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나 욘나 무서워 >
보통 내가 ‘그때였다’라고 생각하면 S창이 뜨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요나가 왔나보다.
나는 뭔가 죄를 지은 듯한 마음으로 나경이의 카톡 프로필 창이 떠 있던 휴대폰 화면을 끈 뒤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요나가 편의점 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왔어?”
현관 안으로 들어온 녀석은 말인사 대신 하얀색 마스크를 턱까지 내리고 입술을 쭈우 내밀었다.
나는 가볍게 입을 맞춰준 뒤 되물었다.
“우리 집 비번 몰라?”
“알죠. 리야가 단톡방 공지로 올려놨던데요.”
“그럼 그냥 들어오지. 벨 누르니까 뭔가 어색하다···.”
“저는 항상 벨 누르고 왔어요. 대표님 말 안하고 오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크으, 역시···.”
“업키걸에서 정상인은 저뿐이죠?”
연애 초기의 연인처럼 꽁냥꽁냥하게 대화하고는 있지만 지금의 내 감성은 나경이의 ‘보고싶어요..’로 인해 다른 방면으로 말랑말랑해져있었다.
그런 감정으로 요나를 대하는 것이 양심에 걸린다.
나는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나에게 더 살갑게 굴고 있었다.
“나 안아줘.”
신발을 벗는 요나에게 팔을 벌리며 말했다.
내가 평소에 이런 말을 먼저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분명 위화감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모자를 벗은 뒤, 까치발을 들고 내 어깨를 끌어안아주었다.
포옹을 한 이후에도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등만 쓰다듬었다.
나도 녀석의 허리를 팔로 교차해서 끌어안고 옆구리 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연습할 때 땀을 많이 흘렸다더니, 땀 냄새는커녕 향긋한 살 냄새가 코를 간질이며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준다. 인위적인 화학 향기보다는 지금처럼 적당한 체취가 섞인 것이 오히려 매혹적이다.
그 살 냄새를 후각 깊숙이 각인시키기 위해 코를 살짝 킁킁거리자 걱정이 되는지 수줍게 묻는다.
“저 땀 냄새 많이 나죠?”
“어, 많이 나. 어떻게 여자한테 이런 냄새가 날 수 있냐.”
“······씻고 올게요.”
내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인 요나가 내 목에서 팔을 풀었지만, 나는 녀석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깊이 묻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아잇, 냄새 난다면서요.”
“뻥이야. 좋은 냄새 나.”
“그래도 씻고 와야 돼요. 몸 끈적끈적 거려서 안 돼요.”
“어차피 씻고 와도 금방 끈적거려질 텐데 뭐.”
“아니야, 아니야.”
“맞아, 맞아.”
나는 후드 티 안으로 손을 넣어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의 맨살 굴곡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녀석은 구덩이에서 벗어나듯이 내 팔을 밑으로 내리며 결국 욕실 쪽으로 도망갔다. 콧방귀를 흥, 뀌며 나를 새침하게 흘겨본다.
“자기는 씻었으면서 맨날 나만 못 씻게 해.”
“가지마. 돌아와.”
“흐흐흐흥, 오늘 왜 이렇게 질척거려요?”
“아직 제대로 질척거리지도 않았어. 이제부터 시작이야.”
“으응으응, 그 느낌 아니에요. 저는 시크한 김윤호가 좋아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당연히 변해야죠. 안 변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지루하고 심심해지는 거예요.”
“요오망한 놈 같으니라고··· 나한테 밀당을 해?”
“저 씻는 동안 맥주 좀 냉동실에 넣어놔 주세요.”
“와, 이제는 탑스타라고 대표도 막 부려먹네.”
“지금은 대표님 아니잖아요.”
“그럼 뭔데.”
묻자, 고개를 옆으로 살짝 꺾는 요정 포즈를 지으며 요망하게 대답한다.
“자기?”
“하앍!”
미쳤다.
교배할 때 자기라고 종종 불렀지만 지금의 자기는 심장과 고환 모두를 떨리게 만든 역대급 끼부림이었다.
나는 녀석을 당장 덮쳐서 발가벗기기 위해 장기에프 잡기 스탭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하지만 요나는 낯가리는 고양이처럼 뒤로 샤샤샥 물러서며 솜씨 좋게 거리를 벌렸다.
“접근금지. 빨리 씻고 올 테니까 혼자 드시지 말고 저 나오면 같이 마셔요.”
“그럼 자기라고 한 번만 더 불러주고 가.”
“싫은데? 내가 하고 싶을 때만 할 건데?”
“아주 제법이야···.”
녀석은 시험 출제 문제를 예고하는 교사처럼 검지를 세워 강조했다.
