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20화 (120/388)

◈ 38. 일리아 린제이 (4)

대부분의 귀족 가문은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을 깃발이나 의복에 새겨 넣는다.

역사가 깊고 세가 강한 곳은 이를 패(牌)로 만들어 중요한 손님이나 친우, 우방세력에 건네기도 하는데, 서부대륙의 5대 검술명가는 전부 이러한 상징패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귀한 상징패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사람들은 린제이 가문의 백금패를 꼽을 터였다.

꽤나 후하게 상징패를 뿌리는 다른 네 가문과 달리, 린제이 가문은 정말로 깊은 관계를 맺은 존재들에게만 이를 선물하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혈맹이 아니면 받을 수 없는 귀물.

그러한 물건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힌츠로서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진짜라고? 아니, 그럴 리가?’

린제이 가의 백금패가 어떤 물건인데!

적어도 저런 젊은 청년이 쉽게 꺼낼 만한 물건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아마 십중팔구는 거짓말일 것이다.

정교한 위조품을 통해서 일리아 린제이의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수작일 게 분명했다.

허나 만에 하나 진짜라면, 그 사실만으로도 훌륭한 기삿거리다.

아이젠마르크트 최고의 기자라고 자부하는 힌츠는 그 가능성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근처 건물에 몸을 숨긴 그가 뾰족한 귀를 쫑긋 세웠고, 이내 문지기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죄송하지만, 확인을 위해…… 제게 잠시 백금패를 맡겨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한껏 당황한 목소리.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존재를 ‘일리아 린제이 양’이라고 부르는 것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백금패를 꺼내는 것 하며.

문지기 선에서 처리할 일이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백금패의 진위 여부를 따질 안목도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백금패를 건네받은 문지기가 황급히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보다 높은 직급의 인물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이후 찾아온 정적 속에서 아이른 파레이라는 한결같은 표정으로 사람을 기다렸고.

‘제발, 제발, 제발 진짜여라!’

간절한 마음으로 저 청년의 말이 진실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일단 사진이라도 찍어 두자.’

흥분을 억지로 가라앉힌 힌츠가 마법 사진기를 꺼내 아이른 파레이라의 모습을 찍었다.

들키지 않도록 조심히, 세심하게, 다각도로.

그러는 사이, 굳게 닫혀 있던 저택의 대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지기와 함께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인상의 여성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모습을 본 엘프는 잽싸게 둘이 함께 있는 광경을 사진기에 담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호위기사, 엠마 가르시아!’

린제이 가의 가주 조슈아 린제이가 특별히 신임하는 기사로, 30대 중반의 나이에 비해 굉장히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자였다.

호위 임무뿐만 아니라 일리아 린제이에 관련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처리하는 중요한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여기까지 나왔다는 것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건넨 백금패가 진짜라는 것!

대박의 조짐을 느낀 힌츠가 다시 한번 사진을 찍었다.

마주 선 아이른 파레이라와 엠마 가르시아의 얼굴이 더욱 잘 보이도록.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귀는 활짝 열려 있었다.

이윽고 엠마 가르시아의 입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갑습니다. 일리아 린제이 님의 호위를 맡고 있는 엠마 가르시아라고 합니다.”

“아이른 파레이라입니다. 일리아 린제이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렇군요. 우선, 린제이 가의 백금패는 돌려드리겠습니다. 확실한 진품이더군요. 확인 과정이 혹시나 언짢으셨다면 부디 노여움을 푸시기를. 이와 관련하여 귀찮은 일을 여러 번 겪은 터라…….”

“괜찮습니다.”

아이른이 담담히 말했다. 그는 이런 것 가지고 짜증을 낼 정도로 성격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바깥에 세워둔 것도 아니었으니 전혀 상관없었다.

허나 이어지는 엠마 가르시아의 말에는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금패의 주인께 대단히 실례되는 말입니다만, 아가씨께서는 만남을 거절하셨습니다.”

“……거절했다고요?”

“그렇습니다.”

