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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17)화 (18/113)

17화

늦은 오후. 어머니의 무덤에 가보고 싶다는 에브린과 함께 외출을 했다. 그리고 에쉬도 우리를 보호해줄 목적으로 동행했다.

묘비 앞에서 애써 눈물을 삼키는 에브린에게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주고 싶었다. 에쉬와 함께 그곳을 조용히 벗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비가 너무 안 오긴 했나 봐요. 공기가 꽤 건조해요.”

“그래도 멀리서 습한 기운이 몰려오는 것을 보니 곧 비가 한바탕 쏟아질 것 같습니다.”

“좋은 소식이네요. 그랬으면 좋겠다.”

그와 자연스럽게 손깍지를 끼고 환하게 웃으며 다시 풀숲 사이를 천천히 거닐었다.

“혼자 자니까 외롭지 않아요?”

슬쩍 떠보려고 짓궂게 묻자,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슬슬 한계가 오고 있기는 합니다. 가끔 친구 분께 당신을 양보한 것을 후회하고 있어요.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디게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맨날 밤마다 브링도 그 소리 해요. 자기 나중에 원망 듣는 거 아니냐고.”

잠든 에브린 몰래 빠져나가 에쉬의 방에 가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그의 따뜻한 품이 그립고 뜨거웠던 키스에 취하고 싶기도 했다.

그도 내 마음을 눈치챘다는 듯 조금 더 구석진 곳으로 나를 데려가 나무기둥에 세워두고 끈적한 키스를 퍼부었다. 매일 에브린 몰래 그와 도둑 키스를 하곤 했다. 확실히,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그 긴장감이 분위기를 더욱더 뜨겁게 불태우는 걸 느낀다.

바스락.

“대담하네? 훤한 대낮에 야외에서 이런 짓도 하고.”

그때, 풀 밟는 소리와 함께 낯선 남자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와 흠칫 놀랐다. 한창 키스에 빠져들고 있다가 떨어진 에쉬가 허리춤의 칼을 빼 들고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뒤를 노려보았다.

‘누구지?’

바스락. 바스락.

연달아 울리는 발걸음 소리는 동물이 아닌 사람의 발소리였다. 에브린이 장난치는 건가 싶다가도 에브린이 있던 방향과는 전혀 반대쪽이라. 목소리도 완전 달랐고.

그나저나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곳은 우리 마르엘 가문의 선산으로 개인 사유지라서 아무나 들어올 수가 없는 곳이다. 자칫 침입자로 오해받아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곳에 들어온 걸까?

곧 키가 높은 풀숲 사이를 헤치고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확실히 우리 영지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놀란 이유는 남자의 머리카락 색 때문이었다.

에쉬와 똑같은 회색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까지 내려와 찰랑거렸다. 얼굴도 에쉬와 아주 비슷했으나 조금 더 귀엽고 어리게 생겼다. 에쉬가 예쁜 늑대의 얼굴이면, 저 남자는 귀여운 강아지상이었다.

‘설마, 에쉬의 남동생인가?’

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에쉬와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둘이 꽤 닮아서 형제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갑자기 등장한 남자를 향해 에쉬가 한숨을 푹 내쉬며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었다.

“여기 찾아오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억울해서 잠도 안 와. 생각할수록 속이 뒤집어지잖아? 도저히 나 혼자는 못 죽겠더라고. 이 배신자야.”

그냥 들으면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같이 느껴지는데, 상대 쪽에서 어울리지 않게 웃고 있어서 조금 오싹했다. 에쉬는 그저 한심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고, 그런 에쉬를 향해 짓궂게 웃기만 하는 남자가 눈동자를 굴려 나를 쳐다본다.

남자의 눈동자는 약간 하늘빛이 도는 푸른색이었다. 값비싼 사파이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2년 전, 그 눈동자를 본 기억이 번뜩 떠올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그때 그…… 손수건?!”

그래. 기억났다. 2년 전 봄, 따뜻해진 날씨를 벗 삼아 에브린과 함께 맛있는 디저트 가게를 방문하려고 수도 광장을 돌아다닐 때였다.

[슈아. 저기 봐. 쟤.]

인적이 드문 뒷길을 걷다가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가 이상형이라던 에브린이 호들갑을 떨면서 정면을 가리켰다. 여행자처럼 보이는 무리 중 선두에 선 한 남자가 바로 저 남자였다.

후드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써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으나, 그 사이로 얼핏 보이는 앳된 외모는 에브린이 한눈에 반할 정도로 예쁘긴 했다.

[예쁘네. 특히 눈동자 색이.]

[벽안은 사랑이지. 아무렴. 하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

[가까이 가서 봐. 말이라도 걸어보던지. 너 그런 거 잘하잖아.]

[어머, 어떻게 초면에 그런 실례를…….]

몸을 배배 꼬면서 부끄러워하는 에브린의 모습이 귀엽다고 느끼는 사이, 남자가 시선을 느꼈는지 우리 쪽을 정확하게 쳐다봤다. 나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으나 에브린은 혼자 흥분해서 폴짝폴짝 뛰며 촐싹거렸다.

[꺄! 나 봤어! 저 사람이 나를 봤다고!]

[그래. 그러네. 가서 인사라도 해. 혹시 알아? 좋은 인연으로 발전하게 될지?]

