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크로노 검술관 (3)
“뭐, 뭐야?”
“천둥인가? 비도 안 오는데?”
중개소 뒤 공터에 있던 이들이 깜짝 놀라 말했다.
한적하고 고요하던 저녁에 난데없이 엄청난 소리가 내리꽂히니 당황한 것이다.
물론 천둥이 친 것은 아니었다.
소리의 정체는 바로 한 청년이 휘두른 검격.
대검을 거둔 아이른 파레이라가 사각판의 점수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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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건가?’
낮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른은 겸손했으나, 자신의 수준을 모를 정도로 어수룩하지는 않았다.
당장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힐 버넷조차 말하지 않았는가.
이미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것 같다고.
‘잘은 몰라도, 동패는 충분히 받을 수 있겠지.’
그가 측정기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중개소장에게 물었다.
“어때요?”
“네, 네?”
“점수요. 기준을 모르다 보니, 높은 건지 낮은 건지 잘 몰라서요.”
“아…… 잠시, 잠시만요.”
중개소장이 당황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는 여태껏 수많은 이들의 충격량 측정을 참관했다.
시골 마을에서 뛰쳐나와 처음 검을 든 인물의 검도,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용병의 검도, 그런 베테랑들조차 한 수 접어주는 비범한 인물의 검도, 모두 봤다.
허나 기억 속의 누구도 1만 점을 돌파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마도구를 선물한 황금패 용병조차도.
‘……오작동인가?’
중개소장이 마도구와 아이른 파레이라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물론 이 청년이 애송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허공에서 검을 꺼내는 것도 그렇고, 보통 사람은 제대로 휘두르기도 힘들만한 무게를 쉬이 다루는 것도 그렇고, 방금 전의 소리도 그렇고.
아마 명사의 지도를 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명문가의 귀족일 수도 있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그가 말했다.
“저기……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 했죠?”
“아이른입니다.”
“예, 아이른 님. 그, 죄송하지만 질문 하나…… 그러니까, 검은 도대체 어떻게 꺼내신 거죠?”
“대충 마법 같은 겁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견문이 좁아서…… 하하.”
중개소장의 말투는 아이른이 검을 들기 전보다 훨씬 공손했다. 설령 귀족이 아니라 한들, 쉬이 대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청년이다.
마른침을 삼킨 그가 말을 이어갔다.
“점수는 훌륭합니다. 동패는 물론이고, 은패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수준…… 아,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처음 용병패를 만들 때는 은패까지가 한계입니다. 그 위는 신용, 실적이 쌓여야 가능한 거라…….”
“그러면 은패를 받겠습니다.”
“아, 그게…… 죄송하지만, 한 번만 더 측정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그, 가끔 측정기가 오작동하는 경우가 있어서요. 물론, 당연히 아이른 님의 실력을 낮게…… 아니, 그러니까…….”
“알겠습니다. 다시 하죠.”
아이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기회는 한 번뿐이 없다는 식으로 말해놓고 이러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그리 힘든 일도 아니니 상관없었다.
다시 대검을 든 그가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신체의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파악하고, 통제하고.
마지막으로 방금 전에 있었던 타격 시의 감각을 떠올린다. 그리고 보완할 점을 머릿속으로 계산한다.
이윽고, 두 번째 검이 휘둘러졌다.
쩌어어어어어어어엉!
“으앗!”
“또 뭐야!”
또다시 울려 퍼진 굉음에 사람들이 몸을 떨었다.
아이른의 측정을 구경하던 사람들마저 그랬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음에도 놀랄 정도로 소리가 컸던 탓이다.
모두의 눈이 사각판으로 향했다.
치직, 치직. 전에는 없었던 잡음이 들려왔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잠시 후, 점수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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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까보다 더 높은 점수.
중개소장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측정을 구경하던 이들도, 뒤늦게 소리의 정체를 파악해 몰려든 사람들도 모두 멍하니 점수판만을 바라봤다.