“…….”

“지금 이곳에 계신 아가씨는 린제이 가의 소가주가 아닌, 수행을 위해 증명의 땅을 방문한 한 명의 기사로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원래라면 마땅히 린제이 가의 귀한 손님을 맞이해야 마땅하지만, 지금은 온전히 수행에 집중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셨습니다.”

엠마 가르시아의 설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단히 실례되는 행동인 것은 아가씨께서도 알고 있다.

허나 수행이 끝나는 날, 그에 대한 사죄를 위해 직접 손님께 찾아뵐 것이니, 부디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이를 들은 아이른 파레이라는 깊은 눈으로 린제이 가의 호위기사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을 베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

이 대화를 들은 힌츠는 또다시 놀라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가문의 백금패를 가져온 상대조차 만나 주지 않는다고? 이 무슨…….’

다시 한번 말하지만, 린제이 가문의 백금패는 여타 가문의 상징패에 비해 그 무게감이 남다르다.

약 9년 전, 칼 린제이가 패배 때문에 가문 전체가 외부 손님을 받지 않았을 때조차 백금패의 소지자에 한해선 예외를 두었으니, 지금 일리아 린제이가 보이는 태도는 굉장히 이상하다 보는 것이 맞았다.

‘일리아 린제이에게 무슨 일이 있나? 단순히 외부인과의 접촉을 꺼리는 수준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과한데…….’

꿀꺽.

마른침을 삼킨 힌츠가 더욱 진지한 얼굴로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일리아 린제이에 관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지금 당장 벌어질 일이 더욱 중요했다.

저 금발 청년이 쉽사리 물러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얼핏 보면 유해 보이는 외모지만, 저런 타입이 고집을 부리면 고래 힘줄보다도 질긴 법이다.

그렇다고 호위기사가 일리아 린제이의 명을 어길 수도 없으니, 어떤 식으로든 충돌이 벌어질 것은 자명한 일.

‘과연 어떻게 될까. 기왕이면 치고받고 싸우는 편이 좋은데…….’

물론 이런 기사를 쓰면 린제이 가의 압박이 들어올 수도 있지만, 이럴 때는 자신이 엘프라는 사실이 굉장히 유리하게 작용한다.

종족 간의 분쟁을 극도로 꺼리는 신성왕국이 방패가 되어 줄 테니까.

그러니까 뭐든 보여 줘.

어서, 빨리!

힌츠는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상황에 더욱 몰입했다.

물론, 그의 바람이 없더라도 분위기는 점점 좋지 않은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

“…….”

아이른 파레이라가 엠마 가르시아를 바라본다.

잠시 고개를 숙였던 엠마 가르시아도, 아이른 파레이라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철 가면을 쓴 듯 단단한 표정으로 린제이 가의 손님을 바라본다.

그 불편한 상황에 뒤에 있던 문지기가 땀을 한 바가지나 흘렸을 때였다.

조용히, 아이른 파레이라가 질문을 던졌다.

“일리아 린제이가, 나와 만나는 걸 거절했다고 했죠?”

“그렇습니다만.”

“사정을 설명할 때, 내 이름은 말씀하셨습니까? 아이른 파레이라가 찾아왔다고?”

“……올라가서 말씀드릴 예정입니다. 아까 말했듯이, 아가씨께서는 오늘의 실례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

“다시 물어봐 주세요. 일리아 린제이에게, 네 친구인 아이른 파레이라가 찾아왔다고. 지금 당장 만나고 싶다고. 그래도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때는, 얌전히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맺은 아이른이 단단한 시선으로 앞을 바라봤다.

“…….”

엠마 가르시아는 말문이 막혔다.

이 청년이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린제이 가의 백금패를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아가씨를 ‘친구’라고 부르는지.

심지어 아가씨께서 왜 자신을 만나 줄 거라 확신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화를 내도 한참 전에 냈을 터였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저자의 눈이.

가슴을 당당히 펴고 서 있는 저자의 태도가.

