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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04)화 (104/135)

104.

방금까지는 조금이나마 호의적이었던 황녀의 표정이, 당장에 욕 한마디 하고 싶은 얼굴로 변하는 걸 보면서 지젤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검은 장갑을 낀 오른손으로 입가를 살짝 가리며 웃던 지젤이 가벼운 농담조로 물었다.

“제가 무슨 성녀도 아니고, 단순히 이안 좋으라고 가지 않겠다는 것 같으세요?”

“건방짐이 이리 하늘을 찌르니.”

정말 나랑 안 맞아. 엘레노어가 오른 눈썹을 들어 보이며 하는 말에 지젤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붉은 머리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며 반짝였다. 밝은 곳에서 언뜻 보면 주황빛으로 보이기도 하는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찰랑거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절 위해서 가지 않겠다 결론 내린 것이니, 반대로 제가 필요하다면 따라갈 겁니다.”

“하, 본인을 위해 황궁행을 거부한다?”

“제가 황궁에 따라가봤자, 이안 옆에 꼬이는 여자들 치워내고 견제받기 바쁠 텐데. 거길 제가 왜 갑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이유는 순전히 꼬여버린 심보 탓이었다. 건방지다고? 지젤은 엘레노어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누가 누구보고 건방지다는 건지. 본인 편하자고 내 동생을 5년 동안 숨겨놓고, 딴에는 예뻐했으니 이해해라? 이엘리야가 본인 입으로 5년 동안 행복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이엘리야를 찾은 다음에 다시 얘기하지. 이혼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이엘리야를 데리고 있을 수 없을 테니.”

엘레노어가 화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하는 말에 지젤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엘리야를 찾고 난 그다음 일은 황녀님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닙니다.”

“현명하게 생각해. 내가 다시 황국으로 데려가는 것도 한 방법이니.”

엘레노어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대답 없는 지젤을 쓱 위아래로 훑었다. 이엘리야를 찾은 다음에, 후작 부인이 어떤 결론을 내리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지젤만 따라오지 않으면 이안의 파혼도 다 무효화시킬 수 있었다. 거기까지 계산한 엘레노어가 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후작 부인이 무슨 생각으로 후작과 둘이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진창에 애를 둘 수는 없었다.

***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침실에 누운 지젤은 잠들지 못했다. 비앙카가 말도 없이 사라질 리 없었다. 후작이 죽이지는 않았을 것 같아 기다렸는데 이건 뭔가 이상했다. 주방의 찻잎이 사라진 것도 수상했다. 설마, 후작이 거기까지 알까? 5년을 지켜봤는데,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사고하는 방식을 보자면, 마치 다른 생명체 같았다.

덜컹-.

난데없이 열리는 창문 소리에 지젤이 휙 몸을 일으키고는 베게 밑에 숨겨둔 단검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달빛에 어렴풋이 보이는 얼굴이 비앙카의 형이라는 걸 깨닫고 작게 탄식했다.

“바한.”

비앙카보다 체격이 크고, 투박해 거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사내를 보며 지젤이 한숨을 내뱉었다.

“이 시각에 귀부인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서다니 무례하네요.”

“아벨린으로 안 가십니까?”

이제 슬슬 출발하셔야 아침까지 돌아올 수 있잖아요. 이런 일에 치밀한 후작 부인이 무슨 일로 이렇게 느긋한 거지. 바한이 의아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자, 지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아벨린?”

“아무리 빨리 말을 몬다고 해도, 지금 가셔야 내일 아침에 후작이 의심하지 않을 텐데요.”

“난데없이 찾아와서는 아벨린이라니?”

“여동생과 바르한 자작에게, 아벨린으로 오라고 쪽지를 전하셨지 않습니까.”

“뭐?”

바한은 한 번에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끔뻑이는 후작 부인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젠장.”

단숨에 상황을 파악한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침대로 성큼 다가섰다.

“그럼 그 화가 나부랭이한테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자작저로 가겠다고-”

바한은 그 이상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지젤의 팔을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당황한 지젤이 그의 손길대로 침대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요, 화가는 아벨린에서 만나자는 쪽지를 줬습니다. 누구 짓이죠?”

“황녀나 황태자일 리가 없으니, 후작이겠네.”

이안이나 엘레노어가 굳이 아벨린으로 불러낼 리 없었다. 그걸 들은 바한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지젤의 가는 팔을 잡아당겼다. 후작 부인의 주위는 매사 이렇게 얽혀있고, 복잡했다. 이래서 어중간하게 끼어있기 싫었던 건데.

“지금 바로 출발하셔야 합니다.”

주인 없는 개를 함부로 쓰려다가 손을 물렸다. 지젤이 자신의 실수를 곧바로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지젤은 자신의 멍청함과 안일함을 자책하면서도, 냉정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두 번은, 그녀가 대신 죽는 한이 있어도 두 번은 동생의 죽음을 겪고 싶지 않았다.

***

“이엘리야, 이 길이 맞나요?”

숲으로 가는 길 같은데. 테오가 말을 멈춰 세운 채로 의심하듯 앞장서고 있던 이엘리야에게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밤중이라 쉽게 길을 잃게 되니, 걱정스러워 묻는 말인데.”

테오가 성의 없는 그녀의 태도를 비난하듯 중얼거렸다. 해는 아까 산 뒤로 숨은 지 오래였고, 이제 달에 의존해 말을 몰고 있는데 그녀는 계속 그를 샛길로 이끌었다. 강도에게 당하기 딱 좋은 코스였다.

“전 여기서 나고 자랐으니, 길 잃을 걱정은 하지 마세요.”

