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9화.나경이랑 자고 싶어요? (282/371)

< 나경이랑 자고 싶어요? >

“아니, 규율 언니 때문에 고민이 된다는 그 말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게 아니라요, 제가 대표님을 안으면서 느낀 감정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어요. 뭐랄까···. 아, 드라마로 치면 사랑하지만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이별하는 연인의 느낌? 애틋하면서도 안타까운··· 암튼 그런 거요.”

 얘 이거 상태창 있는 거 아니냐.

 현재 내 마음을 정확히 예측해버렸다.

 팔뚝에 오슬오슬 소름이 돋는다.

 “빨리 제대로 말해주세요. 이번에도 거짓말하면 저 진짜 갈 거예요.”

 “으으음···.”

 “대표님.”

 “어···.”

 “제 얼굴 보세요.”

 하얀 식탁 위의 희미한 얼룩을 응시하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요나의 예쁜 얼굴을 쳐다봤다.

 녀석의 눈 속에는, 설령 내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도 이해해줄 것만 같은 깊고 넓은 포용력이 다시 들어차 있었다.

 요나의 연분홍빛 입술이 지그시 열린다.

 “저 승부욕 많은 건 아시죠?”

 “알지.”

 “질투도 많아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많아요. 그런데 대표님 앞에서는 최대한 참고 있는 거예요. 그런 캐릭터는 서원 언니 하나로 충분하잖아요.”

 “그랬구나··· 진짜 몰랐네.”

 “저 소유욕도 많아서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가족이라고 해도 절대 안 주는 사람이에요. 어렸을 때 언니가 장난으로 제 인형 가져갔다가 제가 팔 물어버려서 병원 갔었고요, 중학교 때는 제가 아끼는 옷 말도 없이 입고 나가서 한 달 넘게 말 안한 적도 있어요.”

 “아···.”

 “그랬던 제가요,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고 아끼는 걸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네 명한테요. 어쩌면 네 명 이상일 수도 있고요.”

 “그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게 혹시 나야···?”

 영특한 요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알면서 되묻는 내 말을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심지어 서원 언니랑은 잠자리도 공유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서.원.언.니.랑.요.”

 “그때 참 굉장했지···.”

 이번 드립도 무시당했다.

 “저 그런 사람이에요.”

 “그렇구나. 요나 씨 이제 보니 무서운 사람이네···.”

 “무서우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요, 대표님 앞에서는 제 신념이랑 성격까지 바꿀 정도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자기는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으니 뭐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는지 지금 당장 털털 털어놔라 그거지.

 요나가 이 정도까지 말을 하면 뭐 솔직하게 말을 해도 되지 않을까···.

 “제가 꼭 상담이나 위로를 해드리겠다는 게 아니에요. 저는 그냥··· 대표님이 무슨 고민을 하고 무슨 걱정거리를 안고 계신 건지 알고 싶은 거예요. 그뿐이에요.”

 “······내 입으로 말하기 창피한 얘기라서 그래···.”

 “치사해. 대표님은 제 치부에 대해서 전부 다 알고 있잖아요. 맥주 한 모금 시원하게 드시고 어서 말해 봐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요나는 내가 이미 다 넘어간 것을 알고 있다.

 이제야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 대답을 기다린다.

 나는 후우우, 하고 포기의 한숨을 뱉은 뒤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프라미슈 나경이가 나를 좋아하나봐.”

 “오올, 고백 받았어요?”

 “아니,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는데 내가 바보도 아니고 느낌이란 게 있잖아.”

 “이번에 촬영하면서 정 들었나보다. 아아, 그래서 아까 회사까지 찾아온 거구나? 어쩐지, 어쩐지···.”

 “나경이 말고 서나도 뭔가 그런 낌새가 보였거든? 근데 걔는 원래 성격이 샤이해서 그런지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노력은 하더라고. 그런데 나경이가 의외로 저돌적이네···.”

 “프라미슈에서 그 두 사람이 제일 인기 많지 않아요?”

 “인기는 다들 비슷한 거 같던데.”