‘아이른 파레이라’라는 이름을 말할 때 담긴 진한 울림이.

지금의 말을 아가씨께 꼭 전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고개를 숙인 엠마 가르시아가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른은 차분히 기다렸고, 문지기는 여전히 힘겨운 기색으로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보다 한참 떨어진 곳에 숨어 있는 힌츠는 숨을 죽이고 다음에 벌어질 일을 기다렸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재차 모습을 드러낸 엠마 가르시아가, 놀람을 숨기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

“……!”

놀란 것은 호위기사뿐만이 아니었다.

문지기도 놀랐고, 힌츠는 더 놀랐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저택 안으로 들어간다.

그 말은, 그가 지금까지 했던 말들이 전부 사실이라는 뜻과 같았기 때문이다.

‘뭐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전문 도박집단 ‘블랙 스컬’ 패거리를 혼자서 제압할 정도의 실력자.

린제이 가문을 상징하는 백금패의 소유자.

심지어 외부인과의 교류를 일절 원치 않는 일리아 린제이가 ‘친구’라고 인정한 인물.

‘그런 대단한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고?’

이 내가?

서부대륙은 물론이고, 웬만큼 유명한 검사들은 대륙 어디 출신이든 빠삭하게 꿰고 있는 자신이?

흥미보다도 짜증이 솟구쳤다.

자존심에 깊은 스크래치가 난 힌츠가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아이른 파레이라, 아이른 파레이라, 아이른 파레이라…….”

자신의 정보망을 총동원해서 두 시간 안에 정체를 까발려 주겠어.

열혈 기자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괴짜 엘프, 힌츠가 날렵한 걸음걸이로 거리를 질주했다.

* * *

저택의 안으로 들어선 아이른 파레이라는 얌전히 엠마 가르시아의 뒤를 따랐다.

일리아 린제이를 만날 수 있는 건 다행이지만,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동안 잘 지냈냐고?

어째서 그렇게 힘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냐고?

혹시 오빠 때문이냐고? 그런 민감한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그러는 사이 둘은 일리아의 방에 도달했다. 엠마 가르시아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여기까지.”

대화를 듣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호위기사임에도 불구하고 멀찍이 떨어지는 그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일리아 린제이는 대륙에 100명밖에 없는, 소드마스터에 오른 천재 중의 천재였으니까.

‘그런 일리아를 걱정한다는 게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크게 심호흡을 한 아이른이 생각했다.

과연, 이 문 너머의 일리아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할까?

어떤 말을 꺼낼까?

“…….”

답이 나올 리 없는 질문.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날려 버린 그가 똑똑, 노크를 했다.

“들어와.”

곧바로 들리는 목소리.

예전보다 성숙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을 하며, 또다시 심호흡을 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철컥, 손잡이를 돌렸다.

비로소 문이 열리고.

기품 있는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는, 13살이 아닌 18살의 일리아 린제이.

예전에 자주 봤던 살짝 차가운 느낌의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아이른.”

“……일리아.”

가장 처음 떠오른 감정.

그것은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검투장에서 봤던 그녀의 모습은, 소드마스터라는 지고한 경지에도 불구하고 위태롭고 그늘진 느낌이 들었다.

허나 지금 자신에게 보여 주는 웃음은 그렇지 않다.

새하얀 얼굴, 새하얀 치아.

그리고 그보다 더 환한 미소.

절로 마음이 놓인 아이른 파레이라가 풀어진 얼굴로 일리아 린제이에게 다가갈 때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

“개인적으로 편지도 보냈는데, 사정이 있다고만 하고. 심지어 네가 쓴 답장도 아니더라?”

“…….”

“뭐 좋아.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우선이겠지. 대신…….”

납득할 수 없는 이유라면, 매우 실망할 거야.

말을 마친 일리아 린제이가 더욱 환한 미소를 지었고, 이를 본 아이른 파레이라가 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내 사정을 먼저 이야기하는 게 맞겠구나.’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 앉은 그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눈치를 보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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