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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흔적 (54/79)

54. 흔적

<에드문트에게.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저택에서 매일 바쁘게 보내고 있어.

사용인들도, 그리고 오빠와 데이지도 많이 안정되었어. 물론 나도 잘 지내고 있고.

저택에 돌아온 뒤로 앓아누운 적도 없었어. 솔직히 말하자면, 아플 틈도 없이 바빠.

이 작은 저택에서도 이렇게 챙길 일이 많은데. 너는 얼마나 바쁘고 힘이 들려나 생각하면, 그때마다 많이 슬퍼.

괜찮다가도…… 네 생각에 가끔 외로워지고, 마음 아프기도 해.

그래도 바쁜 틈에 잘 도착했다는 소식 전해 줘서 고마워.

영지 내려가면서, 또 일 때문에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안부 전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거 알아.

기다릴 테니까, 아픈 곳 없이 일 마치고 오면 좋겠어.>

잠시 펜을 멈춘 엘리아가 활짝 열어 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파리를 가득 매단 나뭇가지에 바람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햇살 아래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의 틈을 헤집더니, 순식간에 엘리아가 있는 4층에 날아들었다.

‘아, 바람이…… 어떻게 해. 다 날아가겠네.’

갑자기 찾아온 바람에 창문 근처에 높이 쌓아 둔 종이가 흩날렸다. 당장 창문을 닫을 겨를도 없이, 나풀나풀 흩날리는 종이부터 급히 주워 들었다.

사용인들의 이름과 각자의 개인사가 빼곡히 적힌 종이를 품에 다 안고 나니 바람도 함께 멎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종이 더미 위에 옆에 있던 오르골까지 얹어 꾹 눌러 두었다.

‘잉크 냄새 때문에 열어 놓은 건데, 닫아 둬야겠다.’

엘리아는 잠깐이라도 바람을 막아 놓고자 창가에 다가갔다.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바람이 엘리아의 옷자락을 크게 부풀렸다.

얄궂은 바람이 주는 성가심도 잠시, 엘리아는 커다란 창 너머로 펼쳐진 풍광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바람이 구름을 다 걷어 간 덕분에 청명한 하늘만 남아 있었다.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든다 했더니. 호숫가랑 닮았네.’

푸른색만 남은 하늘을 보니 에드문트와 다녀왔던 호숫가가 생각났고, 그때를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다.

‘아, 이럴 때가 아닌데. 오늘 편지 보내려면 어서 써야 하는데.’

자리로 돌아와 쓰다 만 편지 앞에 앉았더니, 바람에 밀려 떠내려간 구름이 전부 편지지에 모여 있었다. 엘리아는 구름처럼 몽글몽글한 흰색 편지지를 들어 올려 처음부터 다시 읽어 내려갔다.

“에드문트에게. 잘 지내고 있어? 잘…… 으음. 아까 고치기 전에 뭐라 썼더라.”

몇 번이나 고친 편지를 새로 수정한 다음, 끝인사와 서명을 써넣기 위해 막 펜을 붙였을 때였다.

“아가씨! 엘리 아가씨!”

엘리아의 침실 밖에서 4층 사용인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요, 밖에…… 찾아와서…….”

“밖에? 누가 찾아왔어?”

계단을 급히 올라오느라 몰아쉬는 숨과 함께 뱉은 단어에, 엘리아가 탁자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닫았던 창을 도로 열고 몸을 밖으로 내밀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택 앞에는 색색의 물감을 찍어 그린 듯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흰색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하인들에 섞여 푸른색 옷을 입은 기사들, 눈에 익은 커다란 마차가…….

“아가씨, 엘리아 아가씨! 밖에 바람이 세서 뭐라도 걸치셔야……!”

창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도, 제가 아직 잠옷 차림인 것도 잊어버리고 엘리아는 계단을 급히 뛰어 내려갔다. 난간을 붙들고 두 칸, 세 칸씩 뛰는 모습에 하인들이 기겁했다.

