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외전 6 - 미쳐 있는 쪽은 나야
걸음을 옮기던 태경이 휙 돌아보는 것에 놀란 나미가 웃기지도 않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계속 거기 서 있겠다고?”
“아, 아니. 갈 거야. 가야지.”
나미가 냉큼 태경을 따라붙었다.
수안이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나미는 민망한 듯 샐쭉 웃어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나미의 남친 사수 작전은 그렇게 끝나나 보다 했다.
“오빠!”
애절함마저 느껴지는 이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태경 오빠, 솔직히 말해주세요.”
다 함께 차로 향하던 세 사람이 일제히 멈춰 섰다.
의아한 표정을 지은 태경이 가장 먼저 돌아섰고, 살벌하게 눈빛을 벼린 나미도 이내 돌아봤다.
어느새 벤치에서 일어난 여자가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태경을 애잔한 눈길로 바라봤다.
“나미 선배 좋아하지 않는 거죠?”
“뭐?”
“나 다 들었단 말이에요. 오빠 군대 가기 전에 다른 사람 좋아했었다고.”
뒤에서 잠자코 있던 수안이 괜히 뜨끔해서 나미의 표정부터 살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란 걸 깨달았다.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 뒤로 두 사람의 우정은 한층 깊어져서 말 몇 마디에 가볍게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수안은 조금 담담해진 표정으로 세 사람을 관망했다.
“근데 나미 선배가 하도 좋다고 따라다니니까 마지못해 호응해 주고 있는 거라면서요?”
“그래서?”
팔짱까지 끼고 후배를 삐딱하게 노려보고 있던 나미의 고개가 무심하게 툭 한마디 던진 태경에게로 획 돌아갔다.
“네? 어, 그래서, 그러니까 나한테도 기회를 줘요.”
가진 성격대로라면 이쯤 뭐든 한마디 했음 직한 나미가 잠잠했다.
먼저 좋아한 게 죄라며, 태경의 일이라면 한수 접고 보는 나미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남자가 내 남자임을 알려주겠다며 당찬 포부를 내보였던 순간이 언제라고, 아무 말도 못 하고 태경의 눈치만 살피는 나미가 한심하고 애달팠다.
“오빠를 오랫동안 좋아했어요. 아니, 사랑해요.”
울먹임이 섞인 고백에 수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애인을 옆에 두고 저런 소리를 고스란히 듣고 있는 태경의 등짝부터 한 대 쳐줄 요량으로 막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유나미, 계속 이렇게 넋 놓고 있을 거야?”
미간을 찌푸린 태경이 나미를 돌아보며 물었다.
꼭 어떻게 좀 해보라며 떼쓰는 듯한 말투라, 나미도 수안도 그를 황망한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어?”
태경이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나미의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살짝 걷어냈다.
나미는 혼란스러움과 원망이 뒤범벅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뭐야, 정신 못 차리지, 유나미. 하는 수 없네. 네가 안 할 거면 나라도 해야지.”
뭘 하려는 건지 묻기도 전에 나미의 뒤통수가 커다란 손에 감싸이고 곧장 입술이 맞물렸다.
조금 전 자신이 강제로 입술을 겹치고 관찰자를 의식하며 했던 키스와는 완전히 다른 키스였다.
촉촉하게 머금어졌다가 부드럽게 파고들어 와 감미롭게 엉겼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일순간에 사라지고, 태경과 그녀 둘만 남겨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거칠게 뛰는 심장 소리에 귀가 멀 것만 같았다.
“공연음란죄로 확 신고해 버리기 전에 적당히 좀 하지.”
수안이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나미는 미처 듣지 못했다.
어느 순간 입술이 놓여나고 태경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귓가로 스며들고 나서야, 주변의 소음들도 살랑대는 바람도 모두 되살아났다.
절로 감겼던 눈을 슬그머니 뜨고 올려다보자, 입꼬리가 올라간 태경의 입술이 얼굴 곳곳에 닿았다.
“아, 진짜, 후배들 보기 민망해서 더 못 있겠네. 대충 마무리하고 얼른 가자고, 이 화상들아!”
보다 못한 수안이 소리를 빽 질렀다.
차창으로 내내 밖을 주시하고 있던 현진이 높아진 수안의 목소리에 차에서 내렸다.
“나머진 둘이 있을 때 해야겠다. 그만 가자.”
태경이 장난스럽게 건넨 말에 나미는 이미 붉어진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고, 수안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현진 언니, 그냥 쟤네 버리고 가요.”
“좋은 생각이야. 얼른 차에 타.”
현진이 뒷좌석 문을 열고 수안에게 고갯짓을 했다.
수안이 막 차에 올라타려는데, 모든 걸 목격하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후배의 울먹임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어쩜 이럴 수가 있어요. 내가 고백까지 했는데, 어떻게…….”
태경의 나직한 한숨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수안의 귀에까지 닿았다.
드라마의 끝이 궁금해 차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처럼, 수안이 차 문을 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홍연희,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미쳐 있는 쪽은 나야.”
“거, 거짓말.”
