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13)화 (14/113)

13화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면서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몰래 웃음을 참는 에쉬와 그런 그를 경계하는 에브린도 나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뭔데. 응? 누구냐고. 처음 보는 남잔데. 설마 뭐 당신의 하룻밤을 사겠어요, 라는 그런 상대는 아니겠지?”

에브린의 추궁에도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어떻게 설명할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기 바빴다.

바로 식당으로 들어가서 에쉬가 빼내 주는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르슈아의 손님이 오셨으니 자리를 피해드리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같이 있어도 괜찮은데…….”

“두 분이서 나눌 이야기가 꽤 많아 보여서요. 저는 따로 식사를 한 뒤에 영지를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고마워요, 에쉬. 조심히 다녀오고요. 주의사항이 몇 가지 있을 텐데 그건 집사에게 꼭 물어보고 확인한 다음에 가요.”

부드럽게 웃어주는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내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때 내 맞은편에 착석한 에브린이 그 장면을 보면서 두 눈을 파르르 떤다. 그러더니 일부러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려두고 턱을 괴었다.

“그쪽, 잠깐 앉아 봐요. 그쪽한테도 궁금한 거 있거든요?”

어쩜 그렇게 둘째 언니랑 하는 행동도 똑같은지.

지난번에 둘째 언니가 왔을 때도 굉장히 도도한 귀부인 연기를 하며 에쉬의 인적사항을 파헤쳤었다. 보다 못한 내가 민망해서 그냥 에쉬를 내보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게 서로 미래를 약속한 사이니 이제 더는 감출 것도 없다고 여겼다.

에쉬도 긴장이 역력했던 그때와 다르게 동요하지 않은 표정으로 내 눈치를 슬쩍 보며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에브린이 상체를 앞으로 숙여 에쉬를 빤히 올려다보고는 연보라색 눈동자를 반짝거린다.

“에쉬, 라고 했나요? 초면에 실례지만 우리 슈아랑 무슨 사이예요?”

“미래를 약속한 사이입니다.”

에쉬의 거침없는 대답에 에브린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면서 나와 에쉬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 말, 진짜예요?”

“거짓을 고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흠. 좋아요. 그럼 어떻게 만나게 된 건데요?”

“정확히 열한 달 전쯤에 알게 되었고, 큰 부상을 입은 저를 르슈아가 간호해주고 돌보아주었습니다. 덕분에 목숨을 구하게 되었지요.”

에브린의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고, 조금 원망스러움이 담겨 있는 느낌으로 투덜거렸다.

“어서 해명해보시지? 어쩜 나한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거야? 근 1년을 서로 알아간 사이라니!”

“알게 된 시간이 조금 길 뿐이야. 정확히 미래를 약속한 건 어제였으니까.”

“……우리 슈아 그렇게 안 봤는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대체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이람? 난 정말 상상도 못했다?”

결혼이 뭐 해괴한 일이라고 저렇게 호들갑인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내가 남자와 엮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보니 굉장히 의외의 상황을 목격해서 더 그런 걸 수도 있겠고.

“그래서, 어디까지 갔어? 아까 둘이 키스하는 거 보니까 그냥 키스로 끝날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설마…… 그쪽, 우리 슈아한테 못된 짓을 한 건 아니겠지요?”

나는 대답 대신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그 뜨거운 시선을 피했다. 에쉬는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슬쩍 가리면서 웃음을 참느라 바빴고, 그 와중에 무릎 위에 올려둔 내 손을 꼭 잡아 쥐었다. 그래서 더 부끄러워 목까지 화끈거렸다.

다행히 에브린은 그 이상 캐묻진 않았다. 그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폭 내쉬고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대략 짐작은 되지만. 때로는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에쉬는 꼭 잡은 내 손을 더 꽉 잡았다가 조심히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랜만의 만남이니만큼 모쪼록 쌓인 회포를 푸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에쉬가 식당을 나가고, 바로 하녀장의 지휘에 식사가 준비되었다. 에브린이 저택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미리 받지 못해 음식을 준비하진 못했을 거다. 그럼에도 바로 2인분의 식사가 차려지는 것을 보면 원래 나와 에쉬가 먹을 식사였을 터.

그가 턱없이 부족한 식사를 하게 될까 봐 괜히 신경이 쓰였다.

“에쉬의 식사는 따로 잘 준비해주렴.”

“예, 아가씨.”

“어휴. 세상에. 우리 슈아 진짜 안 본 사이에 많이 변했다. 내가 아는 슈아 맞아? 다른 사람 아니고? 설마 영혼이 바뀌었다던가?”

에브린이 놀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표정은 진지했다. 나는 포크로 샐러드를 콕 찍어 먹으면서 말을 돌렸다.

“그보다 너는 소식도 없이 무슨 일로 온 거야?”

“아까 집사가 말해줬잖아. 백작 부인 뵙고 싶어서 온 거야.”

어머니의 첫 기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에브린이 어머니를 진심으로 좋아했었으니까.

