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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오르골 (55/79)

55. 오르골

엘리아가 꿈에서 깨어난 건 해가 겨우 지평선에 걸친 새벽이었다. 커튼을 닫지 않은 창을 타고 옅은 빛줄기가 침실 안쪽까지 뻗어 왔다.

눈을 뜨자마자 꿈을 타고 스민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서진 다리에 입 맞출 때 묻었던, 핏물처럼 뜨거웠다.

엘리아는 꿈이 남긴 흔적을 소매로 꾹꾹 눌러 닦으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 때문에 자극받은 눈에서 되레 더 많은 눈물이 쏟아졌다.

‘겨우 꿈꾼 거로 울긴 왜 운 거야.’

스스로를 책망했지만 제가 왜 꿈에서 깬 뒤에도 울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받은 선물이지 않았던가.

<엘리. 네게 줄 선물을 가져왔는데.>

그의 마음 하나 담겨 있지 않던 약혼 선물도 아니었고, 생일 때마다 집사가 에드문트의 이름으로 보내던 의미 없는 선물도 아니었다.

<혹시 선물이 네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다른 것도 준비할게.>

오르골은, 그의 마음이 변해 자력으로 엘리아를 생각했음을 알려 준 최초의 증표였다. 평생을 두고 보아도 애틋한 마음이 새로 싹튼 꽃처럼 피어날 귀한 보물이었다.

그렇게 소중한데, 매일 곁에 두고 보느라 가볍게 취급하고 말았다. 처음 품은 마음 그대로 소중하게 다루질 못해선 망가뜨리고 말았다.

‘내가 실수한 거야. 다음부턴 절대로 똑같은 실수 저지르지 말아야지. 다음부턴…….’

엘리아는 남은 눈물을 닦아 내고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전날 부서진 오르골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자 떨어져 나온 조각이 아침 해를 받아 반짝거렸다. 깨어진 모습을 다시 보니 마음이 아팠다.

‘에드문트는 오르골이 부서졌다고 해도 상관 않겠지. 그저 얼마든지 새로 사 줄 거라고 나를 달래려고만 할 테고.’

비록 그의 약혼자가 다정해진 게 겨우 몇 달 전 일이었고, 심지어 예쁜 웃음조차 서툴게 남을 흉내 낸 것이라 할지라도 엘리아는 그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조금은 서운할 텐데…… 에디는 나한테 표현할 줄도 모르겠지. 혼자 꾹꾹 참을지도 몰라.’

엘리아는 입술이 새빨갛게 부어오를 때까지 질끈 깨물었다. 덧없는 후회로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아가씨, 벌써 일어나셨네요. 바로 외출 준비 도와 드릴게요.”

하인들이 찾아와 아침을 알려 오고 나서야 엘리아는 오르골에서 눈을 떼었다. 간단하게 외출 준비를 마치고 부서진 오르골을 챙겨 나왔다.

“아직 문도 안 열었을 거라니까.”

복도에 나오기가 무섭게 아래층에서 외젠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 엘리아가 침울해 있던 걸 두고 마음이 쓰여 쫓아 나온 것이리라.

“진짜 갈 거야? 그 오르골 만든 사람 저택에 불러오는 건 죽어도 싫다고?”

“싫어. 저택에 외부인 데려오는 건 아직 꺼림칙하고, 오랜만에 바람도 좀 쐬고 싶은걸. 문 안 열었으면 마차에서 기다리면 되지 뭐.”

“하아. 알았다. 제발 테오 경 떼어 놓고 다니지는 말고. 다녀와.”

혼자 정보상과 접촉해서 정보를 파헤치고, 신분을 숨긴 채 북부와 남부를 휘적거리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외젠은 여전히 엘리아의 신변에 걱정이 많았다.

<아가씨가 못 미더워서 그러실 리가요. 그냥 외젠 님이 생각이 많고, 그만큼 걱정도 많으셔서 그렇죠. 제가 처음 검술 수련 시작했을 땐, 저 다칠까 봐 겁난다면서 몰래 검을 숨겨 두시기까지 하셨는걸요.>

엘리아는 외젠이 자꾸 저를 아이 취급하는 것 같아 서운했지만 데이지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애써 마음을 달랬다.