그러나 위험하니 천천히 가시라는 소리,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냐는 질문, 당황한 기사들이 혹여 넘어질까 봐 심각한 얼굴로 부르는 제 이름까지.

전부 닿아 오기 전에 엘리아가 먼저 달아나 버렸다.

활짝 열린 문밖에서 봄 햇살이 가득 쏟아졌다. 엘리아는 망설임 없이 밝은 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에디!”

두 팔을 죽 벌려 그의 품에 뛰어들고는 새카만 웃옷에 얼굴을 묻었다.

다시,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벅찬 감정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엘리.”

남자의 손이 엘리아의 등을 감싸더니 허리를 감아 강하게 끌어당겼다. 작은 몸이 순식간에 그의 품에 파묻혔다.

“다녀왔어.”

동그란 귀에 속삭여 오는 이름에, 엘리아가 가는 팔로 그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여자가 남자를 향해, 남자가 여자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어서 안달했다.

이미 틈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으면서.

마음마저 서로 차지하고 말았으면서.

* * *

엘리아는 갑자기 찾아온 에드문트에게 안겨선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에디, 보고 싶었어. 로앙가에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진짜 너무 좋다.”

보고 싶었다는 말, 에드문트의 이름을 그의 심장에 박아 넣듯 속삭이기에 바빴다.

입술이 빳빳한 옷자락에 스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터라, 에드문트의 귀에는 뭉그러진 발음만 남았다.

심장께로 전해지는 따듯한 온기만 선명했다.

“보고 싶었어…….”

그가 약속 없이도 찾아와 준 게 너무 기뻐, 마음이 절절 끓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에드문트에게 여실히 느껴졌다.

실은 저도 자제하는 게 어려웠다. 엘리아는, 바라 마지않던 모습 그대로 돌아온 에드문트를 맞아 주지 않았던가.

그가 남부 공국에서, 또 튀링겐 자작가 영지의 인근에서 어떤 일을 자행하였는지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말이다.

떠나기 전과 달라지지 않은 엘리아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그동안 눈앞을 뿌옇게 흐리던 불안감이 가라앉았다.

남은 건, 한없이 쏟아지는 연인의 애정에 답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

에드문트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가는 목덜미부터 움푹 팬 허리까지 쓸어내렸다. 익숙하지 않은 충동에 끙끙 앓는 엘리아를 달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그 역시 다정함을 가장해 격정을 삭혀 보려 했다.

낯설기 그지없는 행위였다. 다정하게 달래 주는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를 가라앉히는 이 행위마저. 엘리아의 앞에서 몇 번을 반복했거늘 매번 어렵기만 했다.

얇은 실내복 위로 여린 살결이 비쳐 보이는 것조차 오늘따라 그에겐 자극적이었다.

에드문트는 간신히 시선을 떼어 냈다. 하나 이미 눈에 담은 광경이 외면하는 것만으로 지워질 리 없었다. 심지어 손은 여전히 얇은 옷감 위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흠흠.”

에드문트가 엘리아를 품은 채 망설이는 사이, 기회를 엿보던 한스가 다가와 헛기침으로 시선을 끌었다.

제게 뻗어 온 한스의 손에는 진청색 겉옷이 들려 있었다. 바람이 제법 센데 아가씨의 차림이 얇아 보이기에, 한스가 일부러 챙겨 온 거였다.

“…….”

비이성적인 행동이라는 걸 알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바람이 제법 셌고, 엘리아의 옷이 무척 얇았으니 당장 뭐라도 둘러 주는 게 마땅했다.

그걸 알면서도 에드문트는 한스가 건넨 옷을 받아 들지 않았다. 대신 한쪽 팔로 엘리아를 가까이 끌어당겼으니, 눈치로 먹고사는 한스는 곧장 의도를 파악했다.

‘아이고, 기껏 벨젠 경한테 뺏어 왔더니만. 연인한테 다른 사람 옷 덮어 주긴 싫으시다 이거지?’

한스는 웃음을 꾹 참고는 공작이 원하는 대로 물러갔다. 이미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진작 자리를 피한 터라, 한스가 사라지자 마차 주변에는 에드문트와 엘리아만 남았다.