작년에 어머니가 참변을 당하였다는 이야기를 알려주기 위해 편지를 보냈는데, 평소 같았으면 바로 왔을 답장이 한참 뒤에 도착했었다. 내가 보낸 소식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때 깨달았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지금도 침울해진 에브린이 평소와 다르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정말 믿겨지지가 않더라. 솔직히 오늘 와서도 당연히 부인께서 나를 직접 맞이해주시면서 평소처럼 나를 안아주실 줄 알았어. 실감도 나지 않고.”

“……그러게. 나도 그래. 그냥 어디 멀리 여행을 가신 것 같기도 하고.”

“사실 나, 그 역병 번지기 며칠 전에 수도에서 백작 부인을 뵈었었거든.”

“어머니를? 너야말로 편지에 그런 이야기 안 했잖아.”

“만나서 해주려고 꼭꼭 숨겨뒀지. 입이 얼마나 근질거렸는지 몰라.”

오히려 더 뻔뻔하게 나오는 에브린이 깊은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 역병, 정말 무섭더라. 그냥 단순한 감기처럼 보였는데 사람 죽는 것도 한순간이고. 지금에서야 말하는데, 우리 언니도 그 역병에 걸려 죽었어.”

“그게, 정말이야?”

수도를 강타했던 역병에 죽은 사람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고는 했었다. 귀족 중에서도 후계나 가주를 잃은 가문도 꽤 있었다. 다만 워낙 희생자가 많으니 서로 누가 죽었는지 굳이 대놓고 물어보진 않았다. 그저 만나면 살아남아 다행이라고 하는 말이 인사가 되었을 뿐.

그런데 브레이튼 백작가의 사람, 그것도 브레이튼 영애가 그 역병에 당했을 줄이야.

“언니 그때 결혼했다고 하지 않았어?”

“했지. 하고 두 달 지난 뒤에 그렇게 되었으니…… 그 결혼도 부모님 속을 그렇게 썩게 하고 한 건데.”

브레이튼 영애의 결혼 상대자는 평민이라고 들었다. 집안의 반대가 극심해서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하다가 어렵게 맺어진 부부라서 끝까지 행복해지길 바랐건만.

“그 남자 쪽은, 무사해?”

“같이 죽었어. 이미 결혼한 뒤라 언니의 유골은 우리 백작가에서 거두지도 못했지. 평민의 시체는 광장에 쌓아서 한 번에 태워버렸다더라.”

“……브레이튼 백작 부인께서 상심이 크시겠다. 무어라 위로를 해야 할지.”

“그래서 내가 어딜 못가고 어머니 곁에 붙어있었던 거야. 친한 친구와 사랑하는 딸을 그렇게 보내버려야 했으니, 그 마음이 어떨지는 충분히 이해가 돼.”

우리는 서로 먹먹한 가슴을 안고 묵념하듯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그 무거운 분위기를 떨치듯 에브린이 평소처럼 허리를 곧게 펴고 환하게 웃었다.

“누가 그러더라.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연의 뜻이니, 슬퍼할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인생을 즐기라고. 그게 허무하게 죽은 이들을 기리는 일이라고 했어.”

“네 말이 맞아. 슬퍼하고 눈물을 흘린다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진 않을 테니까.”

“나 진짜 너 걱정 많이 했거든. 지금까지도 회복하지 못하고 혼자 울고 있는 건 아닐지 신경이 쓰였어. 그런데 네 표정이 밝아 보여서 그나마 다행이다. 역시 사랑의 힘은 대단하네. 그렇지?”

사랑…….

다시금 안면에 홍조가 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일일이 반응해서 재미있다는 듯 에브린이 입을 틀어막고 신나게 웃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아! 나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들었어.”

“재미있는 이야기?”

“제국의 새 황제에 관한 이야기.”

나는 딱히 궁금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주제인데, 왜들 그렇게 유난인지 모르겠다. 에브린도 나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일에 관심이 손톱의 때만큼도 없었는데, 웬일일까?

“설마 황제가 또 바뀌었대?”

“너 어디까지 알고 있어?”

“우리 비엔트 왕국의 몰락한 공작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이 낳은 제 3황자가 황좌를 찬탈했다는 것까지 들었어.”

“그럼 아직 바뀌진 않았네. 너 꽤 많이 알고 있다?”

“지난번에 테페른 백작가에서 진행되는 티파티에 참석했을 때 들었거든.”

“아아, 그 꼴통? 걔는 여전하니?”

오래전부터 에브린의 앙숙으로 손꼽히는 사람이 세 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테페른 백작 영애였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테페른 영애가 에브린을 일방적으로 싫어했다. 그러나 브레이튼 백작가가 가진 권력의 힘이 좀 대단하다 보니 대놓고 무시는 못하고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하고는 했다.

그냥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 되는데, 서로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사람이 쉽게 바뀌진 않지 뭐. 이번에도 나하고 자기 남동생을 맺어주고 싶어서 넌지시 떠보더라.”

“하! 어림도 없는 소리. 그건 절대 안 돼.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내가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말릴 거야.”

“나도 생각 없네요. 그래서 그 황제에 대한 이야기는 뭔데?”

“아! 그 황제 말이야.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새 황제…….”

항상 자신만만하던 에브린이 웬일로 주변을 살피며 손으로 입을 가리기까지 하고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청난 변태에 세상 다시없는 또라이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