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뭐라고? 실제로 지젤에게 읽고 쓰는 걸 배우기 시작한 미아는 글에 서툴렀다. 치부를 찔린 미아가 이를 악물고 분을 삼켜내려다 이내 실패했다.
“비앙카, 너 진짜!”
“으아!”
미아가 격앙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두꺼운 책을 들어 비앙카의 뺨에 내려치려는데, 도널드가 능숙하게 그걸 막아섰다. 가볍게 한 손으로 책을 막아내 땅에 떨어뜨린 그는 미아를 제압이라도 하려는 듯 반대 손을 뻗었다가 이내 굳어 섰다. 그걸 본 비앙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입매를 어그러트렸다. 들어온 지 한 달이 안 됐다던데.
“일단, 진정해요. 대체 이게 무슨 책이기에 이렇게 싸우고 있는 건지.”
역사책? 이 지루하고 오래된 역사책이 뭐라고 두 하녀가 복도에서 싸우고 있는 거지? 도널드가 입을 꾹 다물고 고민하는 사이, 비앙카가 그걸 낚아채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지젤 님이 시키시는 대로 할 뿐이에요.”
“비앙카, 지젤 님을 위해서는!”
비앙카는 미아가 아득바득 소리치는 것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미아의 이상한 집착과 지젤을 위한다는 괴이한 궤변은 이제 크게 놀랍지 않았다. 이 저택에서 지젤은 새장의 새 정도로 취급받았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살아있는지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는 듯이.
“위해서는 뭐요? 그렇게 지젤 님을 걱정해서 의원이 죽은 것도 숨기시나요?”
“뭐?”
의원 이야기에 도널드의 눈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그걸 본 비앙카는 비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저택에 이런 날파리만 잔뜩 꼬이는지.
“숨기시는 것 같아서, 지젤 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얘기하지 마. 아프신 분이 놀라실 거야. 꽤 친근하게 지내온 분이신데 아시면-. 날 미워하실 거야.”
미아의 얼굴이 사색이 된 걸 보면서 비앙카는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도널드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로 급하게 자리를 떠나는 미아와 덤덤한 표정의 비앙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이놈의 저택은 어떻게 된 게 정상적인 사람이 하나 없어. 물론, 그 본인도 포함된 이야기였다.
“진짜 약속한 1년 휴가는 주시겠지?”
제인 경이 아무렇게나 한 말에 혹해서 이 고생 하는 건 아니겠지. 의원이 죽은 걸 후작 부인이 모른다는 것도 보고해야 하나? 숨소리보다 작게 중얼거린 도널드는 자신의 본업을 뒤로한 채 다시 감자를 깎으러 주방으로 향했다.
***
엘로이 백작 부인은 껄끄러우면서도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황태자가 나랑 같이 병문안을 가다니. 이제 곧 황제가 되실 분인데. 두고두고 이야기할 거리가 생겼다며 양 주먹을 꽉 쥔 그녀는 오는 내내 기분이 잔뜩 가라앉은 이안을 눈치채지 못했다.
“후작가는 귀족 가문 중에서 가장 큰 저택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는 어느 어느 왕가의 저택이었는데, 후작님이 작위를 받으신 다음부터-”
이안은 마차에서 내려 조잘거리는 백작 부인의 말에 집중하지 않았다. 저택 입구에 들어서자 삭막한 분위기가 숨이 막혀온다. 그는 수십 명의 사용인들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것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내부를 세심하게 훑었다.
건조해. 다 값비싼 물건들과 가구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느꼈다. 천장 위에서 반짝이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정말 그런 것인지, 단순히 기분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저하께서 계신 황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요.”
이안의 표정이 점점 딱딱해지는 걸 그제야 알아챈 백작 부인은 곤혹스러움에 입술을 짓씹었다. 뭔가 실수했나?
“지젤 님!”
이안은 계단을 다급하게 내려오는 지젤을 보며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쪼르르 달려오는 게, 그게 어쩐지 그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입고 있는 새틴 검은 드레스가 그녀의 하얀 피부를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두 분이서 같이, 그것도 아무런 언질 없이 어쩐 일이세요?”
드물게 정말 당황한 듯 눈을 연신 깜빡인 지젤이 바로 앞까지 당도하자 백작 부인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왕궁에 갔다가-”
“아프다며.”
이안이 싹둑 백작 부인의 말을 잘라먹고는 검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지젤은 자신의 얼굴 하나하나 뜯어먹기라도 할 것처럼 꼼꼼히 살펴보는 시선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야 형식적인 얘기지.
“예?”
이안은 자신을 향해 되묻는 지젤을 내려다보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말라도, 너무 말랐다. 지젤이 음식을 싫어하는 편이 아닌데. 앉은 자리에서 오렌지를 8개씩 먹던 걸 떠올리면, 지금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납득이 어려웠다.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않으니 아픈 거야. 그가 빠르게 판단하고는 짧게 혀를 찼다.
“우리 지젤 님께서는 뭐 이리 아픈 곳이 많은지.”
“걱정하실 정도로 안 아픕니다.”
