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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외전 5 - 이 남자가 내 남자다 (85/88)

85. 외전 5 - 이 남자가 내 남자다

한길에 나와 서서 고개를 쭉 빼고 기웃거리는 나미 앞으로 거대한 세단이 부드럽게 정차했다.

쓱 한 번 훑어본 나미가 슬금슬금 비켜서려는데, 차창이 조용히 내려갔다.

“나미야.”

머뭇거리는 듯한 수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뽀얀 얼굴이 차창 너머에서 쏙 내밀어지자, 나미가 어이없는 코웃음을 흘렸다.

“이 어마무시한 차는 뭐냐?”

“그렇게 됐어. 일단 타기나 해.”

“이걸 타고 학교를 가자고?”

나미가 탈 생각도 않고 삐딱하게 말을 건네자, 이번엔 앞쪽 차창이 내려가더니 운전석에 앉은 현진이 상체를 기울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유나미, 일단 차에 타서 얘기하자.”

“넵.”

툴툴대던 나미가 현진의 권유를 가장한 명령에 군기 바짝 든 이등병처럼 답하고는 냉큼 차에 올라탔다.

“백수안, 이건 아니지. 남친 뒤밟으러 가는데 이렇게 눈에 확 띄는 차를 타고 오면 어떡해.”

나미가 눈을 사납게 치뜨고 목소리를 낮춰 을러댔다.

“휴우, 이게 최선이었어.”

“나미야, 임산부한테 윽박지르기 없기다.”

현진이 정면을 주시하며 기어코 한마디 주의를 줬다.

나미의 눈치를 살피며, 멋쩍은 웃음을 머금은 수안이 육안으로도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배를 어루만졌다.

나미가 푸짐한 한숨을 토해냈다.

“하긴, 차 회장님 따라오겠다고 안 한 게 다행이지.”

수안이 뜨끔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나미를 획 돌아봤다.

“설마, 따라오겠다고 했어?”

“아아니이.”

남편 체면 살려보겠다고 부정하는 목소리가 처절할 정도로 드높았다.

안 그래도 임신한 아내를 극성스럽게 챙기는 도훈을 두고 보기완 다르다며 나미가 별의별 핀잔을 다했던 터라, 골프회동만 아니었어도 따라왔을 거라는 얘기는 꼭꼭 숨겨야 했다.

“너도 알잖아, 우리 남편 바쁜 거.”

“알지, 아다마다. 그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양반이 수시로 마누라 뒤꽁무니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어지간히 기가 막힌지 말을 다 끝맺지 못한 나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귀한 남편 나는 흉볼지언정 다른 사람 입에 오르내리는 건 또 별로라 수안의 입술이 절로 삐죽거렸다.

“나 걱정돼서 조금 따라온 거 가지고 그렇게 얘기할 거까진 없잖아.”

“조금? 하! 널 만나는 건지, 차 회장님을 만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구만, 조오그음. 아침 뉴스에서 봤던 사람이 떡볶이집에 불쑥 나타나질 않나, 카페 앞에 떡하니 서 있질 않나. 흥, 난 무슨 홍길동인 줄.”

“첫 임신인데 엄마도 안 계시고 하니까 오빠는 신경 써주느라 그러는 건데, 너는 어쩜…….”

일부러 엄마 얘기를 꺼냈더니, 나미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지고 삐딱하게 앉았던 자세도 그럭저럭 반듯해졌다.

“너는 뭐, 예능을 다큐로 받고 그러냐.”

“흠흠, 그래서 갑자기 추적 다큐멘터리를 찍어야 하는 이유가 뭔데?”

졸업을 앞두고 눈높이를 조금 낮춘 덕에 나미는 제법 건실한 중소기업에 입사를 했다.

태경이 군복무 중일 때 면회를 가서 정말 덮치기라도 한 건지, 현재 3학년에 재학 중인 그와는 연인 사이로 발전한 상태였다.

여전히 아옹다옹할 때가 많았지만, 두 사람은 제법 잘 어울렸다. 게다가 수안이 보기에 한태경은 나미한테 푹 빠져 있었다.

물론 나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휴! 팀플을 한다더라고.”

“그게 뭐?”

수안의 목소리에 황당함이 가득했다.

팀플의 의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뀐 게 아니라면, 이 화창한 주말에 도훈을 걱정시키면서까지 이럴 이유가 없었다.

“오빠라고 부르는 계집애가 전화를 했더라고.”

“팀원이겠지.”

“백수안, 오빠라고 했다니까.”

“후배면 당연히…….”

“당여언? 후배면 선배라고 부르는 게 당연한 거지. 오빠라고 하는 게 어떻게 당연해?”

나미가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자, 현진이 목소리를 쫙 깔고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

요 근래 늘 겪는 일이라 나미는 입만 삐죽거릴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괜히 미안해진 수안만 멋쩍게 웃어 보였다.

“흠흠, 엄청 친한 후배인가 보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라니까. 엄청 친한 거지. 그러니까 아주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오빠, 오빠, 난리가 아닌 거지. 한태경이 이노무 쉐끼.”

“그게, 내가 친하다고 한 건 그런 의미가…….”

“암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 봐야겠어.”

“뭘? 아니, 확인해서 어쩌게?”

나미가 초조한지 다리를 떨어댔다.

“나미야.”

“그러게. 나는 대체 어쩌려는 걸까? 왜 걔를 먼저 좋아해서는, 휴우.”

“나미야, 이러지 말고 차라리 허심탄회하게 말을…….”