말을 꺼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딱 한 명 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중개소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더 해야 할까요?”
“……아! 아닙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결과는…… 은패입니다. 바로 등록하러 가시죠! 얼마 안 걸립니다!”
중개소장이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행동이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아이른은 처음과 같은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은패가 첫 등록 시에 얻을 수 있는 최고 등급입니다. 결코 아이른 님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얘기를 나누며 건물로 들어가는 두 사람.
이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용병들이 말했다.
“지금 내가 본 거, 진짜야?”
“그러게. 나도 내 두 눈이 의심스럽다.”
“만 천 점이라고? 그게 가능해? 웬만한 엑스퍼트도 그렇게 나오기 쉽지 않을 거 같은데?”
“5왕국 출신 기사인가?”
용병 수준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점수에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중 한 명이 검을 빼 들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자신도 힘을 측정해보려는 것이다.
자세를 취한 그가 진지한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터어어엉!
치직, 치직……
[86122]
“이거 고장 난 거 아니야?”
“미친, 팔만? 너 언제 각성했냐? 언제 소드마스터가 된 거냐고.”
“뭐야, 그럼 저 녀석은 운으로 은패를 땄다는 말이야?”
“으으음…… 그래도 실력이 아예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아까 들었잖아. 저 녀석이랑은 소리부터가 달랐다고.”
“그건 그렇긴 한데…….”
용병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엑스퍼트 급 실력자다, 아니다, 그렇게 보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 보였다, 그럼 아까 그 소리는 뭐냐, 그러니까 실력 좋은 건 맞는데 아무리 그래도 엑스퍼트는 아니다, 내 생각엔 엑스퍼트가 맞는 것 같다…….
흥분한 몇이 언성을 높이다 말고 주먹까지 휘두르는 가운데, 모든 걸 보고 있던 한 명이 조용히 생각했다.
애초에 튼튼하기로 소문난 마도구가 고장 난 이유가 무엇일까?
잠시 고민하던 그가 이내 헛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하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그렇게 알칸트라 중개소에서의 자그마한 해프닝이 끝이 났다.
* * *
“뭐? 은패?”
“예.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여관 ‘검의 요람’으로 돌아온 아이른이 품에서 은패를 꺼냈다.
에드가는 딱딱하게 굳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앞의 청년이 은패는커녕 동패도 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개소장에게 데려다준 이유는, 자기 주제를 알고 적당히 빠지라는 뜻을 돌려서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그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헌데 눈앞에서 반짝이는 은패를 보고 있자니, 어떤 말을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재미있는 경험 했어요.”
“어? 어어, 그래.”
“혹시 저녁을 방으로 가져다주실 수 있나요? 간단한 고기 요리, 빵, 그리고 훈제 생선요리면 좋겠는데.”
“아아, 물론이지. 가져다줌세.”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에드가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사실 쓸데없는 행동이었다.
그는 여관주인 겸 사고 치는 손님들을 뜯어말리는 역할일 뿐, 요리는 주방의 요리사가 한다.
그냥 주문받은 목록만 말해주면 된다.
허나 현재의 그는 그런 걸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당황한 상태였다.
‘은패라고? 저 나이에? 이제 겨우 스물밖에 안 돼 보이는데.’
“말이 안 되는데…….”
“아, 거 손님한테 나갈 거 먹지 좀 마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다.
그는 주방의 안주를 주워 먹으며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아이른은 그런 에드가의 생각을 몰랐다. 딱히 관심도 없었다.
그저 내일 방문할 크로노 검술관의 생각만이 가득할 뿐.
그는 자신과 루루가 먹을 음식을 계산하고 2층 방으로 올라갔다.
음식이 준비되고 잠시 후, 루루가 뿅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이 동네 고양이들이랑 좀 놀다 왔어. 오! 내 것도 있구나.”
그 이후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같이 식사하고, 시시껄렁한 얘기를 나누고, 씻고.