 “비슷하긴 한데 저번 앨범 이후에는 그 둘이 인기 제일 많을 걸요.”

 요나의 표정과 말투에서는 질투보다는 장난스러운 호기심과 뿌듯함이 동시에 표출되고 있었다.

 마음이 놓인 나는 경계심을 완전히 풀고 친한 여사친에게 연애상담을 받듯이 디테일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체인지’ 촬영을 하면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나경이가 나한테 호감을 느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어서 조금은 냉정하게 끊어냈다, 라고 말을 한 뒤, 나도 모르게 멜랑꼴리해진 현재의 마음까지 속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막상 냉정하게 끊고 나니까 이번에는 내 마음이 조금 그래. 카톡 프로필도 바꼈는데 왠지 나한테 하는 말 같고···.”

 “뭐라고 바꼈는데요?”

 나는 나경이의 카톡창을 보여주었다.

 요나는 사진을 먼저 클릭해보면서 감탄을 마지않았다.

 “어우, 나경이 얘는 진짜 여자가 봐도 너무 예쁘다. 이거 오늘 찍은 거죠?”

 “어.”

 요나는 이어서 상태메시지의 초성을 확인하며 바로 해석을 했다.

 “보고··· 싶어요···?”

 “너는 아직까지 정상이구나. 나는 처음에 ‘박고싶어요’로 보였는데···.”

 “···나경이가 대표님의 이런 모습을 봐야 정이 떨어질 텐데.”

 “내가 연락하지 말라고 하고나서 바로 이 문구로 바꿨더라고.”

 “대표님 신경 쓰이라고 대놓고 바꾼 거죠 뭐.”

 “그 전까지는 진짜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거 보니까 마음이 좀 싱숭생숭해졌어. 나 어떡해야 되냐.”

 “흐으음···.”

 “근데 내가 이런 얘기를 너한테 하는 게 웃기지 않냐?”

 “뭐가 웃겨요. 솔직히 대표님도 나경이 좀 좋아하죠?”

 차고 넘치는 이해심으로 담담하게 상담을 해주는 요나의 태도에, 나는 바지 벗고 딸딸이까지 칠 기세로 솔직하게 말했다.

 “조금 좋아하는 거 같아. 어떤 남자가 안 넘어가겠냐.”

 “보고 싶어요?”

 “그치··· 보고 싶지.”

 “나경이랑 자고 싶어요?”

 “그건 아니고.”

 “나경이가 먼저 자자고 하면 거절은 안할 거 아니에요.”

 “나경이가 하자고 하면야 뭐··· 그치···.”

 그치, 하고 대답하니까 머릿속에서 ‘그쵸그쵸!’하며 맞장구치는 나경이의 리액션과 특유의 미소가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피식 터지면서 팔불출처럼 나경이 칭찬이 튀어나간다.

 “근데 나경이 진짜 괜찮더라. 얼굴 예쁜 건 원래 알고 있던 거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이번에 촬영하면서 보니까 성격이 진짜 너무 좋은 거야. 완전 여자여자하고 귀엽고 청순하고. 그러면서 은근히 섹시한 면도 있고··· 매력 있더라.”

 “···그러셨구나. 우리 김윤호 대표님께서 은빛이보다 어린 나경이한테 혼을 홀딱 뺏기셨구나···.”

 어···?

 내 들뜬 칭찬은 한톤 다운된 싸늘한 목소리로 되돌아왔다.

 흠칫 놀란 나는 황급히 요나의 기색을 살폈다.

 아뿔싸, 당했다···.

 모든 것을 받아줄 것 같던 이해심 넘치던 욘리다는 온데간데없고, 은빛이와 리야의 신조어 남발을 지적할 때처럼 신경이 날카로워진 꼰리다 모드로 변해있었다.

 가히 1서원력을 웃도는 전투력이었다.

 “그래서 나한테 괜히 미안하니까 안아달라고 했구나? 그랬구나?”

 “지, 지금까지 업키걸 리더 이요나 씨의 몰래카메라였습니다! 하하하! 야, 내가 한 말 다 뻥이야. 그걸 믿냐, 바보.”

