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일리아 린제이 (3)
“크헉!”
콰당탕!
아이른 파레이라의 주먹에 맞은 흉터 사내가 쓰러졌다.
단순히 제자리에서 쓰러진 것이 아니라, 날아갔다는 표현에 가까울 정도로 밀려나 주변의 테이블과 의자를 넘어뜨렸다.
그 화려한 광경에 내기를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숨을 죽였다.
몇 명은 깜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물론 아이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저벅저벅 흉터 사내를 향해 걸어간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 차례입니다.”
“…….”
“기절하지 않은 거 알아요. 일어나세요.”
“흐, 허억!”
귓가에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에 흉터 사내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그러자 무표정한 금발 청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더듬었다.
“어, 으, 아…….”
“아니면, 항복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일리아 린제이의 거처를 알려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여기저기서 바닥에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일어나는 소리였다.
어느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남자들을 보며, 아이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씨발! 너 이 새끼, 우리가 누군 줄 알아?”
“미친놈이 어디서 행패를…… 뒈지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어디서 한가락 하던 놈인 모양인데, 그래 봤자 이름도 안 알려진 주제에…… 여기가 다른 동네처럼 어설픈 곳인 줄 알아?”
순식간에 쏟아지는 욕설, 그리고 협박.
아이른 파레이라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주점 안을 죽 훑어봤다.
좋지 않던 예감이 들어맞았다.
안에 있던 손님들 모두가 흉터 사내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그 전에 이곳 자체가 이 녀석들의 아지트 같은 개념인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른이 이곳을 피하지 않은 건,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그곳이 위험한 곳이든, 위험하지 않은 곳이든 상관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리 위험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빠, 돌아다닐 때 얼빠진 모습으로 다니지 마.’
불현듯 키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순한 외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시비를 걸지도 모른다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적당히 티를 내고 다니라고.
그다지 공감 가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지금만큼은 동생의 이야기에 따르기로 했다.
그편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아이른이 몸을 움직였다.
그를 막아서려는 자들이 몇몇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압박감 때문에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그렇게 금발 청년은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 앞에 도착했다.
손등에 해골 문신이 있는 거구의 사내였다.
잠깐의 침묵.
둘 사이에 형성되는 기묘한 분위기.
그 분위기를 뚫고, 아이른 파레이라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나와 내기하겠습니까?”
“……!”
“룰은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한 번씩 주먹을 교환하는 것으로. 어떻습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제가 원하는 것 역시 동일합니다.”
“이 자식이…….”
여유롭게 앉아 있던 해골 문신 사내가 입을 열었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다른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가 이 무리의 대장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른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그냥 알 수 있었다. 감이었다.
그리고 그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 남자는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고.
아이른이 재차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강하게 기세를 끌어올린 채였다.
화아아악-!
“……!”
“내기를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는 굳이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알고 싶은 정보만 얻으면 조용히 이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돈도 드릴 거고요.”
주점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번에는 해골 문신 사내 때문이 아니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기세가 모든 사내들을 강하게 옥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 없는 이도, 감이 둔한 자도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강렬한 기운.
태산이 덮쳐오는 듯 묵직한 압박을 느낀 이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금발의 청년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덜컥, 소리와 함께 주점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귀가 뾰족한 미형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후, 뭐야. 엄청 덥네. 불을 많이 때서 그런가? 아니면 남자들 사이의 뜨거운 우정 때문?”
“…….”
“아,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었군. 미안합니다. 내 사과하리다.”
모자를 벗은 사내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살짝 얄밉게 느껴졌는데, 누구도 트집 잡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귀가 뾰족한 사내 역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인사를 마친 그가 경쾌한 걸음걸이로 아이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검사 나리?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아이른 파레이라입니다.”
“아이른 파레이라, 파레이라, 파레이라…… 서부 출신은 아닌 것 같군요. 아이젠마르크트에도 처음 오신 것 같고.”
“그렇습니다만.”
“아! 죄송합니다. 시비를 걸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다만, 지나가다 듣기로는 무언가 이곳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신 모양인데…… 아, 문밖에서 어떻게 나리의 목소리를 들었는지는…….”
말을 하던 그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그에 맞춰 뾰족한 귀가 쫑긋 움직였는데, 그때야 아이른은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엘프(Elf)구나!’
엘프.
대륙 동부에 모여 사는 종족으로, 보통 사람보다 아름다운 외모와 뾰족하고 밝은 귀, 호리호리한 체형이 특징인 존재다.
드워프나 오크보다도 인간과 교류가 적다고 알려져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눈앞의 사내는 확실히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여튼, 궁금한 게 있다면 저와 함께 이야기하시죠.”
“…….”
“이곳에 있어 봐야 험한 꼴만 볼 뿐, 원하는 걸 얻기는 힘들 겁니다. 그게 뭐가 됐든지 말입니다.”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아이른 파레이라가 물었다.
뺀질거리는 태도와 표정이 묘하게 거슬리는 와중에, 눈동자만은 꽤나 정직한 느낌이 들어 어떤 성향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 혼란을 숨기기 위해서일까.
말투도 평소보다 퉁명스럽게 튀어나왔다.
허나 엘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유롭게 미소를 짓더니, 품에서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진 신분패를 꺼내 보여 줬다.