사실, 본인도 이렇게 또렷하게 길을 기억해낼 줄 몰랐던 이엘리야가 속내를 감추고 태연하게 답했다. 5년 전 그 사건 이후로 한 번도 아벨린에 와보지 못했던 그녀는 말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능숙하게 말 머리를 틀어낸 이엘리야가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테오는 그걸 보면서, 승마도 저리 잘하는 걸 보면 그동안 꽤나 곱게 자란 것 같다고 짐작했다.

“말은 어릴 때부터 탔던 겁니까?”

테오가 은근슬쩍 옆에 서며 묻는 말에 이엘리야가 고개를 까딱였다.

“자작님께서는요?”

“나는-”

타봤을 리가 없었다. 그는 10대 중반까지 끼니 걱정하느라 절절매던 사람이었다. 그걸 솔직하게 말하기가 멋쩍어서, 그냥 적당히 어릴 때는 타본 적 없다 답하려던 그때였다.

휙-.

화살 하나가 날카로운 소음을 만들며 바람을 가르고 날아와 이엘리야의 말 복부에 꽂혔다.

히이이잉!

놀란 말이 앞발을 들며 소리를 우짖자, 이엘리야가 재빠르게 말고삐를 부여잡았으나 뭘 어찌할 새도 없이 그대로 낙마했다. 동시에 놀란 말이 그대로 달아났다.

“윽!”

몸이 뒤집히며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 그녀가 고통 어린 신음을 토해냈다. 그녀의 허리에 매여있던 검이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검집과 분리되었다.

“이엘리야!”

놀란 바르한 자작이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흙바닥을 나뒹구는 그녀를 부축하러 가려 했지만,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괴한이 그를 가로막았다. 복면을 쓴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저번에 마차에서 떨어트렸던 황국의 기사와는 다르게 살의를 띠고 있었다. 테오가 허리춤에 있는 검 손잡이를 잡자 괴한 중 하나가 그의 목에 검날을 눌렀다.

“자작님께서는 움직이지 마십쇼. 저희는 이 여자만 처리하면 됩니다.”

복면을 쓴 한센이 말에서 떨어진 통증으로 허리를 부여잡고 일어서지 못하는 이엘리야에게 다가서며 경고했다. 바르한 자작은 단숨에 그가 후작의 충실한 종, 한센이라는 걸 알아채고 아득 이를 물었다. 후작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지젤이라는 사람을 괴롭히고 싶어 안달 난 사람 같았다.

“형부가 기어코 날 죽이려나 봐?”

바닥에 널브러진 자신의 검을 뽑아 든 이엘리야가 비틀비틀 일어서며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한센이 숨을 들이마시며 허리춤에 매달린 검집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그의 손에 쥐여진 날카로운 검날이 달빛에 반짝였다.

“내 아버지를 살해하더니, 이제는 언니까지 마차 사고로 위장해서-”

“아무것도 모르면 닥치는 게 좋을 겁니다.”

퉤. 이엘리야가 자신의 말을 끊어먹은 한센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숨을 고르기 위해 애썼다. 황궁에서 호신의 일종으로 검을 배웠지만, 검술로 이 남자를 이기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엘리야의 푸른 눈이 어둠 속에서도 분노로 들끓어 빛났다.

“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괴롭힐 수 있는 거지? 우리 가문 사람이 후작의 부모라도 죽였나?”

“저는 개인적인 감정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한센이 주춤 뒤로 물러서는 이엘리야를 향해 한 발 다가섰다.

“후작 밑이나 핥는 개새끼 노릇 하다 보면, 후작을 닮아가는 건가? 고고한 척은. 뭐? 개인적은 감정은 없어?”

이엘리야는 오늘 죽게 된다면, 속에 쌓인 분노를 다 쏟아내고 죽어야 덜 억울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센을 자극하는 그녀를 보면서 테오는 분위기를 살폈다. 한센까지 포함해 눈에 보이는 것만 네 명. 이길 수 있을까? 아니, 당장 시간 벌어 이엘리야를 살릴 수 있을까.

“고귀한 기사도 정신 팔아먹고, 죄 없는 아벨린가 사람들 산 채로 불태워 죽이니 후작이 어여쁘다고 머리라도 쓰다듬어주던가? 그럼, 그 나이 먹고 좋다고 배 까고 드러눕나 보지?”

“절 조롱해서 뭘 얻겠다고, 그렇게 신이 나서 떠드시는지 모르겠군요.”

한센은 이쪽을 도발하는 이엘리야가 검을 잡고 있는 모양새를 보고 단칼에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세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무게중심을 확실하게 잡고 있는 걸 보니, 어쭙잖게 칼놀이하는 아가씨는 아닌 것 같았다. 이게 싸움으로 번져서 자작까지 죽이면 곤란해지니, 귀찮은 일은 피해야 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흐르는 걸 보고 있노라면, 네 주인인 후작이 미쳤다는 생각이 안 들어? 우리 언니가 달리아 안나의 딸이기 때문에? 그건 이 모든 살인을 정당화시킬 수 없어.”

이엘리야가 어이가 없다는 듯 비소를 머금고 하는 말에 한센이 코웃음을 쳤다. 성질 살살 긁어대는 그녀의 말에 처음으로 반응해준 그가 입을 열었다.

“여태, 공주가 정말 지젤 님이라고 생각하다니.”

“뭐?”

“내가 이렇게 악착같이 쫓아온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한센의 조롱 섞인 물음에 이엘리야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게 무슨.”

이엘리야의 푸른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지만, 한센은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의 말을 또렷하게 들은 이엘리야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뭐라고? 놀란 이엘리야가 작게 입을 벌린 채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검을 잡은 손에 힘을 풀자 한센이 손에 든 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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