 “응, 아니야. 다 진짜야. 대표님 지금 나경이 좋아하고 있어요.”

 “야 너 이러는 게 어디 있냐. 니가 솔직하게 말하라며. 다 들어준다며.”

 “들어준다고 했지, 이해한다는 말은 안 했는데요.”

 “그게 말이야 당나귀야···. 말장난 하지 마.”

 “어휴, 경쟁자가 또 늘었네. 어리고 예쁘고 성격 좋고 청순하고 여자여자하고 귀여운데다가 은근히 섹시하기까지 한 뉴페이스.”

 “요나 너 이러는 거 아니다. 니가 이러면 앞으로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냐고···.”

 “근데 궁금하긴 하네요. 대체 얼마나 끼를 부리고 다니셨으면 한 그룹에서 두 명이 동시에 홀딱 반했어요?”

 “야, 나 진짜 끼 안 부렸어. 내가 하늘이 팬인 거 다들 알고 있기 때문에 최대한 사심 배제하고 선 지키면서 했다. 너도 방송 보면 알 거야.”

 “우와, 그런데도 여자들이 자석처럼 찰싹찰싹 달라붙은 거예요? 마음먹고 끼 부리시면 아주 끝장나시겠네요?”

 “나 진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 까놓고 말해서 마음속으로 호감 갖는 게 죄냐? 내가 나경이한테 그걸 끝까지 표현 안 하고 공적인 관계를 지켰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야? 누가 보면 내가 나경이랑 사귄 줄 알겠네.”

 “그래요. 대표님 철벽이야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죠.”

 “근데 왜 화났어.”

 “다른 여자 때문에 신경 쓰이는 걸 감추기 위해서 평소보다 저한테 더 잘해주셨으니까요. 그건 가식이고 위선이잖아요. 대표님이 평소에 제일 싫어하시는 행동을 저한테 한 거예요. 차라리 쌀쌀맞게 대하셨어야 해요.”

 “그래··· 그건 내가 미안하다. 나도 안아달라고 한 다음에 바로 후회했어. 니가 뭔가 눈치 챈 것도 알았고···.”

 “제가 눈치 챈 게 아니라요, 그냥 대표님이 대놓고 말한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그 어떤 여자라도 알아차렸을 걸요? 아, 지금 이 남자가 다른 여자 때문에 흔들리고 있구나.”

 “그래, 니 말이 다 맞다···. 어쩌면 너한테 이렇게 다 얘기하고 혼나는 걸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내가 이렇게 인기 많은 남자라는 걸 자랑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고···.”

 요나는 나의 신랄한 자가비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깊숙이 뉘여서 나와의 거리를 벌린 걸 보면, 장난스럽게 떠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평소답지 않았던 내 모습에 진짜 화가 난 것 같았다.

 물론 나도 그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나경이한테 순간적으로 흔들린 건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요나 앞에서 그걸 굳이 티를 냈다는 게 문제였다.

 요나도 그걸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동안 요나를 포함한 업키걸 아이들을 너무 편하게만 생각했다. 녀석들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다 이해해줄 것이라는 못된 자만심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그나마 요나라서 이렇게 브레이크를 걸어준 거지, 만약 다른 네 명이었다면 속으로만 끙끙거리고 내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했을 게 뻔하다.

 요나는 어쩌면 업키걸을 대표해서 내게 일침을 가한 걸 수도 있다.

 ‘우리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지 마요’라면서 말이다.

 원래 나를 각성시키는 역할은 의외로 리야가 해왔었는데, 녀석은 요즘 공과 성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해서 평상시에도 내게 복종 모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요나는 똑같은 M성향일지라도, 침대 위와 일상에서의 벽은 확실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욘리다, 욘리다 하는 거지.

 “미안하다. 내가 너희를 너무 편하게 생각했나봐···.”

 “한 잔 해요.”

 요나는 뒤로 물러섰던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면서 건배를 제안했다.

 내 사과를 받아들였다는 무언의 제스처였다.