“엘리, 잠시만.”

에드문트는 엘리아에게 양해를 구하고선 겉옷 윗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렸다. 그제야 엘리아도 그의 품에서 반걸음 물러났다.

“아, 나…….”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옷을 벗어 주려는 모습을 보고 괜찮다고 사양하려 했지만,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에 몸을 흠칫 움츠리고 말았다.

에드문트에게 안겨 있다가 갓 벗어난 터라 추위가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린 추위를 느끼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장갑 낀 손이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리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으니까.

‘처음에는 진짜 당황스러웠지. 옷을 벗어 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저 단순한 동작에 덜컥 겁을 먹던 시절이 있었다. 하나 같은 행동을 바라보며 지금 엘리아가 느끼는 감정은 애틋함뿐이었다.

물론 그가 겉옷을 둘러 줬을 땐 또 에드문트를 조끼 차림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약간의 민망함도 느꼈다.

그래도 좋은 걸 어쩌겠는가. 연인의 옷을 또 빼앗아 입고서도 엘리아는 헤실헤실 웃기 바빴다.

“고마워. 나 4층에 있었는데, 누가 왔다기에 창문 보니까 에디 네가 보이더라고. 깜짝 놀라서 빨리 내려가야겠다는 생각만 났지 뭐야. 그래서 옷도 제대로 못 갖춰 입고 나왔어.”

“연락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

“응? 미안하긴 왜. 좋기만 한데. 나 보러 와 준 거잖아.”

실내복 차림 그대로 나온 걸 두고 민망해하던 웃음이 온 얼굴로 환하게 번졌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기쁨이었고, 오로지 에드문트를 위한 미소였다.

그가 아무리 사교에 관심이 없었다 한들, 이럴 때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았다.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고백하고, 예고도 없이 찾아왔는데도 기꺼이 두 팔 벌려 안아 주어 고맙다고 말해야 했다.

그렇게라도 제가 받은 기쁨을 돌려주어야 했다.

하나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흐트러진 머리칼, 발간 뺨과 그 아래 입술을 눈에 담고야 말았으니.

에드문트는 엘리아에게 둘러 준 겉옷에서 손을 떼어 내지도 못했다. 찢어져라 세게 움켜쥐어서라도 참아 내야 했으니까.

인내심은, 전부 어디로 달아나 버린 걸까.

그가 여자의 앞에 선 순간 전부 버렸던가.

여자가 보고 싶었다는 말 한마디로 전부, 삼켜 버렸던가.

“영지에서 이제 올라오는 길일 텐데, 응접실에서 좀 쉬다 가. 같이 저녁도 먹으면 좋고. 응?”

“…….”

에드문트는 격정을 삭히는 게 급한 탓에 곧장 대꾸하질 못했다. 다행히 엘리아는 그가 대답하지 않은 게 다른 이유 탓이라 넘겨짚었다.

“혹시 금방 가야 해?”

그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에 쥐고 있던 새카만 옷을 엘리아의 쇄골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미안해. 일정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수도를 벗어나야 해.”

“아, 그렇구나. 많이 바쁜데 일부러 보러 온 거구나.”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바쁜 일정을 쪼개어 로앙가에 들렀다는 말을 듣고 다시금 감격에 겨워했다.

강아지처럼 꼬리라도 있었다면, 아마 그를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내내 살랑이며 기쁨을 표현했을 텐데.

대신 엘리아는 멈출 줄 모르는 웃음으로, 천진하게 체온을 맞대 오는 행동으로 마음을 드러냈다.

“가는 길이었으니까. 잠시 들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어. 그리고…….”

에드문트의 장갑 낀 손이 엘리아의 눈을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바람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그에게 손을 보탰다. 드러난 엘리아의 얼굴보다도, 어쩐지 뒤로 죽 흩날리는 머리칼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내 바람이 멎어 엘리아의 머리칼이 검푸른 예복 위에 넓게 내려앉으니, 달빛이 어둠 위로 스미는 듯 보였다.

아마 그의 속과 닮지 않았을까.

