아는 가슴속에서 용암이 끓는 듯한 기분을 느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보다 훨씬 상대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나온 아이른의 모습을 보며.
그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춤까지만이다. 그 이상은 아직이야.”
“……에휴.”
심각한 표정으로 아이른을 품평하는 조슈아 린제이를 보며, 백작 부인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 린제이의 일도 있고, 일리아 린제이가 워낙 사랑스러운 딸인 것도 해서 어느 정도의 과보호는 인정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심했다.
누가 봐도 빠지는 곳이 없는 훤칠한 청년이 딸에게 관심을 보이면 즐거운 표정을 지어야지, 뭐가 그렇게 못마땅해서 저런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단 말인가.
‘그러다가 저 청년을 다른 처자한테 뺏기기라도 하면, 그때는 어떻게 하려고!’
백작 부인이 일리아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닌 척 태연한 모습을 보이곤 있지만, 어머니기에 알 수 있었다. 딸이 이미 사랑에 빠진 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재차 한숨을 쉰 그녀가 몰래 가주의 발을 밟으며 말했다.
콱
“표정 좀 풀고 웃어라. 오지랖 부리지 말고.”
“으음…… 알겠소.”
조슈아 린제이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둘을 지켜보던 몇몇 노귀족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은 모두가 린제이 가주를 딸바보라고만 알고 있지만, 그 전에는…….
‘그보다 더한 사랑꾼이었지. 저 날카로운 외모가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잡혀 사는 조슈아 린제이를 보며, 노귀족들이 계속해서 푸근한 미소를 유지했다.
* * *
“…….”
일리아 린제이와의 춤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아이른 파레이라.
그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자신의 소중한 친구를 바라봤다.
린제이 백작내외와 함께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도.
독한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콧잔등을 찡그리는 모습도.
쿠키 하나를 집어 오물오물 먹는 모습도.
전과 달랐다. 많이 달랐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달라지지 않았다. 함께 여행을 떠났을 때도 일리아는 저런 모습이었다.
술이 약하진 않으나 독주는 좋아하지 않았고, 과자를 먹을 때면 식사를 할 때보다 귀엽게, 천천히 씹어 넘기고는 했다.
그렇다.
달라진 것은 자신의 마음이었다.
‘나…….’
일리아를 좋아하는구나.
비로소 감정을 자각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친구가 아닌 이성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일리아 린제이를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