 몸 전체를 기처럼 둘러싸고 있던 강한 서원력도 사라졌다.

 내가 잘못을 깨달은 것 같으니, 자기가 여기서 뭐라고 더 말해봤자 내 자존심에 상처만 낸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화해의 원샷?”

 내가 건배를 하면서 묻자, “콜”하고 대답한 요나는 호탕하게 고개를 젖혀서 꿀떡꿀떡 맥주를 흘러 넘겼다.

 나도 가득 채워있던 캔을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으, 하고 콧등을 찡그린 녀석이 입술에 조금 흘러내린 맥주를 소매로 닦으며 체인지 촬영 소감을 묻는다.

 “오랜만에 현장 일 하시니까 어땠어요?”

 “재밌긴 했는데, 촬영 대기하는 건 진짜 못 하겠더라.”

 “12명 다 대표님 혼자 케어하신 거예요?”

 “아니. 립밤 로드매니저랑 체인지 작가들이 중간중간 도와줬지.”

 “방송 이번 주에 나오는 거죠?”

 “어. 금요일 11시.”

 “히, 재밌겠다. 본방으로 봐야지.”

 “작가가 직접 기대해도 좋다는 거 보니까 잘 나온 거 같던데.”

 “그럼 국민 실장님으로 다시 복귀하는 건가요.”

 “아, 인기 너무 많아지는 것도 귀찮은데. 이제 좀 살만해지나 싶더니···.”

 내 너스레에 요나는 킥킥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서원 언니는 보지 말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서원이는 보지 말라고 해야지.”

 “보지 말라고 해서 과연 보지 않을까요···?”

 “보지 말라고 해서 보지 않을 놈이 아니지.”

 요나는 식탁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고 삐딱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10분도 안 되는 사이에 캔 맥주 두 개를 연속으로 원샷해서 그런지 그새 눈꺼풀이 나른해져있었다.

 “···서원 언니가 보지 말라고 해서 안 볼 사람은 아니죠.”

 “그렇지···.”

 “그럼 자지 말라고 하면요···?”

 움찔.

 의미심장한 질문과 함께, 식탁 밑에서 요나의 발끝이 내 발등을 건드렸다.

 “자지 말라고 하면···? 으음··· 그건 꽤 민감한 질문인데···.”

 “어디가 민감한데요···?”

 정강이를 타고 스르르륵 올라오는 요나의 발.

 어찌나 짜릿하던지, 순간적으로 호흡이 버거워질 정도로 심장이 불알불알 뛰기 시작했다.

 “···너는 내가 자지 말라고 하면 어쩔 건데······?”

 “대표님이 자지 말아달라고 하면요···?”

 요나의 발이 무릎을 지나 허벅지 사이를 농염하게 파고든다.

 녀석은 묵직하게 부푼 나의 가운데를 엄지발가락 끝으로 살금살금 긁으면서 대답했다.

 “말아드려야죠. 예쁘게···.”

 “읏··· 어우야···.”

 “지금도 나경이 보고 싶어요···?”

 “어? 나경이가 누군데.”

 “흐흐흐흐흥.”

 아주 만족스러운 답변이라는 듯, 교태 섞인 코웃음을 흘린 요나는 이내 반성하는 표정으로 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발은 계속 국부를 꼼지락거리면서···.

 “주제넘게 까불었던 거 죄송해요···.”

 “아냐, 나도 정신이 번쩍 들었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고마워. 다음에도 혹시 내가 실수하거나 엇나가면 지금처럼 직설적으로 말해줘.”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선은 지켰어야 되는데 그걸 넘어버린 것 같아요.”

 “에이, 진짜 괜찮다니까.”

 “아니에요. 저는 혼나야 돼요. 이제 대표님이 저를 혼내주세요.”

 “어···?”

 “빨개 벗겨서 대표님 무릎에 엎어놓고 엉덩이 세게 때리면서 혼내주세요···.”

 아아, 그 뜻이었구나.

 난 또 뭐라고···.

< 나경이랑 자고 싶어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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