에드문트의 속을 갈라 열어 본다면 한 번 죽어 새카맣게 탄 마음 위로 엘리아의 흔적이 흰 달빛처럼 스며 있으리라.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서, 오는 길이 어렵지 않았어.”

속을 전부 긁어내어 연인이 준 애정으로 채워 넣으면, 나아질 수 있을까.

의문은 곧 바람이 되었다.

어둑한 마음에 제멋대로 달빛을 퍼뜨리는 바람이 되어, 그의 속에 스미었다.

* * *

“엘리, 조금 시간이 걸릴 테니 마차에 들어가 있겠어?”

남부에서 온 기사들이 로앙가에서 지내던 공작가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에드문트는 바람을 피할 겸 엘리아와 마차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럴까? 저택에 들어가 있으려면 또 호위 때문에 번잡할 테니까.”

엘리아가 동의하자 에드문트가 직접 마차 문을 열었다. 안에는 그의 옷에 묻어 있던 나무 향이 났다.

“아까 옷에서 나무 향이 나서 왜 그런가 했는데. 마차 안에서 밴 거였나 봐. 새 마차 탄 느낌이야.”

“내부 골조를 새로 바꿔 넣었어. 아마 그 때문일 거야.”

에드문트가 마차 이야기에 대꾸해 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활짝 열어 둔 문을 그대로 두더니 엘리아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 어차피 마차가 출발할 것도 아니고. 굳이 닫아 둘 필요는 없긴 하지.’

엘리아는 열어 둔 문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끽끽거리는 불안한 소리를 내는 탓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혹시 사람들 많은 것도 개의치 않고 그를 끌어안은 제 탓에 문을 열어 둔 건 아닌가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남들 보는 눈 부끄러워할까 봐 문을 열어 둔 거려나? 에디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줄은 몰랐는데. 고맙긴 한데 조금…….’

조금 아쉬운데.

민망한 마음은 목을 가다듬는 척 떨쳐 버리고, 엘리아는 눈앞의 에드문트를 바라보았다. 앉은 자리에서 다리를 쭉 뻗어도 닿지 않을 거리가 야속했다.

“에디, 나 옆에 앉아도 돼?”

“자리 불편하면 이쪽에 앉아.”

“아니, 바꿔 달라는 게 아니라 옆에 앉아 보고 싶어서. 생각해 보니까 우리 둘이 마차 타면 늘 마주 보면서 앉았잖아.”

엘리아의 말에 에드문트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앉고 싶어 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엘리아가 옆으로 옮겨 올 수 있도록 몸을 옆으로 당겨 앉아 주었다.

고집부린 대로 옆자리로 옮겨 앉으니, 텅 빈 반대편 자리가 허전해 보였다. 그래도 하나도 외롭지가 않았다.

옆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있었으니까.

“나란히 앉으니까 우리 호수 갔을 때 생각난다. 그때도 우리 앞에 아무도 없었잖아. 그래서 그런지 처음엔 외로운 기분이 들었거든.”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호수를 떠올렸다.

함께였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싶었다며, 한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실망하던 엘리아의 모습도. 그리고 어찌 위로해야 할지 몰라 아득하기만 했던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나란히 앉은 엘리아가 제 옆에 몸을 기댄 순간…….

“그러다가 네가 옆에 있다는 걸 떠올리니까 안심이 되었어.”

에드문트 역시, 위안 받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엘리아의 시간을 먼저 욕심냈던 것도.

“엘리, 나도 네가 있어서 괜찮았어.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정말? 나 많이 도움 돼?”

“응.”

망설임 없는 대답에 엘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얇은 셔츠에 따듯한 웃음이 묻었다.

“다행이다. 내가 네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얼굴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에드문트가 건넨 건 겨우 말 한마디일 뿐이었는데, 그 어떤 선물을 해도 지금 보여 주는 기쁜 얼굴을 다시 볼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는 뜻 모를 감각에 매몰된 채 엘리아의 얼굴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자의 얼굴에 담겨 있던 다정한 미소가 전부 사라진 채였다.