“맥주는 냉동실. 김윤호는 뒤로 물러서.”
“어, 어.”
뭔가 조련당하는 기분이다.
노련하게 나를 밀고 당긴 요나는 시니컬하게 발걸음을 옮겨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녀석이 시킨 대로 편의점 봉투에 있던 캔 맥주를 냉동실에 옮긴 뒤 식탁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하며 샤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방금 전의 상황을 생각하니 피식 코웃음이 나온다.
구관이 명관이고 요나는 요망하다고, 요나를 만나고 나니 내가 나경이 때문에 잠시나마 설레고 아쉬웠던 감정들이 문득 유치하고 민망해진 것이다.
이래서 요나, 요나 하나보다.
얼마 뒤 샤워를 마쳤는지 욕실 문이 열리면서 요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님, 죄송한데 저 입을만한 옷 좀 주세요.”
“어, 갖다 줄게 기다려.”
“긴팔 쭉티랑요, 바지는 대표님 입으시는 트렁크 팬티로 주시면 될 거 같아요.”
“어, 알았어.”
요오망한 것.
남자 사이즈의 티셔츠와 트렁크 팬티를 입은 요나는 무적이었다.
손등까지 덮은 소매 밑으로 손가락 끝만 살짝 삐져나왔는데, 뭔가를 잡기에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소매를 말아 올리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것을 보면 남자가 어떤 모습에서 설레는지를 확실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녀석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터번처럼 감싸며 식탁에 앉았다.
의자에 발을 올려 무릎을 세운 포즈로 핸드폰을 쳐다보는데, 꾸미지 않은 그 본연 그대로의 모습이 오히려 시나리오에 맞춰 촬영을 하는 배우처럼 느껴졌다.
나는 냉동실에서 맥주를 꺼내면서 녀석에게 말했다.
“너 이제 연기해도 되겠다.”
“왜요?”
“그냥 너 그렇게 앉아 있는 거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드네.”
“아직 안돼요. 더 연습하고 배워야 돼요.”
요나는 연기에 재능이 있고, 녀석 역시 배우 겸업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진지해도 너무 진지한 나머지 몇 년째 레슨만 계속 받고 있는 중이다.
업키걸이 유명해진 이후 요나 앞으로 들어오는 드라마 각본과 영화 시나리오도 꽤 되는데 계속 거절하고 있다.
오히려 연기에 그닥 재능이 없는 은빛이랑 리야가 웹 드라마 주연까지 했었는데 말이다.
“언제까지 준비만 할 건데. 첫 작품으로 신인상에 여우주연상까지 동시에 노리려고?”
“이왕 도전하는 거 그래야죠.”
내 딴에는 긴 준비기간을 장난스럽게 비꼰 건데 진짜 그럴 생각이란다.
하지만 왠지 허황된 꿈처럼 생각되지는 않았다. 요나는 재능도 있고 노력까지 하는데 본인 스스로가 그 노력을 즐기기까지 하니까 작품 운만 따라준다면 ―첫 작품으로 여우주연상은 무리겠지만― 신인상까지는 욕심내볼 만 했다.
―치익!
청량한 소리와 함께 캔 맥주를 개봉한 요나는 건배를 한 뒤 쉬지 않고 다섯 모금 정도를 한 번에 들이켰다.
보는 내가 다 짜릿했다.
맥주 맛있게 마시기 대회가 있다면 강남구 우승까지는 노려볼 만 했다.
그것으로 부족했던지, 녀석은 곧바로 한 모금을 더 마신 뒤 도발적인 눈빛으로 내 캔을 쳐다봤다.
“술 더 못 드시겠어요?”
“응? 아니. 천천히 마시려고.”
“에이, 술 완전 깨신 거 같은데 원샷하세요.”
그렇게 말을 하고는 들고 있던 자신의 캔을 입에 대고 또 벌컥벌컥 들이켜서 완전히 비워냈다. 캔을 구기면서 나를 향해 노래를 부른다.
“원샷 하세요, 원샷 하세요.”
얘가 진짜 술이 고팠나보다, 라고 생각하며 나도 캔 하나를 깔끔하게 비워냈다.
그 사이 요나는 두 번째 캔을 따서 내 앞에 두고 자신의 것도 새로 하나 땄다. 그러고는 포용력이 느껴지는 인자한 눈빛으로 말없이 내 눈을 응시했다.
그 깊은 시선이 괜히 민망했던 나는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무슨 고민 있죠?”
“고민이야 항상 있지.”
“일적인 고민 말고요.”
“그럼?”
“대표님이 말해야죠.”
“흐흐흐··· 지금은 대표님 아니라 자기라며.”
