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한숨이 절로 난다. 에브린이야 워낙 솔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이 큰 장점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가끔 저러다가 큰 문제로 이어질까 봐 걱정이 되었다.
“브링, 너 목숨이 몇 개라도 돼? 그러다가 자칫 황족모독죄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어.”
“일단 들어봐. 들어보면 너도 나랑 똑같은 소리 할걸?”
황제가 변태에 또라이라는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설명할지. 내 걱정과는 다르게 에브린은 아주 흥미로운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에 3황자가 즉위하기 전에 패권을 쥔 이가 4황자였잖아. 배다른 형제이긴 해도 어쨌든 남동생인데 얼마나 잔인하게 살해했는지 모른대.”
“그 4황자도 다른 형제를 독살해서 황위에 오른 거잖아.”
“독이야 단 한 번에 사망으로 이르게 되잖아. 그 4황자의 사인이 뭔 줄 알아?”
“……뭔데?”
“과다출혈로 인한 심장마비.”
그게 뭐 그렇게 큰 문제라도 되냐는 눈빛으로 묻자, 에브린이 삐딱하게 기대 손에 턱을 괴고 허공에 포크를 휘적거리며 설명해주었다.
“사 개월 전이었지, 아마? 그 새 황제가 반란군을 밖에 대기시키고 새벽에 혼자 몰래 황궁에 잠입해서 자고 있던 황제를 결박했대. 황궁 지리를 워낙 잘 알고 있었다나 봐.”
“황자였으니 당연하겠지.”
“뭘 모르는 소리! 황제가 머무는 궁은 아무리 황태자라도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곳이라는 걸 몰라? 그런데 그 황제의 궁을 지키는 기사와 시종들에게 들키지 않고 황제의 침소까지 도달하는데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대.”
황제의 침소를 잘 알고 있었다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아버지도 죽일 수 있었다는 것. 오래전부터 황좌를 찬탈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니면 선황이 그를 후계로 삼고 싶어 했다고 그랬으니까, 황제의 침소에 자주 들락날락했을 수도 있겠고.
“아무튼 그 형제를 결박한 뒤에 반란군이 무혈입성을 했거든? 그 뒤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하나씩 칼로 자르고 발목, 손목, 팔, 다리 차근차근 조금씩 토막을 냈다더라.”
손날로 손가락과 팔목, 팔까지 긋는 시늉을 하면서 마치 그 장면을 직접 눈으로 봤다는 것처럼 끔찍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어쩜 저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괜히 나까지 소름이 돋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걸, 아무도 말리지 않은 거야?”
“누가 말려? 황제가 인질로 잡힌 거잖아. 뭐, 워낙 제위에 오른 이들이 계속 죽어 나가니까 감흥이 있기나 할지 모르겠네. 그 피바람이 부는 황궁에서 어떻게 일을 할 수 있을까 싶고.”
“목숨 걸고 하는 거겠지. 그만큼 보수가 대단하고.”
하여간 왕궁이나 황궁이나. 나도 첫째 언니가 왕비로 입궁할 때, 나더러 자신의 수석 시녀로 일해주길 권했었다. 믿을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서 라고는 했으나 정중하게 거절했다.
조금만 실수해도 목이 나가떨어지는 곳이 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 위험천만한 장소에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권력도 딱히 탐나진 않았고.
지금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첫째 언니의 제안을 거절하길 잘했다. 사람이 아무 때나 죽어 나가는 곳이 궁이라고 했으니.
“그런데 그게 변태이고 또라이인 거랑 무슨 상관이야?”
“……너는 그게 정상적인 사람의 행동이라고 생각해? 그 많은 황궁 사람들 앞에서 형제의 손발을 잘랐는데? 것도 그냥 자른 게 아니라 제발 천천히 죽어달라고 애원하면서 장난을 쳤대. 그런데도?”
“원한이 많은가 보지. 복수에 미치면 무슨 짓을 못하겠어?”
“그, 그런가……?”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이의 정신 상태가 멀쩡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들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긴 하겠지만.
지금 우리 왕국의 국왕 전하께서는 굉장히 소심해서 이리저리 휘둘려 문제라고, 첫째 언니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특히나 역병이 번지게 된 이후로 왕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여 벌어진 일이라며 자신을 탓해 옆에서 보기 괴로울 정도라고 속상해했다.
에쉬는…… 지금까지 봤을 때 단점이라고는 하나 없는 완벽한 사람이긴 한데. 그에게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단점이 있기는 하겠지? 무척 궁금해진다.
마침 이어서 요리가 차려지고 익숙하게 맛을 음미하는 에브린이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무리 미쳐도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그래놓고 지금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재상을 대리인으로 세워 모든 국정을 독단으로 결정한대.”
“그럼 믿을 사람만 믿겠다는 거겠지.”
“다른 황자들의 편에 섰던 귀족들도 하나씩 숙청하고 가문의 씨를 말리고 있다는데?”
“원래 정권이 바뀌면 다 그래. 또 다른 반란 세력이 싹틔우기 전에 제거를 해두고 자신의 편을 골라내야지.”
잔인하긴 해도 그게 현실이고 황좌를 유지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래야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을 테니까. 누군가는 어디서 몰래 암살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를 터.
원래 군주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온화보다는 냉정하고 차갑게. 지금처럼 황위가 자주 바뀌는 혼란스러운 실정에는 악인으로 자신의 자리를 곤고하게 다지는 것이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 황제는 제왕으로서의 역할을 굉장히 잘 해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루라도 빨리 국정을 안정시켜야 우리 왕국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다.
