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오해? 어떤 오해?”
미하엘이 톡- 지젤의 코끝을 검지로 가볍게 누르며 물었다. 지젤이 그런 미하엘을 이상하게 올려다보고는 그를 확 밀어냈다.
“뭐, 네가 좋아서 막 뛰어오고 끌어안고 이랬다는 착각은 하지 말라고.”
지젤이 도도하게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올려다보는 푸른 눈에 생기가 돌아 반짝거렸다. 누가 봐도 반가움을 넘어서, 신이 나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걸 가만 보던 미하엘이 애써 입꼬리를 끌어 내리며 품에서 벗어난 지젤의 허리를 훅 끌어당겼다.
“그럼, 너는 오해하도록 해.”
뭐야? 놀란 지젤이 푸른색 눈을 크게 뜨고 양 눈썹까지 들어 올리며 굳어 들었다. 1년 만에 본 미하엘은 언뜻 보면 벌써 성인 남자처럼 느껴졌다. 키도 너무 컸고, 변성기를 무사히 지난 목소리도 굵고 낮은 게 듣는 사람의 귀를 긁어내리는 것 같았다. 자신의 허리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이 갑자기 너무 커다랗게 느껴져서 지젤은 침을 꼴깍 삼켰다.
“나는 네가 좋아서 이러는 거니까.”
“어, 뭐?”
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은 지젤은 숨을 참아냈다. 코끝에 스치는 풀 내음과 미하엘의 향수 향이 그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바람이 살랑거리며 그의 흑발을 살짝 흐트러트리며 지나갔다. 지젤은 새삼스럽게 미하엘의 잘생긴 얼굴이 웃는 걸 보는 게, 심장에 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잘생겼잖아. 그런 지젤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옅게 미소 짓던 미하엘이 작게 소곤거렸다.
“너무 보고 싶었다고.”
숨결처럼 작은 목소리가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서 지젤은 몸을 움찔 떨었다. 얼굴에 열이 몰려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얘, 뭐야? 지금 나 꼬시는 건가?
“진짜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유치한 말이지만, 이해해 줘. 그가 정중하게 그녀에게 양해 아닌 양해를 구했다.
“그것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으니.”
미하엘이 자조적으로 웃음을 터트리고는 지젤의 말랑거리는 뺨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지젤은 그게 가끔 밥을 챙겨주는 길고양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 고양이도 기분이 좋으면 이렇게 몸을 문질러오고는 했다. 그래서 그녀는 고양이에게서는 대답을 듣지 못했던 질문을 꺼냈다.
“너 나 좋아하니?”
“방금 말했잖아.”
내 바보. 미하엘은 지젤의 말에 전혀 동요 없이 그녀를 꼭 끌어안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봄, 여름, 가을 내내 네 생각만 할 정도로 좋아해.”
“진짜 좋아한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확인하는 말에 미하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정한 지젤. 그걸 이제 알다니.
“이 새벽에, 겨울이 되자마자 오직 너 하나 보러 왔는데. 내가 너한테 좋아한다고 거짓말하는 것 같아?”
“왜?”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물들었지만, 지젤은 하고 싶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날 왜 좋아하는데? 이유가 뭐야?
“지젤.”
미하엘이 살짝 몸을 떨어트리고는 지젤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작년과는 다르게 옅은 화장기가 있어 보였다. 푸른 눈이 숨죽이고 이쪽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스치듯 매만지던 미하엘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는 넌?”
“나?”
“넌 나 왜 좋아하는데.”
“무슨! 누가 내가, 널? 아니!”
화들짝 놀란 지젤이 강하게 부정하며 미하엘을 밀어냈지만, 그는 밀리지 않았다. 작년에는 힘으로 밀면, 밀렸던 것 같은데. 얘, 이제는 운동도 하나 봐! 손에 닿는 단단하고 뜨거운 몸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누가 너 좋아한다고 했어? 아니거든?”
“그럼, 아직 안 좋아하는 걸로 해줄게.”
미하엘이 모르는 척해주겠다며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지젤을 꼭 끌어안았다. 정말 살 것 같았다. 이만큼 사랑스럽고 귀여운 사람이 또 있을까? 봄부터 가을까지 공허했던 마음이 이제야 충만해진 듯했다. 콩깍지가 두껍게 씐 미하엘이 지젤을 품에 안고 나른하게 숨을 내뱉었다.
“누가 누굴 좋아한다는 거야. 진짜 엄청난 착각이야.”
지젤의 뾰로통한 말에 미하엘은 한 번 더 웃음을 터트렸다. 얄밉기는 한데, 손에 감기는 붉은 머리카락이 기분 좋아서 그는 순순히 져주기로 했다.
“그래, 맞아. 내가 혼자 너 짝사랑하는 거야.”
“짝사랑이라니, 세상에. 얘가 못하는 말이 없어졌네.”
지젤은 계속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미하엘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
“왕비님께서 쓰러지셨다고요?”
아침 식사 중이던 지젤이 놀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다이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 앉아서 식사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인 그가 입을 열었다.
“다녀올 테니 오늘은 입궁하지 말고 여기 있어.”
“하지만, 왕자님께서 놀라셨을 텐데-.”
다이한은 조나단을 걱정하는 듯 얼굴을 구기를 지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왕궁에 가서 좋을 게 없었다. 쓰러졌다고는 하지만, 입은 멀쩡할 테니 보나 마나 지젤에게 악담만 퍼부을 게 뻔했다. 왕비는 매사 지젤의 탓을 하고는 했다. 지젤은 묵묵하게 그 말들을 다 들어주는 편이었기에, 그녀를 데려가봤자 좋은 꼴을 보지 못할 터였다.