“언니이, 잠깐, 잠깐만 멈춰주세요.”

별안간 수안의 말을 끊은 나미가 차창 쪽으로 얼굴을 바짝 가져다 붙였다.

수안도 덩달아 나미 뒤로 붙어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저래도 허심탄회해야 돼?”

6월 초입이라도 제법 더운 날임에도 벤치에 나란히 앉은 남녀는 필요 이상 붙어 앉아 있었다.

“어, 그, 뭐 가르쳐 주는 것 같지 않아?”

당황한 수안이 더듬거리며 말을 꺼내놨다.

노트북 화면에 집중한 채 말을 하고 있는 태경만 놓고 본다면 분명 그래 보이긴 했다.

단지, 옆에 붙어 앉은 여자의 눈이 노트북이 아니라 태경의 얼굴로 집중되어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 그런 것 같네.”

다행히 수긍하는 나미의 말에 안도했던 수안은 다음에 이어진 음산한 질문에 거친 숨을 삼켜야 했다.

“근데, 팀원이 왜 달랑 둘뿐일까?”

“하하, 그, 근처에 다른 사람도 있…….”

없구나! 없어.

토요일 정오라 그런지 캠퍼스 안은 한산했다. 아니, 한산한 걸 떠나서 오늘따라 사람 그림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백수안, 너 남편한테 잘해야 돼.”

“어? 갑자기 왜…….”

“어린 남자들 득실대는 학교에 와이프 보내놓고 싫은 소리 한 번 안 했잖아. 그거 대단한 거야.”

“그, 그런가?”

졸지에 자신이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수안을 그대로 둔 채, 나미가 차 문을 벌컥 열었다.

“나미야, 진짜 어쩌려고…….”

“이 남자가 내 남자다, 알려주고 와야지.”

비장한 말을 남긴 나미가 수안이 애달프게 부르는데도 아랑곳 않고 차 문을 닫아버렸다.

“나도 가볼까 봐요?”

“위험해. 그냥 있어.”

아예 입에 붙어버린 것 같은 현진의 위험하다는 소리에 뜨악한 것도 잠시, 수안의 시선은 곧 적진으로 돌격하는 장군처럼 척척 걸어가는 나미에게로 향했다.

“저러다 머리라도 잡아뜯으면 어째요. 어머, 뺨 때리려나 봐요. 가봐야겠어요. 저러다 크게 싸…….”

다급하게 차 문을 열어젖히며 걱정을 쏟아내던 수안이 차 밖으로 나서려다가 멈칫 굳어졌다.

수안의 걱정은 모두 기우였던 듯, 태경의 뺨을 감싸 쥔 나미는 허리를 숙여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햇빛은 찬란했고 바람조차 머무는 곳 없이 훅 지나가 버리는 확 트인 공간이었다.

가벼운 뽀뽀도 민망할 판에 나미는 아주 제대로 진한 프렌치 키스를 선보여 주고 있었다.

매일 과할 정도로 애정 표현을 하는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피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수안의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이제라도 말려봐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한 발짝도 움직이질 못했다.

“허억, 뭐, 뭐야.”

수안이 하고 싶었던 말이 별안간 육성으로 들려왔다.

다가오는 소리도 미처 듣지 못했는데, 양손에 비닐봉투를 든 남녀가 얼이 빠진 채 서 있었다.

관객이 더 늘어났다. 이제는 정말 쟤들을 말려봐야 했다.

“나미야, 유나미, 그쯤 하지.”

수안이 한껏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키스를 멈춘 나미가 쭈뼛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태경은 물론이거니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도 아예 넋이 나간 듯,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한숨을 토해낸 수안이 뜻밖의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 후배들을 향해 대신 사과의 말을 전했다.

“못 볼 꼴을 보여줘서 어쩌니. 쟤가 간혹 감정을 주체 못 할 때가 있는데, 하필이면 오늘이 그런 날이거든.”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후배 하나가 인사말을 건네며 넙죽 고개를 숙이자, 나머지도 어정쩡하니 인사를 했다.

“어, 그래, 반갑다. 근데, 끝나고 점심 먹으려는 거야, 아니면 점심 먹고 마저 하려는 거야?”

“아, 대충 마무리하고 치킨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같이 드실래요?”

얼굴을 살짝 붉힌 남자가 비닐봉투를 들어 보였다.

여자 후배 둘은 안면이 있었지만,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니요, 사양할게요. 다 같이 둘러앉아 치킨 먹기엔 분위기가 좀 애매하네.”

자분자분 말을 건넨 수안이 여전히 태경의 옆에 앉아 울상이 되어 있는 후배를 바라봤다.

이름까지 생각나진 않아도 제법 익숙한 얼굴이었다. 학교 다닐 때 태경의 주변을 맴도는 그녀를 여러 번 목격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는 대수롭잖게 여겼던 일이 지금에 와서야 새롭게 인식이 되었다.

아무래도 꽤 오래된 짝사랑인 듯했다.

줄곧 옆에 붙어 있었던 나미의 마음도 몰랐던 녀석이니,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건 뻔하고.

수안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 뭉뚱그려진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치킨은 너희들끼리 먹어야겠다. 나 먼저 간다.”

조금 멍해 있던 태경이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불쑥 솟구쳐 일어나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마치 장군 같았던 좀 전의 모습은 모두 거짓이기라도 한 양,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던 나미가 화들짝 물러났다.

“유나미, 뭐 해?”

“어? 나? 나 그냥 서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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