‘또 표정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아니, 예전의 에드문트로 돌아가는 거려나.’

이름을 부르며 예쁘게 웃어 주다가 상념에 빠지면 씌워 둔 표정이 벗겨지는, 그런 에드문트의 모습은 이제 무척 익숙했다.

‘내 앞에서 매번 웃으려고 노력하는 건 좋지만, 힘들어 보이는데. 이제 안 그래도 될 텐데……. 그래도 억지로 웃지 말라는 말은 기껏 노력하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겠지.’

대신 엘리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위해 웃어 주었다. 눈을 살짝 접고, 입매를 위로 끌어 올리자 표정이 굳어 있던 남자가 거울처럼 엘리아를 흉내 냈다.

이어 엘리아가 남자를 따라 했다. 그새 혹시 아프진 않았나 얼굴을 살펴보던 에드문트처럼, 이마를 시작으로 그를 찬찬히 훑어 내렸다.

곧은 선을 따라 내리던 시선이 이내 입술에 고였다.

“에디, 나 얼굴 좀 가까이 보여 줘.”

“이렇게?”

“응. 아, 햇빛이 뒤에서 비쳐서 잘 안 보이네. 입술에 상처 괜찮나 싶어서.”

“다 나았어.”

“벌써 다 나았어? 흉 진 거 하나도 없이?”

엘리아는 직접 확인하겠답시고 그의 입술을 뚫어져라 살피다가 손까지 갖다 대었다. 손끝에 스치는 얇은 입술은 정말 흔적 하나 없이 매끈하기만 했다.

“진짜 다 나았네. 조금 아쉽다. 아니, 그…… 다 나아서 다행이지. 당연히 상처 남으면 안 되니까. 너 아프게 해서 얼마나 미안했다고. 내 말은 그러니까…….”

엘리아는 진심을 불쑥 뱉고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에드문트는 도통 그 뜻이 가늠되질 않아 엘리아가 허둥지둥하는 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게 꼭, 설명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여서 엘리아는 울상 지은 채로 속내를 전부 고백하고 말았다.

“내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좋은 것 같…… 아니. 좋았어. 그래서 아쉽다는 말이었어. 절대 에디 네가 계속 아팠으면 해서 그런 말 한 거 아니야.”

차라리 말을 말았어야 했을까. 에드문트가 눈썹조차 움직이지 않고 굳어 있는 바람에, 엘리아의 후회를 부추겼다.

하나 얼굴을 붉히게 하던 부끄러움 위로 의문이 기어 올라왔다. 남자가, 입을 꾹 다문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않은 탓이었다.

“……엘리.”

뒤늦게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손끝에서 느껴졌다. 여태 그의 입술 언저리에 손을 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손을, 내려야 하는데.

그의 낮은 목소리가 생각을 전부 밀어내 버렸다. 어느새 허리에 감긴 그의 팔이 엘리아를 끌어당겨 품 안에 가두었다.

‘에디, 표정이…….’

처음 보는 표정에 엘리아가 긴장하고 말았다. 바람에 흔들리던 마차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난 뒤에야, 엘리아가 몸을 움찔하며 반응을 보였다.

“엘리아.”

에드문트는 그 작은 움직임마저 용납지 않고 엘리아를 더욱 깊게 끌어안았다.

시선을 맞춘 채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던 남자는 어디로 가 버렸는지. 너른 품에 파묻어 엘리아의 눈을 가리더니, 귓가에 제 목소리를 쏟아 냈다.

한 자 한 자 뱉어 낼 때마다 흔적이 지워진 입술이 엘리아를 스쳐 자극해 댔다.

“아프다고 생각한 적 없어. 그러니 얼마든지 남겨. 목이든. 입술이든.”

시야가 차단된 채 박혀 오는 목소리에 엘리아는 추락을 앞둔 이파리처럼 떨었다.

두려웠다.

저를 꽉 안아 주던 에드문트가 손을 풀어 버릴까 봐. 절대로 놓고 싶지 않은 남자를 홀로 두고 저 혼자 추락하게 될까 봐.

