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05)화 (105/135)

105.

숨죽이고 상황을 살피던 테오가 이엘리야의 머리 위로 번뜩이는 한센의 검을 보고는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챙-!

쇠붙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테오가 검을 뽑아 들자, 괴한들이 주춤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들은 정말 바르한 자작을 죽이려는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테오의 움직임에 그의 목을 누르고 있던 검날이 불가피하게 살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세 명. 테오가 이를 아득 물고, 숨을 들이마셨다. 테오는 그들이 이엘리야 쪽으로 가지 못하게 검을 휘둘렀다.

“이엘리야!”

테오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이엘리야가 몸을 최대한 숙이고 검날을 바로 세워 잡았다. 치명상만 입지 않으면 살 수 있을지 몰랐다. 이길 수 없으니, 도망쳐야 하는데. 이엘리야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매서운 칼날을 보고도 눈을 감지 않고 틈을 찾기 위해 애썼다.

“한센!”

그 순간,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비앙카가 한센을 덮쳤다. 한센이 빠르게 검의 방향을 바꿔 비앙카를 막아냈다.

“윽!”

체중을 전부 실어낸 비앙카의 공격에 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비앙카의 검이 한센의 뺨을 얕게 스치고 튕겨 나갔다. 비앙카는 한센의 힘에 밀려 땅에 착지하자마자, 다시 한센에게 달려들었다. 당황해서 평정을 잃었을 때, 단숨에 몰아세워야 했다. 한센과 직접적으로 맞붙기에는 체격과 실력 차가 컸다.

“너!”

챙-!

한 번 더 그를 막아낸 한센은 지젤의 하녀인 비앙카를 단숨에 알아보고 분노했다. 후작님이 불쌍히 여겨 목숨 살려줬건만, 이런 식으로 일을 방해하다니.

“후작 부인 옆에서 걸레질이나 하던 놈이 날 이겨먹겠다고?”

비앙카는 한센의 분노에 눈을 가늘게 뜨고 시간을 가늠했다. 그는 생각 없이 한센과 검을 맞대지 않았다. 검에 미리 소량으로도 말 한 마리를 마비시키는 마취약을 발라뒀다. 바르한 자작이 나머지 기사들 발을 묶고는 있었지만, 빨리 끝내야 했다. 자작은 검술에 능한 자가 아니었다. 방금의 공격으로 한센의 뺨을 스치기는 했으나 너무 얕았다. 쯧. 비앙카가 짧게 혀를 차는데, 이엘리야가 입을 열었다.

“방금 그 말 무슨 뜻이야.”

이엘리야가 으득 소리가 나도록 검을 움켜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언니가 아니라고? 날 쫓아온 이유가 있다고? 한센은 이엘리야의 말을 무시하고 이쪽을 매섭게 노려보는 비앙카를 주시했다. 그러자, 이엘리야가 단숨에 한센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슨 뜻이냐고!”

이엘리야가 온몸을 내던지다시피 해서 그에게 검을 휘두르자, 한센이 짧게 혀를 차며 그걸 받아쳐 냈다. 동시에 그의 뒤를 파고든 비앙카의 검이 무릎 뒤를 스쳤다. 한센은 짧게 치고 빠지는 비앙카의 행동이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다시 이엘리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엘리야가 조금 더 빨랐다. 그녀는 명치 쪽을 파고드는 한센의 검을 밀어내고는,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한센이 평정을 잃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무슨!”

이엘리야의 검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움직임을 눈으로 보고 있었으나, 팔이 따라주지 못해 막지 못한 한센이 당황스러움에 크게 소리쳤다. 허공에 붉은 핏방울이 흩날렸다. 일격에 왼 어깨가 깊게 파인 한센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걸 보면서, 비앙카는 그의 무릎 뒤를 발로 걷어찼다.

“비겁하게 약을 쓴 모양이구나.”

순식간에 입술 감각까지 얼얼해졌다. 비앙카의 발길질에 그대로 땅으로 고꾸라진 한센이 이를 아득 물고, 비앙카를 노려봤다. 비앙카가 그런 한센의 등을 꾹 밟고 손에 쥔 은색 칼날을 내려다봤다. 그러자, 이엘리야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당장에 죽이고 싶었지만, 동시에 들어야 할 말이 있었다.

“죽이면-”

“후작 부인의 허락 없이는 죽이지 않습니다.”

“당신, 우리 언니가 보낸 건가요?”

이엘리야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 말에 비앙카는 잠깐 고민했다. 오지랖으로 온 것인데, 아직은 후작 부인의 사람이지. 그사이에 뒤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던 테오가 소리쳤다.

“비앙카!”

그의 부름에 비앙카는 이엘리야에게 품고 있던 밧줄을 내던지고는 테오를 향해 달려갔다. 생각보다 긴 밤이 될 것 같은 예감에 비앙카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이엘리야는 한센의 팔을 뒤로 꺾어 손목을 묶으면서 흙에 더럽혀지는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봤다. 5년 전에도 자신은 아벨린의 흙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과거의 회상에서 벗어나려고 그녀가 고개를 내젓는데, 투둑- 빗물이 그녀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아.”

작게 탄식한 이엘리야는 그대로 먹구름이 드리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날도 이렇게 비가 왔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

“언니, 뭐라도 좀 먹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이엘리야가 굳게 잠긴 지젤의 방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역시나 대답을 들려오지 않았고,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엘리야가 아랫입술을 콱 깨물고 울상 지었다. 불쌍한 언니.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는데도.