‘그래. 터놓고 말한 지 며칠 되었다고. 금방 좋아질 수는 없는 거잖아.’

엘리아는 너그러운 누이동생이 되어 외젠을 다독여 준 뒤 마차에 올랐다. 앞뒤로 호위가 다섯씩이나 붙어 이른 아침의 상점가가 복작복작해지고 말았다.

“아가씨,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마차는 금방 오르골 상점이 있는 골목에 접어들었다. 잠시 마차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이 기사들이 상점 인근을 정리하고는 엘리아를 오르골 상점으로 안내했다.

“급히 수리가 필요한 오르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먼저 온 기사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오르골 제작자가 엘리아에게서 오르골을 받아 들었다.

상자가 열리며 부서진 오르골이 드러나자 엘리아가 시선을 살짝 떨구며 변명했다. 돈을 주고 팔았더라도 제작자에겐 자식이나 다를 바 없을 테니, 미안한 마음이 든 탓이었다.

“높은 곳에 잠깐 두었는데 떨어져서…….”

“그러셨군요. 오르골은 다른 장식들과는 다르게 태엽을 감느라 손을 자주 타니, 그만큼 바닥에 떨어져 부서지는 일이 자주 생기지요.”

다행히 제작자는 공들여 만든 오르골이 부서진 모습을 보고도 서운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되레 흔한 일이라며 엘리아를 다독이고선, 동그란 안경을 꺼내 쓰고는 부러진 조각에 집중했다.

인자하던 얼굴이 자못 심각해지는 모습에 간밤의 꿈이 떠올랐다.

<이렇게나 망가져 버렸으니, 고칠 수 없습니다.>

비이성적인 불안감인 줄은 알았지만, 꿈속에서 들었던 말을 다시 들을까 봐 겁이 났다. 엘리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거들었다.

“시간이 걸려도 괜찮고,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지원해 줄 테니 꼭 고쳐 줘. 정말 소중한 사람한테 받은 선물이거든.”

“예, 고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새것처럼 말끔하게 수리해 드리겠습니다.”

다행히 현실은 엘리아의 악몽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쉰 엘리아가 아직 제작자의 손에 들린 조각을 바라보았다.

“……혹시, 고치면서 다른 곳도 조금 만져 줄 수 있을까?”

엘리아가 오르골에서 떨어져 나온 소년의 얼굴을 가리키자, 그는 제 작품을 수정해 달라는 요구를 흔쾌히 승낙했다.

“웃고 있는 모습으로 말이지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시간 괜찮으시면 바로 수정해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도구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소년의 얼굴 위로 붉은 점 몇 개를 찍었다. 긴장한 것처럼 보이던 얼굴이 붓질 몇 번 만에 금방 웃는 표정이 되었다.

“이렇게나 빨리 될 줄은 몰랐어.”

“웃게 하는 것쯤이야 간단하지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와 정확히 반대되는, 그러니까 누군가의 얼굴에 행복이 비치게 하는 건 참으로 힘들다고 생각하던 엘리아가 눈을 깜박이며 의문을 표했다.

그러자 제작자가 넉넉한 웃음을 흘리며 설명을 보태 주었다.

“아가씨께서도 겨우 이 노인네가 점 찍는 거로 그리 웃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엘리아는 그 말에 손을 뻗어 얼굴을 만졌다. 웃는 표정이 만져질 리야 없었지만, 엘리아는 그의 말대로 제가 소년의 바뀐 얼굴을 흉내 내 웃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네. 어렵지 않네.”

사실 엘리아가 웃은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에드문트를 떠올리게 하는 소년의 불안한 표정이 해사하게 피어난 모습, 그리고 오르골을 고칠 수 있다는 말에 죄책감이 해소된 발로로 미소가 스민 거였다.

그러나 전부 차치하고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겨우 붓질 두 번에 엘리아가 웃은 게 맞았다.

에드문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변심한 뒤 엘리아에게 웃어 주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걷어 내면, ‘에드문트가 엘리아에게 웃어 주었다.’라는 아주 단순 명료한 문장 하나만 남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 웃게 하는 것처럼, 세상 어려운 것 하나 없으면 좋겠는데.”