차라리, 그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하기를…….

‘아.’

엘리아는 벼락처럼 머릿속에 반짝인 욕망에 놀라고 말았다. 남은 이성을 붙들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듯하던 그의 셔츠가 엘리아의 몸이 흔들리는 대로 이리저리 구겨졌다.

여자의 작은 표정 하나에도 어그러지는 남자의 마음처럼.

“아니야. 저번처럼 피 나고 그러면 어떻게 해. 너 아픈 거 절대 싫어.”

겨우 한 달도 못 갈 아픔을 염려하는 모습이 오히려 에드문트에게 상처가 되었다.

팔다리가 으스러져 돌아온 아내를 보고도 제 슬픔만 염려했던 남자를 엉망으로 헤집었다. 스스로를 향한 가학심에 불이 붙었다.

에드문트는 불길 속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아프지 않았어. 그러니 엘리아.”

표정이 사라진 얼굴을 숨기고자 엘리아를 품에 깊숙이 파묻었다. 순순히 제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 모습에 남은 자제심마저 바스러지려 했다.

“남겨 줘. 너를 만나지 못할 시간 동안 내가 기억하게 해. 너를 절대로 잊을 수 없게 만들어.”

이마에, 귓가에 결코 다정하다 착각할 수 없는 입맞춤을 퍼부었다. 입술이 예민한 곳을 집요하게 헤집을 때마다 가슴팍에 눌린 여자의 입에서 더운 숨이 새어 나왔다.

“에디, 나…….”

결국, 굴복해 왔다. 엘리아가 스스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아 와선 매달렸다. 그러나 차마 바로 입술을 대진 못한 채 눈을 꼭 감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어떻게 했는지, 그게 기억이 안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알려 달라고 하더니, 엘리아는 그의 목덜미에 붉어진 얼굴을 숨겼다.

“엘리.”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숨어 버린 연인을 부르는 첫 목소리는 평소처럼 다정했다.

“……엘리.”

두 번째 들린 이름은 나무 바닥에 무겁게 깔렸다.

목소리에 다정함이 사라진 것 때문이었던가. 이름을 부르는 동시에 그가 작은 귀를 이로 문 탓이었을까.

정답은 알 수가 없었다.

의문마저 모두 그가 집어삼키는 바람에, 답은 알 수가 없었다.

* * *

입맞춤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엘리아가 지난번과 달리 이성을 놓지 않은 덕분이었고, 도저히 멀쩡한 정신으로는 피가 나도록 깨물지 못한 탓이었다.

에드문트가 기꺼이 입술을 내어 줘도, 앞니에 살짝 닿을 때마다 엘리아는 긴장으로 턱까지 덜덜 떨고 말았다.

“나 못 하겠어…….”

결국 포기한 엘리아는 입술을 떼자마자 창피하다며 그의 품 안으로 숨어 버렸다.

등을 받쳐 주던 에드문트의 손이 올라와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엘리.”

숨어 버린 엘리아의 머리칼에, 귓가에 입을 맞추며 이름을 불렀다. 욕망을 덜어 낸 목소리에는 다시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억지로 할 필요 없어.”

“싫은 건 아닌데……. 에디, 혹시 다른 거 받고 싶은 거 없어?”

입맞춤이 남긴 여운을 이어 가던 에드문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어떤 대답을 해야 엘리아가 기뻐할지를 생각해 봤지만 어렵기만 했다. 대신 그는 연인을 흉내 내 보았다.

“받고 싶은 건…… 잘 모르겠어. 이 이상 무얼 원하면 벌을 받게 될 것 같아.”

부끄러운 것도 무릅쓰고 제게 늘 솔직한 연인처럼, 그도 제 감정을 꾸밈없이 풀어놓았다.

엘리아는 고개를 들어 에드문트를 바라보았다. 담담한 목소리로 두려움을 고하는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에디.”

그 모습마저 연민을 느끼게 했다.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고, 아직 서툴러 잘 표현하지 못할 뿐일 테니까.