그녀는 청혼을 목적으로 찾아왔던 후작을 기억하고 있었다. 맹수처럼 자신을 내려다보던 눈이 매섭기 짝이 없었다. 웃음도, 울음도 많은 언니가 그런 사람과 살 수 있을까? 이름도 없는 가문의 딸이라고 수도 사람들이 홀대하지는 않을까? 지젤이 침실에 박혀서 우는 날이 늘어날수록 이엘리야도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언니, 미안해. 내가 아무것도 못 해줘서.”

이엘리야가 숨소리와 같이 작게 중얼거린 말을 지젤은 듣지 못했다. 이엘리야는 그걸 굳이 크게 다시 이야기하지 않았다. 언니가 억지로 네가 뭐가 미안하냐고 웃으면, 그 나름대로 마음이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열린 결혼식,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사람들은 눈이 퉁퉁 부은 지젤을 보며 수군거렸다. 언니의 우울한 표정과 냉담한 후작의 얼굴을 보며 이엘리야는 울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이 결혼을 받아들인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솟구쳤다. 언니가 저렇게 싫다는데, 죽어도 하고 싶지 않다는데. 나도 나중에 저렇게 내 의사와 상관없이 팔려가는 걸까.

결혼식이 끝나고 난 뒤, 이엘리야는 수많은 편지를 써서 후작가로 보냈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도 언니에게 연락이 오지 않자, 고민하던 이엘리야는 행동하기로 했다. 그녀는 지젤이 좋아하던 책 몇 권과 언니를 생각해 구운 초코쿠키와 장신구 몇 개를 챙겼다. 그걸 옆에서 가만히 보던 하녀 마샤가 주저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엘리야 님, 설마 후작가로 가시려는 건 아니죠?”

“마샤, 이럴 때 동생이 가서 도와줘야지. 언니가 기분이 좀 나아지고 웃기 시작하면, 후작은 금방 언니를 아끼게 될 거야.”

이엘리야의 말에 마샤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떨궜다. 그러고는 깊게 한숨을 쉬며 짐을 싸는 이엘리야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마치 위로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도 다정한 손짓이었다.

“후작님이 아벨린 남작가의 사람은 후작저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셔서, 남작님께서도 헛걸음하시고 돌아오셨어요.”

그러니, 이엘리야 님께서 가셔도 똑같을 겁니다. 마샤의 설명에 이엘리야는 손에 쥔 쿠키 봉지를 꽉 쥐어 잡고 어깨를 떨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이유는 저도 모르겠지만-”

“그럼 내 편지도, 언니가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아버지는 뭐라 하시는데?”

“남작님께서는 아가씨를 한동안 수도원에서 지내게 하려고 하세요.”

“뭐?”

아랫입술을 콱 깨문 마샤의 말에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이엘리야는 결혼식 이후로 깊게 대화해본 적 없는 아버지를 찾아 서재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이엘리야.”

초췌한 얼굴로 앉아있는 남작을 본 이엘리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수도원이요? 왜 아벨린가의 사람들은 후작저에 발도 못 들이는 거죠? 대체 무슨 일인데요?”

“모든 일을 다 해결한 다음에 알려주마. 자정이 좀 넘어서 수도원에서 사람일 올 테니,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가있어.”

“아버지!”

상황을 납득하지 못한 이엘리야가 버럭 소리를 치며, 남작에게 다가서자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작은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자신의 딸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가.”

“네?”

“그냥 아비 믿고 가 있으렴. 나중에 데리러 가마.”

이건 절대 잃어버리지 말고.

“하나 남은 네 어머니 유품이니까.”

이엘리야는 자신의 목에 걸린 루비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는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언니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데요? 대체 언니가 무슨 잘못을 해서 가족들도 못 만나고 후작저에 갇혀 살아야 해요?”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란다. 굳이 따지자면 힘없는 아비의 탓이지.”

남작이 고통스럽게 중얼거리며 서글프게 웃었다. 이엘리야는 자신을 말없이 끌어안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데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건 절망스러웠다.

***

밤중에 들어갔던 수도원을 그다음 날 아침 빠져나온 이엘리야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산길을 넘었다. 수도원에 처량하게 앉아서 가족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나 하고 있으라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뭐가 어찌 되었든, 당장 언니를 만나서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알아내고 도와야 했다. 아무리 남편이라도 지젤을 가족과 만나지 못하게 할 권리는 없었다. 우리 언니는 내가 지켜야지. 그렇게 당찬 걸음으로 언덕 하나를 넘어선 그녀는 그대로 멈춰 섰다.

“무슨 연기가 저렇게-”

저 너머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잿빛 연기를 본 이엘리야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달렸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안 돼. 아니야. 숨을 헐떡이면서 절박하게 내달리는 이엘리야의 푸른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갑자기 그녀를 수도원으로 보낸 석연치 않은 아버지의 태도들. 그 표정, 손짓이 또렷하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가 그렇게 산의 뒷길로 남작저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저택은 다 타고 남은 게 없었다. 새카맣게 타버린 잔재들 속에서 시신을 찾는 기사들을 보며 이엘리야는 나무 뒤로 숨었다. 아벨린가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기사들이 누군지 살피던 중 결혼식 때 봤던 한센을 찾아낸 이엘리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야. 그냥 사고로 불타버린 거겠지. 아니겠지, 아버지는? 마샤는?

“여기 이게 남작인 것 같습니다!”

기사 중 하나가 질질 끌어내는 시커먼 시신을 본 이엘리야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절로 무릎을 꿇게 된 그녀가 멍청하게 비명을 지르기 직전 누군가 그녀를 제지했다.

“조용히.”

이엘리야는 커다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흑발의 남자를 보고 그대로 숨을 멈췄다.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남자도 분노와 경멸에 휩싸여있었다. 그게 이엘리야와 황태자와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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