“하아! 네 감정은 네 자유지만, 나한테 그걸 강요하진 마. 그리고 너 자신을 위해서도 백해무익한 짝사랑은 빨리 끝내는 게 좋아.”
냉랭한 투로 말을 끝낸 태경이 나미의 어깨를 감싸 돌아섰다.
입술을 동그랗게 만든 수안이 낯선 사람을 보듯 태경을 바라봤다.
어릴 적부터 몸에 뱄기 때문인지, 태경의 행동이나 말투에는 반항적인 기질이 조금씩 묻어났다.
하지만 저렇게 범접하기 조심스러울 정도로 냉했던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저건 나미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싶었다.
“흠, 쫌 멋있네.”
“백 여사, 쫌이 아니라 많이. 이젠 인정할 때도 됐잖아.”
귀도 밝지. 어느새 다가온 태경이 수안의 혼잣말을 냉큼 주워듣고 토를 달았다.
“당연히 많이 멋있는 건, 차도훈이지. 한태경 너는 아직 쫌이야.”
“야, 듣는 애인 섭하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울 태경이가 차 회장님보다 잘난 게 얼마나 많은데. 젊지, 또…… 젊지, 그리고…… 완전 젊지.”
수안이 차에 타는 걸 도와주고 나미가 타길 기다리며 뒷좌석 문을 잡고 있던 태경이 인상을 쓰며 나미의 이마에 꿀밤을 줬다.
나미는 꿀밤을 맞고도 뭐가 좋다고 배시시 웃다가, 차에 타기 전에 기어코 태경의 볼에 입을 맞췄다.
“언니, 얘네 버리고 가자니까.”
“백 여사, 재벌이 그렇게 야박하게 굴면 안 되지. 누님, 점심은 좀 근사한 데서 먹을까요?”
태경이 조수석으로 올라타며 현진에게 능글맞게 윙크를 해 보였다.
“언니, 얘네만 내려주고 우린 그냥 가요.”
“왜애? 어차피 점심 먹어야 하잖아.”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던 나미가 수안의 옷자락을 잡고 살랑거렸다.
뒤늦게 제가 저지른 일들이 창피해지기라도 한 건지, 양 볼이 발갛게 익어 있었다.
“못 볼 꼴을 너무 많이 봤더니 피곤해. 가볼 데도 있고, 너희들 따로 할 얘기도 있을 거고, 밥은 다음에 먹자.”
“그래? 그럼 다음에 형님이랑 같이 저녁이나 먹든가.”
태경의 입에서 도훈을 지칭하는 형님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느긋하게 기대앉은 수안이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서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5년이라는 시간은 물과 기름 같았던 도훈과 태경의 관계를 적정한 선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정도로 바꾸어놓았다.
그건 태경과 나미가 연인 사이로 발전한 것만큼이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한태경, 얄미워지려고 한다. 쫌 아쉬운 척이라도 하지.”
“어, 많이 아쉽네.”
수안의 핀잔에 태경은 영혼 없는 말을 즉각 되돌려주었다. 기가 막힌 수안이 헛웃음을 토해냈다.
“언니, 얘네 저기다 그냥 버리고 가요.”
“아쉬운 척 하래서 했는데, 왜?”
“영혼이 없잖아, 영혼이.”
태경의 뻔뻔한 물음에 인상을 팍 찡그리며 투덜대던 수안이 배 위에 손을 올리곤 여러 번 심호흡을 했다.
“내가 진짜, 우리 콩이 땜에 참는다.”
“헤헤. 콩아, 이모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쥐?”
나미의 너스레에 수안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얼른 내리기나 하셔. 일주일 만에 보는 거라며. 데이트 실컷 해.”
현진이 차를 세우자마자 태경과 나미를 쫓아내듯 밖으로 내보내곤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마주 손을 흔드는 나미의 어깨를 태경이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미소를 머금고 올려다보는 나미의 얼굴이 햇살 아래서 환하게 빛났다.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던 태경이 당연한 듯 나미의 이마 위로 입술을 내렸다.
멀어지는 차 안에서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수안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덧그려졌다.
“보기 좋네.”
“그러게요.”
룸미러로 수안이 편안하게 기대앉는 걸 확인한 현진이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다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 꼭 가야겠어?”
“이미 다 끝난 얘기가지고 왜 또 그래요. 위험한 데 아닌 거 언니도 알잖아요.”
“내키지 않아.”
“혹시, 오빠한테 보고한 거 아니죠?”
“아직은.”
“별일 없을 거예요. 약속해요.”
얕은 한숨을 토해낸 현진이 이내 운전에 집중했다.
차창 밖의 분주함이 빠르게 다가왔다가 지나갔다.
요즘 들어 잠이 부쩍 많아진 수안이 오수에 젖어든 사이, 차는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분식집 앞에 도착했다.
“같이 들어가?”
현진이 선이라도 보러 가는 것처럼 매무새를 정돈하는 수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요, 혼자 갈게요.”
걱정스러운 현진의 눈길을 뒤로하고 차에서 내리는 수안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