헛웃음과 화제전환으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했지만 나를 보는 요나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현관에서 안아달라고 했던 것을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
요나는 뭔가 다른 내 낌새를 역시 눈치 챘고, 오늘 내게 뭔가 힘든 일이 있었거나 말 못할 고민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고민이 있을 때마다 나와의 대화를 통해 위로를 받았듯이, 나도 자기한테 속마음을 털어놓고 위로 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나경이 때문에 잠깐 마음이 설레고 아팠다는 것을 어떻게 요나한테 말을 하겠는가. 그래서 그냥 모르쇠 작전으로 밀고나갔다.
“일 문제 말고는 고민 없는데? 세상에 나만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냐.”
“음, 술이 아직 부족하신가보다. 그거 한 캔 더 원샷 하시고 다시 생각해보세요.”
“아, 왜 자꾸 없는 고민을 만들라고 해. 진짜 아무 문제 없다니까?”
모든 것을 포용해줄 것처럼 따뜻하고 깊던 요나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감돈다.
내가 대놓고 어필한 부분도 있지만, 아니라고 하는데도 뭔가를 눈치 채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여자의 촉이라는 건 역시 대단했다.
0.8서원력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요나는 확신을 갖고 내게 말했다.
“이럴 거면 첨부터 티를 내시지 말든가요. 행동이며 표정이며, 사람 신경 쓰라고 티를 팍팍 내셔놓고 정작 멍석 깔아드리니까 왜 이러실까. 대표님 진짜 무서운 사람이다.”
아니. 니가 젤 무서워···.
욘나 무서워···.
“그런 거 아니야.”
“아니죠?”
“응. 나 진짜 아무 문제없어.”
녀석은 웃는 낯으로 맥주 캔을 잡고 내 입으로 들이밀었다.
“알았으니까 일단 원샷부터 하세요. 아직 술이 덜 취하셔서 그런 것 같아요.”
“푸흐흐흐흐.”
“대표님이 저한테 했던 말이 뭐였어요? 고민이나 걱정거리 있으면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말고 멤버들하고 같이 고민하고 그러라면서요. 저는 그 말 듣고 제 원래 성격까지 바꿔가면서 노력했는데 대표님은 왜 이러세요?”
“에이,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이거 하나만 대답해줘요. 일 문제 말고 사적인 고민이 있긴 있는 거죠?”
“······어.”
“그럼 원샷하고 저한테도 말해주세요.”
이 새끼가 그거 하나만 대답하라면서···.
“누군가한테 그냥 소리 내서 말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는 말도 대표님이 저한테 했던 말이잖아요.”
“하나만 대답하라며.”
“아, 그래서 끝까지 말을 안 하시겠다고요?”
“하아······ 니 앞에서 할 만한 말이 아니라서 그렇지.”
“그건 제가 판단할 문제고요. 일단 제가 들어보고, 진짜 저한테 할 만한 얘기가 아니면 그냥 못 들은 걸로 할 게요. 그럼 됐죠?”
“하하하하하하. 그게 뭔···.”
찌릿.
나를 보는 눈빛에 서원력이 더 실렸다.
이 정도면 0.9서원력이다.
“그럼 제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네요.”
녀석은 들고 있던 캔을 힘없이 내려놓으며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대표님한테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존재였네요. 이제라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분 참 별로네요. 저 오늘은 그냥 일어설게요.”
“프흐흐흐흐.”
“장난 하는 거 아니에요. 앞으로는 사적으로 연락드리지 않을게요. 그동안 실례 많았습니다.”
“아, 너까지 왜 그러냐. 내가 너한테 해도 될 말이면 벌써 했지···.”
“그럼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마시지 그랬어요. 괜히 궁금증만 더 커졌잖아요.”
녀석은 식탁 위에 있던 핸드폰을 잡으며 일어섰다.
“아무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결되기를 바랄게요.”
아, 거참.
그냥 가게 놔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경이 때문에 마음이 싱슴생슴하다고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거짓부렁으로 회피해야지 뭐.
“알았어, 알았어. 앉아.”
“말씀부터 하세요. 듣고 나서 앉을게요.”
“하아···.”
순간적으로 미끼 고민을 떠올린 나는 맥주 한 모금을 마시며 고뇌연기에 들어갔다.
실제 존재하는 고민거리를 내주고 나경이를 덮을 생각이다.
“···규율이 때문에 그래.”
“규율 언니가 왜요?”
“걔가 나한테 뭔가 삐진 게 있는 것 같아. 애들한테도 나랑 이제 선 그으라고 말했다는데?”
“흐음···.”
“그거 때문에 마음이 조금 안 좋았어.”
“땡.”
“응?”
“오답이라고요. 그거 아니잖아요.”
아. 걸렸네.
< 요나 욘나 무서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