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구강 안을 습격한 두툼한 혀가 여기저기 쑤시고 찌르면서 샅샅이 훑었다. 급격하게 거칠어진 숨에 헐떡거리면서 가느다란 신음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등을 더듬는 그의 손이 드레스를 조이고 있는 끈을 찾아 풀어냈고, 몸에 딱 달라붙어 있던 드레스가 헐겁게 벌어져 아까보다 숨쉬기가 편해지기는 했다.
질척하게 이어지던 키스 이후로 어제처럼 애무해줄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이 틀렸다. 허벅지를 잡아 아래로 끌어내려 소파에 등이 닿으면서 애매하게 누운 자세가 되어버렸다.
“에쉬……?”
“상태가 어떤지 먼저 확인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그러더니 내 다리를 들어올렸다. 이 상황이 그저 민망할 따름이다.
그의 연갈색 눈동자가 위로 굴려져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어제부터 느낀 거지만, 이 순간의 그를 보면 그저 다정하기만 한 상대는 아님을 확신한다. 평소에는 순한 양인데 흥분하면 발정기에 다다른 짐승 같기도 하다.
사람은 원래 사랑할 때 굶주린 짐승에 빙의한다고 했다. 그도 그런 상태인 걸 테지. 그렇다고 내게 해를 가하진 않으니까. 오히려 내게 성적매력을 느끼기 때문에 들끓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라 아주 뿌듯하기도.
“왜, 그렇게 쳐다봐요?”
그런데 지금은 뭔가 이상했다. 분명 눈빛은 당장에라도 나를 잡아먹을 기세인데, 무언가 큰 갈등과 마주친 그런 분위기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어 조심히 묻자, 그가 자조하듯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나를 똑바로 앉혀놓는다. 그 행동의 이유를 모르겠어서 그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쉬?”
“어제의 나를 멱살 잡고 패대기쳐버리고 싶은 심정이군요. 슈아가 남들보다 고통을 덜 느끼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요?”
“느껴지지 않는 겁니까? 꽤 쓰라릴 텐데요.”
그가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툴툴거렸다. 아래가 조금 부은 게 느껴지기는 해도 아프진 않았다. 오히려 근육통이 더 나를 힘들게 했지.
‘근육통이 부은 하체의 통증을 없애주는 걸 수도.’
그보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쉽게 그만둘 줄은 몰랐다. 정말 안 할 생각인지 속옷과 속바지를 다시 입혀놓고 풀어놓은 드레스 끈을 다시금 바짝 조여 묶어주기까지. 해보지 않은 일이라 서툴긴 하지만.
“저기…… 저 진짜 그렇게 아프진 않아요. 심각한 건 아닌데.”
“여성은 꽃보다 더 연약하다고 들었습니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무지한 내 탓이니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미안합니다, 슈아. 나를 욕해도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대체 얼마나 부어있길래 저러는지 모르겠다. 피를 철철 흘리는 것도 아니건만.
“에쉬가 그렇게 말하면 속상해져요. 어제는 서로 합의 하에 밤을 보낸 건데, 전부 에쉬의 잘못도 아니잖아요.”
“……약을 구해 오라 하겠습니다. 구하는 김에 진통제가 섞인 음약도 같이.”
그가 설핏 웃으며 내 뺨에 입을 맞춘다. 이대로 영영 나와 밤을 보내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설득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럴 생각은 아닌 모양이다.
안도의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와 그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고 매달려 짧게 뽀뽀를 건넸다.
“정말 아픈 거 아니니까 그렇게 마음 쓰지 마요. 어제 나도 기분 좋았어요. 솔직히 조금 아프긴 했어도 좋았어요. 당신과 하는 건 뭐든 좋단 말이에요.”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군요. 다음부터는 이런 실수를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믿어주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내가 당신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어요?”
아쉽긴 하지만 오늘만 날은 아니기 때문에 쉽게 털어낼 수 있었다. 결혼하여 부부가 되면 매일 밤 치를 중요한 거사니까.
약식이라도 좋으니 빨리 서약서에 둘의 이름을 나란히 적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밀려왔다. 아버지도 이미 두 딸의 결혼식을 크게 치렀으니 내가 약식으로 치른다 하면 너 좋을 대로 하라고 허락하겠지? 어차피 백작가의 재산이 전부 내 것이 될 테니까 굳이 크게 낭비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에쉬. 우리 결혼식은 간단하게 치러도 괜찮을까요?”
“상관없습니다. 슈아가 원하는 방식에 따를 겁니다.”
그건 일단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상의를 해봐야겠다. 언제 돌아오실까? 빨리 오셨으면.
그날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어 내려갔는데 에브린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에브린은?”
“아직 주무시는 듯합니다.”
“아직도?”
“그것이…… 백작 부인을 그리워하시면서 내내 눈물을 보이시다가 조금 전에 잠드셨습니다.”
그제야 내가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해졌다. 에브린도 이 저택에 어머니와의 추억이 아주 크게 깃들어 있고 그렇게나 어머니를 따랐던 아이였으니. 함께 있어 줬어야 했는데 홀로 남겨두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 혹시 밤에 깨면 간단하게 식사할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해두렴.”
“네, 아가씨.”
늘 씩씩하고 강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에브린이 눈물을 쏟아낸 건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다. 아까도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평소의 모습이어서 예상도 못했다.