누가 봐도 왕궁에 가지 않으려고 댄 핑계일 뿐인데. 지젤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자, 이안이 입을 삐죽였다. 안타깝게도 지젤의 일에는 감성이 먼저 앞서는 그는 정말로 지젤이 아파 누워있는 줄 알고 달려왔다. 물론, 지금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눈치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대가 아프다 하니, 나는 곧이곧대로 믿는 수밖에.”
어머. 엘로이 백작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태자와 지젤을 번갈아 쳐다봤다.
“매일 얼굴 보는 게 뭐 이리 힘들어, 나를 애타게 해.”
어머머, 뭐람? 황태자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오는 내내 말 한마디는커녕, 사람 무시하듯 대답도 하지를 않더니. 지금은 무슨 끙끙거리는 커다란 개 같잖아? 그녀는 모독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많은 말들을 삼키고는 지젤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호기심을 눈치챈 지젤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 저희가 바르한 자작의 사업에 대해 얘기하다가 말았죠? 제가 몸이 아파 정신이 없어서는-.”
지젤이 천연덕스럽게 이마를 턱 짚어내며 과장스럽게 안타까움을 표하는 걸 보면서, 이안을 고민했다. 이걸 장단을 맞춰줘야 하나. 그걸 눈치챈 지젤의 눈이 가늘어지자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할까?”
“바르한 자작의 사업에 황태자 저하께서도 관심이 있으신 건가요?”
그 양아치가 하는 사업이 정말 뭐가 있나? 그렇지 않아도 후작이 거금에 거금을 들이붓고 있다는 걸 이미 들은 엘로이 백작 부인이 눈을 반짝였다. 돈이 모이는 냄새가 나네. 그럼,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남편을 설득해 자작가로 가봐야겠다 마음먹은 백작 부인이 급히 허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스럽게도, 저는 가봐야겠습니다. 선약이 있는 터라-.”
“이런, 바쁘신데 이렇게 내 병문안까지 와주고 너무 고마워요.”
“아니에요, 쾌차하시길.”
지젤은 엘로이 백작 부인이 꼬리에 불붙은 것처럼 재빠르게 저택을 뛰쳐나가는 걸 보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백작 부인이 혹만 던져주고 사라졌네. 이안은 지젤이 벌써부터 피로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 걸 보면서도, 성큼 저택의 더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돈도 많다더니, 뭐 이리 칙칙해. 후작이 돈을 못 쓰게 하나?”
그림이라도 하나 가져다 놓지. 이안은 지젤이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은 걸 기억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지젤의 말을 듣고 화가 몇몇의 그림을 사서 황궁에 가져다 놓기도 했었다.
“제가 관심이 없어서요.”
“네가?”
그럴 리가 있나? 이안이 얼굴을 확 구기고는 뭐라고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저번의 와인처럼, 또 자신이 모르는 그녀가 있을지도 몰랐다. 갑자기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 같아서 그는 눈을 처연하게 내리깔았다. 그걸 가만히 보던 지젤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정원이나 좀 걷다가 돌아가시죠.”
저택 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벌써부터 한센 경과 집사가 이쪽을 예의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지금 이 시점에 괜히 저택 안에 이상한 말이 돌게 할 수는 없었다.
“같이 산책을 하자는 말을 다정하게도 하네.”
이안이 오른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는 걸 보면서, 지젤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알 것 같다가도 또 모르겠단 말이지.
***
“꽃이 이게 다야?”
이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넓은 정원에 꽃이 기껏해야 붉은 장미가 다라고? 그는 지젤이 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꽃 좋아하잖아.
“그럼, 황궁처럼 화려할 줄 아셨어요? 저는 정원 돌보는 취미는 없어요.”
사용인도, 제인 경도 없는 마당에 공손하게 웃으며 대답할 이유가 없지. 지젤이 냉정하게 대답하고는 저택의 옆면에 위치한 분수 쪽으로 가려는데, 이안이 홀로 방향을 틀어 저택의 뒤쪽 후원으로 향했다. 이안에게 시선 주지 않고 있어서 그걸 몇 걸음 멀어지고 나서 눈치챈 지젤이 황급히 그를 불렀다.
“저하.”
거긴 안 돼. 지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으며 그를 쫓았다. 후원 뒤쪽, 그 안쪽은 지젤만의 공간이었다. 저택 2층에서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기에, 지젤이 온전하게 사용하는 곳이었다.
“저하, 그쪽은 가지 않을 거예요.”
이안은 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지젤을 눈치채지 못하고 얼굴을 구긴 채로 걸음을 옮겼다. 후작 새끼는 돈을 한 푼도 안 쓰는 거야? 여느 귀부인들처럼, 저택에 갇혀 지내야 하는 지젤을 생각한다면 이럴 수는 없었다.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좋아하는 걸로 가득 채워놔도 모자랄 판에 개같은 새끼가.
“이안 님!”
지젤이 휙 하니 그의 어깨를 잡아채며 언성을 높였다. 그것에 놀란 이안이 검은 눈을 크게 뜨고 반사적으로 몸을 휙 돌렸다. 그 여파에 휘청거리게 된 지젤의 눈도 동그랗게 커졌다. 서로 당황스러워하는 그사이에 지젤이 중심을 잃자, 이안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낚아챘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