나도 그 어지러운 제국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는 쪽이고.
“슈아 너 은근히 무서운 구석이 있다?”
“나와는 관련 없는 상대의 일인걸?”
“그 황제가 검은 머리카락 성애자라던데. 그 이야기도 알고 있어?”
“……검은 머리카락?”
에브린의 눈동자가 내 머리카락에 꽂힌다. 세계적으로도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러나 우리 왕국 사람들 대부분은 밝은 빛을 띠는 머리 색이 많았다.
그래서 내 머리카락이 조금 눈에 띄기는 해. 가문의 세 딸 중, 아버지의 검은 머리카락을 물려받은 사람은 나뿐이었고.
나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은근히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애써 삼켰다.
“왜 그러는 거래?”
“그야 모르지. 황궁의 사용인들을 전부 물갈이했는데, 남자든 여자든 전부 검은 머리카락의 사람만 입궁시키라고 명했대. 모자라면 짙은 잿빛이나 까만색에 가까운 고동색까지는 인정해주겠다고.”
하필 검은 머리카락이라서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다.
“그리고 또 있어. 새 황제가 변태인 이유는 양성애자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
“……양성애자?”
“여자를 거부하는 건 아닌데 그 재상이라는 사람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 같아.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침실에 끌어들인다는 소문이 있었어.”
돌아가신 선황의 정력이 그렇게나 대단하다더니, 그 3황자가 그 성욕을 그대로 물려받았나 보다. 하다 하다 남자까지 침실에 끌어들인다는 건가.
“재미있는 이야기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니까. 누굴 욕하겠어? 잔인하기로 유명하다는 사람이니 침실에 끌고 들어간 여자가 시체로 나올까 겁나네.”
“으, 그것도 끔찍하다. 아무튼 새 황제는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해. 그런 일이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거잖아?”
사람이야 어쨌든 엮이지만 않으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에쉬와 결혼해서 조용히 영지만 꾸리며 살아야지. 에쉬도 크게 권력욕심은 없어 보였으니까.
그 이후로 주제를 바꿔 서로 이런저런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갔다. 에브린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에쉬와 나의 관계였고, 나는 아주 세세하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보따리 상인처럼 일일이 나열해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아주 그냥 애틋해 죽을 사랑이네. 그런데 백작께서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조금 믿기지가 않아. 그런 표현 같은 거 안 하셨잖아?”
“맞아. 그래서 나도 굉장히 의아했어.”
“사랑받고 있었네, 우리 슈아는.”
괜히 쑥스러워 몸이 배배 꼬였다. 에브린의 아버지인 브레이튼 백작도 소문난 애처가에 딸바보였다.
기억나는 건 어렸을 때 브레이튼 백작저에서 에브린과 하룻밤 함께 자기로 했었을 때였다. 에브린이 퇴청하고 돌아온 브레이튼 백작에게 달려가 품에 안기고 애교를 피우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 내게는 굉장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우리 딸, 재미있게 놀고 있었니? 오늘은 어디 다친 곳 없고?]
[아버지! 보고 싶었다고요!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요즘 일이 많아서 늦었구나. 미안하다, 브링.]
게다가 얼마나 상냥한 목소리로 걱정을 하며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자신의 가족들을 쳐다보던지. 우리 가문의 분위기가 나쁘다는 건 아닌데 너무 달라서 꽤 한참을 입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었다.
그래서 한때는 내가 에브린만큼 우리 집안에서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우리에게 관심을 주고 있다는 것을 느낀 뒤로 사람의 성향은 전부 다른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아버지가 브레이튼 백작처럼 친근하고 다정하게 웃는 표정을 보이면 좀…… 어울리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감히 상상조차 되지도 않는 얼굴이라서.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 건데?”
“아마 바로 하지 않을까 싶어. 아버지가 수도에서 돌아오시면 제대로 의논해보려고.”
“와…… 우리 슈아가 벌써 결혼이라니. 나보다 늦게 하거나 아예 안 할 줄 알았는데. 부럽다.”
와인을 빙글빙글 돌리는 에브린이 한숨을 폭 내쉬면서 입술을 삐죽 내민다. 툴툴거리는 것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너는, 아직이야?”
“나야 하더라도 정략혼이겠지. 이제 슬슬 내가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 느낌이더라고. 빨리 가긴 해야겠는데 아무에게나 가는 건 싫고. 나 좋다고 매달리는 남자가 있으면 확 가 버리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다른 왕국으로 가지 말고 우리 왕국에서 찾아. 네가 멀리 가면 나 좀 슬플 것 같아.”
“당연하지! 내가 너를 두고 어딜 가겠어?”
오랜 친구였던 어머니들처럼, 에브린과 나도 서로 끝까지 친구 하자고 약속하며 새끼손가락까지 걸었다.
일단 식사가 끝난 뒤에 에브린은 마차여행이 고단했다면서 쉬고 싶다길래 손님방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원래 에브린이 놀러 오면 항상 내 방에서 같이 머물렀는데 아무래도 에쉬가 있다 보니.
“뭐야. 나 쫓겨나는 거야?”
“싫으면 내 방으로 가고.”
“그랬다가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아쉽지만 뭐, 오랜만에 재회한 연인의 뜨거운 밤을 방해할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