“친구로서 실격이네요. 나는, 지금까지 에브린에게 무척이나 많은 위로를 받았는데.”
한숨을 폭 내쉬며 식당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울적하게 중얼거리자, 에쉬가 내 옆에 앉아 위로하듯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원래 강한 사람일수록 누군가에게 우는 걸 들키기 싫어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차라리 혼자 있는 것이 더 좋았을 겁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속에 담아둔 슬픔을 전부 털어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을 테니까요.”
“……그럴까요?”
“그녀가 당신의 위로를 받고 싶었다면 당신 앞에서 눈물을 보였을 테지요. 그저 내일 만나면 평소처럼 손을 잡아주고 가볍게 안아주세요.”
그렇게 오랜 시간 알아 온 친구인데도 아직 모르는 게 남아있을 줄이야. 에쉬의 말을 듣고 보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에쉬도 그래요? 우는 장소를 가려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를 제외하고 울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울 시간이 없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잠시 옛 생각에 사로잡히는가 싶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는 그가 속눈썹을 느리게 팔랑거리며 내게 조심히 손을 뻗어온다. 그 커다란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살며시 어루만졌다.
“가끔 당신의 무릎에 기대어 위로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마음을 편안히 내려놓을 수 있는 상대는 이 세상에 당신뿐이라.”
심장이 터져 죽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정하고 나를 홀리기 위해 나타난 늑대가 사람으로 둔갑한 것 같기도 했다. 잔잔한 연갈색 눈동자에 깊숙이 배인 뜨거운 불꽃 하나가 내 눈과 심장을 전부 삼켜버렸다.
‘왜 사람들이 사랑에 미쳐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지, 이제 좀 이해가 돼.’
에브린의 언니인 브레이튼 영애가 사랑을 위해 부와 명예를 전부 포기할 수 있었던 건, 이런 마음 때문이었을 거다. 이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어떤 장애물도 두렵지 않았다.
“언제든 빌려줄 수 있어요. 울고 싶으면 내 무릎에 기대서 울어요. 나도, 울고 싶을 때는 당신의 품에 기댈게요.”
“얼마든지.”
그저 함께 있기만 해도 든든했다. 에쉬가 손님을 배려한다고 에브린이 머무는 기간 동안 나와 따로 방을 쓰겠다고 해서, 그날 이후로 에브린과 하루 종일 함께 지냈다.
“그래도 저 남자, 은근 눈치는 있나 보네. 의외로 착해서 마음에 들어. 내가 괜히 애틋한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기도 해.”
투덜거리는 에브린이 말은 저렇게 해도 첫날보다 에쉬를 보는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지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에쉬의 정체를 수상하게 여겼다.
“슈아, 정말 안 물어볼 거야?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는 확실히 알아야 하지 않겠어?”
“진짜 나쁜 사람이면 아버지가 받아주지 않았겠지. 그리고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고. 너도 예전에 그 남자랑 비밀리에 짧게 사귀었었잖아. 쪽팔려서 어디에 하소연도 못하겠다고 하던 거 기억 안 나?”
“아…… 그렇게 예시를 드니 할 말이 없네.”
철없던 청소년기에 뭇 영애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잘생긴 귀족 영식이 한 명 있었는데, 에브린도 그 영식에게 흠뻑 빠졌었다.
[슈아! 슈아, 제발 부탁할게, 응? 이번 한번만 도와줘. 제발. 응? 응응? 다시는 이런 부탁 안 할게. 진짜야!]
나를 찾아와 두 손을 꼭 붙잡고 부탁을 한 일은, 그 영식에게 선물로 줄 손수건에 자수를 놓아달라는 거였다.
에브린이 가장 싫어하는 세 가지 중에 하나가 자수였다. 가만히 앉아서 뭘 하는 게 자기 성향에 맞지 않는다고, 엉덩이에 종기가 날 것 같다나 뭐라나.
[……그냥 네가 이참에 자수를 다시 제대로 배워보는 건 어때?]
[배울게. 꼭 배울 거야. 그런데 지금부터 배우면 시간이 너무 늦잖아. 누가 채갈지 어떻게 알아? 그 영식이 예쁜 자수가 새겨진 손수건을 갖고 싶댔어. 그래서 영애들이 지금 부자재를 새로 산다고 난리도 아니래.]
하도 귀찮게 애원을 해서 수락했다. 그동안 에브린이 나를 챙겨준 보답도 해줄 겸. 새 손수건 원단에 그 영식의 이름을 새긴 꽃 자수를 놓고, 또 다른 손수건에 나비 자수를 놓아 두 개를 만들어 주었다.
그 자수에 반한 영식이 에브린과 비밀 연애를 하긴 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영애와 양다리인 게 들통 나서 큰 상처를 받았었다.
최근에 듣기론 그 영식의 여성편력이 여전하다고 하길래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님을 더 확신하기도 했다. 또한 이미 타고난 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래도 결혼하기 전에 어디 출신 사람인지는 확실하게 해둬. 가문에 해가 될지도 모르잖아? 만약에 출신에 문제가 있더라도 세탁할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는 있을 거고.”
“알았어. 그럴게.”
부모도 잃고 가족이라고는 인연을 끊은 남동생 하나뿐이라는데, 혼자 남은 남자의 출신이 무슨 문제가 될까 싶어서 대충 대답하고 넘겼다.
그러나 닷새 뒤, 예상치 못한 손님이 방문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