[나도 그러고 싶은데 어떻게 초면에 인사를 해. 부끄럽게!]

평소에는 그렇게나 자신감이 넘치는 에브린인데, 꼭 예쁜 남자 앞에서는 저렇게 수줍은 소녀가 되어버렸다. 내가 아는 에브린이 아니게 되어서 픽 웃다가 다시 가던 길이나 가려고 했는데.

탁-

‘……어?’

무언가에 발이 걸려 몸이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한 몸이 되어버렸다.

[슈아! 슈아 괜찮아?!]

하필 그 바닥에 돌부리가 있을 줄이야. 정말 너무 창피하고 민망해 얼굴에서 피가 쏟아질 것처럼 발갛게 달아올라 버렸다.

다행히 사람이 별로 없는 길이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공공연한 웃음거리가 될 뻔.

[괘, 괜찮아.]

[드레스 어떡해. 흙투성…… 슈아, 너 코피…….]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코에서 흘러나오는 피도 미처 느끼지 못했다. 얼굴을 부딪치진 않은 것 같은데. 손으로 대충 닦아내며 작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려던 찰나, 내 앞에 낯선 손수건이 불쑥 나타났다.

[괜찮습니까? 어서 이걸로 닦으세요.]

그 손수건을 내민 사람이 바로 에브린이 예쁘다고 했던 그 남자였다. 그때도 가까이에서 본 남자의 눈동자가 정말 보석 같다고는 생각했었다. 코피가 흐르는 순간에도 반짝거리는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에브린이 그 손수건을 재빨리 낚아채서 내 코에 대주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그저 손수건 하나 내어드린 것뿐인데, 은혜랄 것이 뭐 있겠습니까?]

[그래도 너무 감사한걸요? 도움을 주셨으니 혹시 괜찮으시다면 차를 한 잔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 되시나요?]

속셈이 빤히 보이는 에브린이 내 어머니처럼 우아한 연기를 하며 기다란 속눈썹을 자랑하듯 팔랑거렸다. 그러나 남자는 감흥 없이 에브린을 슬쩍 쳐다보기만 하더니 나를 보며 대답을 했다.

[초대해주신다면 영광이지만 당장은 힘들 것 같아서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중에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이에요! 브레이튼 백작저를 방문해주실 때 손수건도 깨끗하게 빨아 돌려드리겠습니다.]

[그쪽은?]

느낌이 묘했다. 에브린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아서 굉장히 불편했다. 게다가 에브린의 대답에 관심 없다는 듯 내게 묻기까지.

[……마르엘 백작이 제 부친 되십니다.]

[그렇군요. 꼭 한 번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씨께서 내어주시는 차를 음미하고 싶군요.]

매혹적으로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자신의 무리와 합류하여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혀를 찼다. 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어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간혹 친구인 에브린을 이용해서 내게 수작을 걸어보려는 영식들이 있었다. 둘째 언니 말로는 내가 너무 도도해 보여서 대놓고 고백하면 차일까 봐, 일부러 친구처럼 다가오려고 그러는 것 같다더라.

그런데 저 남자는 대놓고 에브린을 무시했다. 에브린이 그만큼 호감을 드러냈는데.

‘좀 재수 없는 사람이네. 인성이 되다 말았어.’

만약 나를 찾아온다 하면 그런 사람 모른다고 무시할 생각으로 손수건을 깨끗이 빨아 에브린에게 주었다. 피가 묻은 손수건이라 제대로 지워지진 않길래 예의상 손수건 하나를 만들어서 얹어주었다.

하지만 결국 그 남자는 우리 가문도 브레이튼 백작저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삿대질을 하던 손을 거두고 입술을 잘근 씹었다. 내가 아는 척을 하자, 남자가 기분 좋게 웃으며 우리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기억해주는 겁니까? 영광이네요. 그때 방문하겠다고 약조했던 것이 뒤늦게 떠올라서 이제야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 에쉬에게 향했다.

“그 사이에 형님과 벌써, 그런 사이가 되었을 줄은 몰랐습니다만.”

“형님……?”

“제 하나뿐인 형님이십니다. 치사하게 혼자 살겠다고 제게 모든 것을 다 떠넘기더니 돌연 말도 없이 사라졌지요.”

예상대로 둘이 형제 사이였다. 이런 우연이 존재하다니.

그것도 하필 에쉬와 키스하는 장면을 들켜서 부끄러워졌다.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은 기분이 어떤 건지 대략 이해가 될 정도로.

그런데 분명 에쉬는 남동생과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고 했다. 목장을 정리하고 새 주인을 찾느라 시간이 걸렸다더니, 동생에게 넘겨주고 온 걸까?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혼란스러운데, 에쉬는 도무지 생각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미간을 좁혔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냐.”

“비엔트 왕국의 마르엘 백작이 관할하는 영지 위치쯤이야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내가 그 정도도 모르는 바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섭섭한데?”

“여긴 개인 사유지야. 함부로 들어왔다가는 목이 남아나지 않을 텐데.”

“그럼 죽이던가.”

살벌한 형제의 대화에 내가 더 긴장을 해서 손바닥에 땀이 뱄다. 여기서 중재하지 않으면 정말 칼부림이 나서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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