저 속에, 홀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감당하고 있겠는가.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고, 누가 너를 벌주겠냐고 말해 주고 싶은데……. 사실 나도 가끔 두려워. 행복한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낄 때가 있어. 아마, 우리가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탓이겠지.”

엘리아는 그가 여태 잃었을 많은 사람을 떠올리며 속삭였다. 남자가 실은 여자를 상실한 기억을 곱씹는 줄은 모른 채.

“네가 불안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내가 증명해 보이는 수밖에 없겠지?”

마른 눈가를 손으로 쓸어 주고, 찬찬히 내려오는 손길이 입술에 닿았다.

“내가, 꼭 행복하게 해 줄게. 에디 네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증명해 줄게.”

눈을 마주쳐 허락을 구하고, 살포시 입술을 겹쳤다.

다시 입술을 떼어 새파란 눈동자를 바라본 순간, 깨달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보석으로 만든 푸른 장미처럼 영원불변할 것 같던 그를 변하게 했음을.

“잊으면 안 돼. 내가 노력할 거라는 거, 그리고 누구보다 너를 사랑한다는 것도.”

며칠만 지나면 아물 상처가 아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기고야 말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 * *

세찬 바람이 닫은 문을 열어젖히니 마차 안에 다시 소리가 찾아왔다. 바람에 이파리 스치는 소리, 그리고 공작가의 기사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소리였다.

마침내, 헤어질 시간이 돌아왔다.

“에디. 돌아오면, 할 이야기가 있어. 네가 꼭 들어 주면 좋겠어.”

“일이 끝나면 바로 네게 올게.”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엘리아는 다음을 기약했다. 아마 그때는 담아 둔 이야기를 전할 수 있으리라.

그를 상처 입힐지도 모르겠다. 두려운 속내를 고백하게 하고 보듬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을 테니까.

하나 사랑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엘리아는 괜찮았다.

에드문트를 배웅하고 4층으로 돌아오니 열어 둔 창문을 넘어 들어온 바람 탓에 침실이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괜찮았다.

종이 더미가 바람을 이기지 못해 무너지며 올려 두었던 오르골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지만, 책을 든 소년이 다리가 부서진 채 협탁 아래에 처박혀 있었지만.

겨우 바람 한번 분 것뿐이지 않은가.

‘고치면 되지. 내일 아침이 되자마자 가져가서 새것처럼 고쳐 달라고 하자.’

뒤죽박죽된 종이를 한데 모아 차곡차곡 정리하고, 창문 밖으로 사라져 버린 종이 몇 장에 아쉬워하고…….

“아가씨, 좋은 꿈 꾸세요.”

“잘 자, 데이지.”

내일을 기약하며 잠이 들었다.

꿈에선 성급한 마음이 엘리아를 오르골 상점에 데려갔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오르골 제작자를 만나는 꿈이었다.

<이렇게나 망가져 버렸으니, 고칠 수 없습니다.>

다신 고칠 수 없다고 단언하는 말에 엘리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 손으로 오르골을 고쳐 보려 노력했다.

어느 순간, 다리를 다친 작은 소년은 에드문트가 되었다.

그의 앞에는 고통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누군가 에드문트에게 아픈 제목을 붙여 팔아넘기려 했다.

<데려가지 마. 빼앗아 가지 마!>

엘리아는 아픈 그를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며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에디, 괜찮을 거야. 내가 고쳐 줄게. 상처가 남으면 내가 곁에서 내내 보듬어 줄게. 아프거든 내가, 같이 아파할지언정 너를 놓지 않을 거야.>

부러진 다리 앞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었다. 그가 흘린 피가 입술을 적셨으나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 네가 흘리는 슬픔을 내가 얼마든지 받아 내 줄게. 네가 행복할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게.>

변함없을 사랑을 맹세했다.

한데 이상하지, 분명 엘리아가 맹세한 건 사랑이었는데. 죽음도 가져가진 못한다던 찬란한 아름다움이었는데.

부서진 오르골 앞에서, 꿈속에서 왜 엘리아는 눈물 마를 틈이 없었던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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