엘리아는 어느새 작업용 탁자 앞에 앉아선 턱을 괸 채 한탄을 늘어놓았다. 마무리 작업을 하던 남자는 손녀 같은 귀족가 아가씨의 투정에 빙긋 웃음 지었다.

제가 보낸 까마득한 세월을 되짚어 보면, 가장 고민이 많을 나이대가 아니던가.

“무엇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십니까. 고장 난 건 고치면 되고, 울고 있으면 웃게 하면 될 텐데요.”

남자는 서슬 퍼런 공작의 눈빛에 긴장했던 예전과 달리 여유가 넘쳤다. 바지런히 손을 놀리는 동시에 어린 귀족 아가씨의 고민 상담까지 겸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늦은 걸 바로잡는 일, 실수를 자꾸 곱씹게 되는 것…… 그게 너무 어려워. 전부 없었던 일로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시간을 돌리고 싶으신가 봅니다.”

“실수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야 그러고 싶지. 그 어느 소원보다도 불가능한 일일 테지만.”

“되돌리시면 되지요.”

“어떻게?”

“조금만 기준을 낮춘다면 어려울 거 없지 않겠습니까.”

그는 잠시 고개를 들더니 뒤쪽에 펼쳐진 오르골 진열대를 쭉 둘러보았다. 권유하는 소리는 없었음에도 엘리아는 절로 남자를 따라 상점 안을 둘러보았다.

“저희 상점에 처음 오신 분들이 꼭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고?”

아기자기한 장난감 같은 오르골, 막연한 갈망을 부르는 어여쁜 조각품들이 자장가처럼 울리는 음악과 어우러져 신분과 나이를 불문하고 다들 같은 감상을 느꼈으리라.

그래, 엘리아 역시 잠시나마 눈물로 흘려보낸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 내 봐야 슬프기만 한걸. 실수는 이미 저질렀고,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멀어졌으니까. 후회만 자꾸 하게 될 텐데.”

엘리아는 에둘러 표현했지만, 노인은 어렵잖게 그 안에 담긴 죽음과 이별의 흔적을 짚어 낼 수 있었다.

“하면, 후회해야지요.”

뜻밖에도 다정하지 않은 말이 이어졌다. 놀리는가 싶었지만, 목소리엔 짓궂은 기색이 없었다.

“실수했던 과거로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여 못다 한 후회 계속하고 아파해야지요. 과거에 남겨 둔 고통으로 다시 돌아가 천천히 앓으면, 그러면 시간이 용서를 받아 줄 테니까요.”

“시간이 용서를 받아 준다고?”

“참회하고, 아파하면 시간이 상처를 보듬습니다. 하지만 괴롭다고 외면한다면, 과거는 시간에 붙잡혀 점점 멀어지기만 하겠지요. 언젠가는 돌이킬 수조차 없게 될 테고요.”

세월이 짙게 묻은 목소리에 이어 작은 마찰음이 들렸다. 엘리아가 시선을 소리가 난 탁자로 끌어왔다.

탁자 위에는 오르골이 놓여 있었다. 다리가 부러진 채 나뒹굴던 소년이 다시 곧게 선 채 엘리아를 마주했다.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벌써 수리가 끝난 거야?”

“예, 끝났습니다. 파손된 부위가 깔끔해서 어렵지 않았습니다. 아가씨께서 망가졌다고 멀리 치워 두는 대신 곧장 가져와 주신 덕분이지요.”

“그러니까, 늦지 않아서 그만큼 쉽게 고쳤다는 말인 거지?”

“예, 이제 앞으로 매일 한 번씩 접착제를 덧발라 주시면 전보다 더 단단하게 굳을 겁니다.”

“부서지기 전보다 더 단단하게…….”

엘리아가 남자의 말을 곱씹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며 상자 안에 넣어 외면하는 대신, 조금이라도 빨리 가져온 덕분에 고칠 수 있었다는 말이 마음에 쿡 박히었다.