아니, 다시 보니 그림이 아니라 마도구로 촬영된 사진이었다.
흰 치아가 드러나게 웃고 있는 엘프의 사진 밑에는 이름과 함께 소속, 직위가 적혀 있었다.
[위클리 아레나 소속 수석기자, 힌츠]
“위클리 아레나라는 주간지에 올릴 소식을 다루는 수석기자, 힌츠라고 합니다. 아이젠마르크트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특히 검투장에 관련된 일들은 대부분 알고 있죠. 아마 여기 사람들보단 훨씬 유익한 정보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
생각지도 못했던 상대의 직업에 아이른이 입을 다문 채 머리를 굴렸다.
신문, 그리고 기자.
낯설지만 처음 접하는 단어는 아니었다.
사회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소식들을 신속하게,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정기 간행물. 그리고 거기에 실을 기사를 취재하는 사람.
물론 신문을 본 적도, 기자를 마주한 적도 한 번도 없었다. 그냥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 아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아이른조차도 기자와 엮이면 피곤하다는 사실 정도는 건너 들어 알고 있었다.
문제는, 지금의 자신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급하다는 사실이었다.
“아차!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제가 무언가를 바라고 이러는 것은 아니라는 것,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
“…….”
“물론 아무런, 정말로 아아아무런 사심도 없이 이러는 건 아니긴 합니다만…… 하하, 어차피 효과적으로 명성을 알리기 위해서는 누구를 통해서든 인터뷰를 해야 하니, 기왕이면 그때 제 이름 한 줄 정도 기억만 해 주십사 하는 의미에서…….”
힌츠의 입에서 이런저런 설득의 말이 매끄럽게 쏟아져 나왔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오랫동안 입을 열고 있는데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신이 내보였던 기세 때문이 아니라, 이 엘프 기자 자체가 건드리기 어려운 사람인 것 같았다.
‘확실히 아는 건 많을 것 같아.’
후우, 아이른이 한숨을 내쉬었다.
명성이니, 인터뷰니 하는 건 전혀 관심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의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정도 대가는 충분히 지불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눈에 힘을 주고 힌츠를 응시했다.
묘한 압박을 느낀 엘프가 흠칫 고개를 뒤로 빼는데, 아이른의 입에서 용건이 흘러나왔다.
“일리아 린제이의 거처가 어딘지 아십니까?”
“……예?”
“증명의 땅의 챔피언이자 소드마스터, 일리아 린제이를 어디 가면 볼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
아이른의 말을 들은 힌츠가 한 발짝, 아니 반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얼굴은 여전히 웃는 채였다. 허나 눈치 빠른 사람은 알 수 있을 정도로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그에게, 아이른 파레이라가 다시 한번 말했다.
“알고 있다면, 안내하시죠. 일리아 린제이의 거처로.”
* * *
‘이것 참, 난감한데?’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의문의 청년, 아이른 파레이라를 힐끔거린 힌츠 기자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그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꽤 기분이 좋았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아이젠마르크트의 사람들은 싸움과 도박에 중독되어 있고, 그렇기에 새로운 강자의 출현은 언제나 환영한다.
15년 넘는 기자 생활로 잔뼈가 굵은 자신조차 모르는 젊은 실력자의 출현은, 그 자체만으로 흥미로운 기삿거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해서 먼저 안면을 터 두고, 나중에 있을 인터뷰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생각이었는데…….
‘곧장 챔피언을 찾아가는 미친놈이었다니.’
물론 일리아 린제이의 거처가 어디인지를 모르는 건 아니다.
기자라면, 아니 이곳에서 몇 달 생활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영광스러운 챔피언의 자리에 올라 있음에도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몇몇 기자들이 린제이 가의 재녀를 취재하려다 호위 기사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 힌츠는 챔피언을 만날 생각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만날 가능성이 0.01퍼센트도 되지 않는 일에 매달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젠마르크트의 영주가 찾아와도 돌려보내는 마당에,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지.’
에휴, 또다시 작게 한숨을 내쉰 힌츠가 생각했다.
이 점잖게 미친 청년에게 거처만 알려준 뒤, 잽싸게 도망가야겠다고.
괜히 같이 있다가 자신까지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물론 종족이 다른 자신을 심하게 핍박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둘은 어느새 커다란 저택의 앞에 도착했다.
전체적으로 투박한 건물들이 많은 아이젠마르크트에서 손에 꼽히게 우아한 장소였는데, 대문 앞에 문지기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힌츠가 쓸데없이 우아한 자세로 그쪽을 가리켰다.
“저곳이 바로 챔피언이 머무는 저택입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하하, 뭘요.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아! 위클리 아레나의 힌츠, 힌츠! 잊지 마시고, 진짜로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말없이 인사한 아이른이 대문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며, 힌츠는 미련 없이 신형을 돌렸다.
아까 다짐했듯, 구태여 이곳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는 북부 광장 쪽에 유망주 하나가 목격됐다는데, 거기를 파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허나 그러한 생각은 뒤에서 들려오는 금발 청년 목소리 때문에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여기, 린제이 가문의 상징패입니다.”
“…….”
“린제이 가의 손님으로서, 일리아 린제이 양을 만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뭐라고?’
린제이 가문의 상징패.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들은 힌츠 기자가 경악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