방마다 따로 설치된 세면시설이 놀랍기는 했지만, 숙박가격과 도시의 규모를 생각하고는 납득했다.
그리고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럼, 가볼까.”
“가볼까! 가볼까!”
다음 날,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 옷을 쫙 빼입은 루루와 함께 아이른은 검의 요람 여관을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크로노 검술관으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검술관이 목적지인 수많은 검사가 함께했는데, 그들 역시 루루를 보고 굉장히 놀란 모습을 보였다.
몇몇은 말까지 걸었다.
루루가 그 모두를 모아놓고 말했다.
“안녕? 난 고양이 요술사 루루야. 보다시피 사람 말도 하고 날아다닐 수도 있어. 신기해서 말 걸고 싶은 거 이해하는데, 하나하나 답해주기는 힘들어. 악수 한번씩하고 끝내자.”
톡톡톡톡톡
자그마한 앞발로 검사들의 손을 톡톡 치고 가는 루루.
악수라고 하긴 뭐 했지만, 의외로 다들 만족했다.
몇몇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행복한 미소를 짓는데, 솔직히 말해 보기 조금 부담스러웠다.
이를 즐겁게 구경하며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크로노 검술관의 정문에 도착했다.
문지기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손님들이시군요. 안으로 들어오시죠.”
“어? 어…….”
길 안내를 하는 문지기, 그리고 그를 우르르 따라가는 검사들.
그들과 함께 있던 아이른은 당황했다.
자신은 이곳에서 통용되는 ‘손님’이 아니라 ‘진짜 손님’이었다.
즉, 손님맞이 행사에 참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문지기는 ‘진짜 손님’이 있을 거란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했다.
쉽게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물론 모두가 사라진 뒤, 정문에 남아있는 나머지 문지기에게 따로 말을 하면 되지만…….
“아이른, 저 사람들 다 어디로 가는 거야?”
“아, 손님맞이라고, 크로노 검술관 사람하고 차례차례 대련하는…….”
“오오, 재밌겠다! 우리도 가자! 구경 가자!”
흥분해서 빠르게 검을 휘두르는 루루를 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급한 것도 아니니까, 구경 좀 해도 나쁠 건 없지.’
아이른 역시 크로노의 손님맞이가 흥미롭기는 했다.
검술관에서 나오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갖췄을지도 궁금했고, 함께 걸어가고 있는 이 우락부락한 덩치의 검사들이 어느 정도일지도 궁금했다.
뭣보다 분위기 자체가 신기했다.
‘마치 축제 같아.’
크로노 검술관, 그리고 마인 토벌을 제외하면 이렇게 많은 검사와 한자리에 있던 적이 없는 아이른이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이런 즐겁고 가벼운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전자는 치열했고, 후자는 무거웠다.
게다가 이번 일은 자신이 참여할 필요가 없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구경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루루의 말을 듣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왜 쓰다듬어?”
“그냥.”
“턱 밑에도 긁어줘.”
“그래.”
아이른이 루루를 번쩍 안은 뒤 목덜미 부근을 긁어줬다.
그 모습을 본 몇몇 검사들이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도착한 곳은, 고급스럽진 않으나 깔끔한 느낌을 주는 넓은 연무장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한 검사들의 얼굴에 긴장이 깃들었다.
이윽고 저 멀리서부터 검사 한 명이 걸어왔다.
상당한 크기의 대검을 장난스럽게 어깨에 걸친 젊은 청년.
몇몇 이들이 푸념했다.
“뭐야, 저렇게 젊은 놈이 왔다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우리를?”
“우리긴, 너겠지.”
“이 새끼가…….”
“적당히 해. 소란피우다 쫓겨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중재하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크로노 검술관의 실력자와 검을 맞대고 싶어서 왕국 몇 개를 넘어온 사람도 있었으니, 젊은 검사가 나온 게 불만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허나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 역시 나이가 어린 편이어서가 아니었다.
낯이 익은 얼굴.
그가 조용히 청년의 이름을 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