“그러니 아가씨, 손 닿길 주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망가졌을 때가 생각난다고 외면하지 마시고, 부디 자주 관리해 주고 태엽 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깝다고 손도 대지 않거든 오히려 삭아 버리니까요.”

남자의 말이 비단 오르골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고 느껴지는 건, 아마 엘리아의 상황 때문이리라.

‘그래. 사람이나 오르골이나…… 마찬가지겠지.’

아끼는 마음으로 안전한 곳에만 두거든, 서서히 먼지 쌓이고 망가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결국, 서로를 향한 마음마저 검게 삭아 버리고 말리라.

* * *

엘리아는 제작자의 당부대로 매일 한 번씩 오르골을 꺼내 손질했다. 4층 침실에 아침마다 태엽 감는 소리와 함께 잔잔한 춤곡이 연주되었다.

이내 모든 저택의 사용인들이 아름다운 춤곡을 흥얼거리게 되었다.

태엽을 감지 않아도 들리는 음악에 박자를 맞추어, 엘리아는 에드문트를 생각했다. 마음 위에 먼지가 가득 쌓여도 훔쳐 줄 사람 없을 연인을 그리워했다.

‘보고 싶다.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으려나.’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렇게나 어려울 줄이야.

‘에디도 나만큼 그리움을 느끼려나. 그러면 너무 힘들 텐데……. 나를 생각해 주면 좋겠지만, 나보다는 덜 그리워하면 좋겠어.’

혹여 부담이 될까 봐, 보고 싶다는 말로 편지지를 가득 채우던 여자는 갈망을 덜어 내는 대신 마음을 꾹꾹 눌러 넣었다.

<요즘 화분 하나를 돌보는 중이야. 가을에 꽃이 피는 식물이라는데 아직 이름은 몰라. 부디, 너를 닮은 푸른색 꽃이 피길 기도하고 있어.>

<오늘 하늘에 구름이 많았어. 비가 많지 않은 계절이니까, 어쩌면 에디 네가 바라보던 하늘을 거쳐 오지 않았을까?>

사랑과 그리움을 다른 말로 치환해 보려 했으나 결국 사랑이었고, 그리움이었다.

에둘러 쓴 글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울려 작은 바람이 되길. 연인을 보듬고 싶다는 바람 들어주길.

엘리아가 바라는 건 그뿐이었다.

봄을 데려가는 세찬 여름 바람을 두려워하는 대신, 창문을 활짝 열어 새 계절을 반겼다. 그 어느 것도 바람에 휘청이지 않았다.

보내지도 못할 거라며 체념하는 대신, 편지지를 아끼지 않고 매일 마음을 적었다. 시간이 바람이 되어 엘리아를 헤집고 또 헤집었으나 흔들리지 않았다.

“벨젠 경, 혹시 에드문트에게 편지 전할 방법이 있을까요?”

“제게 주시면 기회가 있을 때 공작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엘리아는 먼저 써 둔 수십 장의 편지 중에 고르고 또 골라 한 움큼을 봉투에 담았다.

그러고는 새로운 편지를 썼다. 샛노란 편지지도, 하늘빛의 편지지 묶음도 금방 바닥이 보였다.

때론 편지 대신 글을 적었다. 에드문트가 돌아오거든 전할 말을 고르고 또 골라 미리 연습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엘리아 님.”

조금 힘들어질 때 즈음, 손님이 찾아왔다.

답장을 기다리던 편지보다, 재회를 기약하고 떠난 연인보다도 먼저 엘리아를 찾아온 건 공작의 보좌관 한스 마이어였다.

“지난번 제가…… 저를 위한 선택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시는지요.”

마지막 만났을 땐, 마차에서 두 분이 뭐 그리 할 이야기가 많으셨느냐며 놀려 대었던 장난기 많은 남자였는데. 그는 달라져서 돌아왔다.

영원한 건 없음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아가씨를…… 주실 수 있으신지요. 제발 엘리아 아가씨, 부탁드립니다.”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는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라스페 공작님을 도와주십시오.”

남자의 말이 끝나자 닫아건 창문 틈새로 바람이 불었다.

그저 전부 휩쓸고 상처 남기고 떠날, 바람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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