“점심 전에는 돌아오도록 할 테니까 여기 있어.”
다이한의 말에 지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의 상태가 어떤지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지만, 너무 나서면 오히려 이상했다.
“오늘 하루 정도는 편히 쉬고.”
다이한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가며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당신 집에서 편히 쉴 수가 있겠어. 차라리 사람을 써서 은밀하게 알아보는 게 낫겠다 판단 내린 지젤은 울상을 지으며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
엘로이 백작 부인은 왕비에게 병문안을 거절당했다. 왕비가 다이한 후작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병문안도 허락하지 않은 것을 보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몸이 정말 많이 안 좋은가 본데. 그러나 그녀는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바로 등을 돌려 그곳을 벗어났다.
자신은 몸이 안 좋아 가지 못한다며 후작 부인인 지젤이 한 부탁이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바르한 자작의 부인인 스텔라가 이 일정을 함께했을 텐데, 어쩐지 그녀는 요 근래 저택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정원 구석에 앉아있는 조나단을 찾아간 그녀는 입을 삐죽이고 있는 왕자를 달래기 위해 주절주절 입을 열었다.
“왕자님, 정말로 후작 부인께서도 오고 싶어 하셨답니다? 다만 오늘 몸이 너무 아파서-”
“거짓말.”
술렁이는 왕궁 분위기에 위축된 조나단은 불안한 듯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울상 지었다.
“내일도 온다고 해놓고, 나랑 퍼즐 맞추기 하기로 했으면서. 거짓말쟁이.”
“내일은 오실 수 있을 거예요. 말씀처럼 매일 오셨잖아요? 오늘은 저랑-”
“싫어, 미워. 오늘 온다고 해놓고!”
“아니, 후작 부인께서 아프신 몸을 이끌고 올 수는 없잖아요.”
아이의 이기적인 원망에 엘로이 부인이 난처함을 감추지 못하고 한숨을 푹 쉬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물어왔다.
“몸이 아파? 또? 왜?”
낮은 목소리가 연이어 던지는 물음표에 놀란 그녀는 상대가 황태자라는 걸 확인하고 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황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몸이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냐고.”
이안은 그런 격식 따위는 크게 관심 없는지 거칠게 손을 내젓고는 재차 물었다. 병든 병아리처럼 기침을 하더니, 또 어디가 아프다고?
“그- 저도 잘 모르는 터라.”
백작 부인은 당황해서 더듬더듬 답을 했다가, 확 일그러진 황태자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덩달아 얼굴을 구겼다.
“그래서. 그렇지 않아도 바로 후작저에 갈 생각이랍니다. 어디가 아프신지 제가 병문안을-”
그녀가 단순히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다급하게 덧붙인 말에, 이안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가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이자, 백작 부인은 떨떠름하게 미소를 지었다. 뭔가 잘못 걸린 것 같았다.
***
비앙카는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책을 거칠게 빼앗는 미아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몇 번을 말해? 지젤 님께서는 쉬셔야 한다니까?”
미아는 미아 나름대로 답답했다. 지젤 님은 이럴 때 쉬어야 하는데 왜 자꾸 이런 걸 가져다드리는 거야.
“지젤 님께서 책을 가져오라 하셨다고요.”
“그러니까,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몸이 안 좋으신 분이 무리를 하시면 말려야지.”
미아가 날카롭게 비앙카에게 따지고 들며 손에 쥔 책을 내려다봤다. 지도가 붙어있는 역사책이었다. 그녀는 바보같이 하라는 대로 하는 비앙카가 답답하고 짜증스러워졌다. 지젤은 근 한 달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왕궁을 가지 않는 날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푹 쉬어야 했다.
“오늘 하루는 푹 쉬셔야 한다고. 후작님께서도 편히 쉬라고 당부하셨잖아. 비앙카, 잘 모르겠으면 그냥 가만히라도 있어.”
비앙카가 좀 짜증스러운지 눈을 질끈 감고는 미아의 손에 있는 책을 힘으로 잡아챘다. 땍땍거리며 트집 잡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이런 시답지 않은 걸로 말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비앙카!”
“이 책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고요.”
“너-. 너 진짜 생각이 없구나? 지젤 님은 쉬시는 것도 챙겨드려야 하는 분이야.”
미아의 말에 비앙카는 잠깐 뭔가 고민하다가 이내 짧게 혀를 찼다. 인형 놀이에 너무 심취한 것 같은데. 마음 같아서는 힘으로 빼앗고 내 앞길 막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너어! 지금 나한테 혀 찼니? 얘가 진짜-”
비앙카의 건방진 태도에 대해 미아는 한마디 쏘아붙여 주려고 했다. 지젤 님이 가장 아끼는 건 나지, 굴러온 돌인 네가 아니라고. 지젤 님이 가장 힘들 때 그 옆에 있던 건 나야. 하다못해 이제는 집사님도 지젤 님과 관련된 일은 내 눈치를 살피는데, 네가 뭐라고.
“무슨 일 있어요?”
“아, 도널드.”
“무슨 일인데요?”
얼마 전 주방에 들어왔다는 금발의 도널드가 격앙된 채 서 있는 미아와 비앙카 사이를 가로막았다. 멀끔하게 정돈된 머리와 옷을 보니, 복도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소란을 그냥 지나칠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미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은 게 무색해지게 비앙카가 입을 열었다.
“꽤 많이 불안하신가 봐요.”
미아는 지젤이 수를 놓는다든가, 후작을 위해 간단한 요리를 한다든가 하는 일에서는 너그러웠다. 비앙카는 그게 그것들이 미아가 잘 아는 일이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지젤 님이 책 읽는 걸 싫어하는 이유는, 본인이 글을 읽고 쓰는 걸 못해서 그런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