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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수안아, 이리 와 (30/88)

30. 수안아, 이리 와

총괄사장 산하 전략기획팀의 회의는 그야말로 맹렬한 토론의 장이었다.

도훈이 총괄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전략기획팀을 구성한 것이었다.

자신의 뒤를 이을 차기 회장으로 공공연하게 도훈을 언급하곤 했던 이 회장이 타계한 지금, 도훈에겐 흔들리는 주주들의 마음을 붙잡아둘 만한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했다.

전력기획팀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면밀히 검토하고 직접 면접까지 봐서 뽑은 자신만의 팀이었다.

그런 만큼 팀원 한 사람 한 사람 개성도 프라이드도 강해서 회의만 했다 하면 분위기가 과열되기 일쑤였다.

과열된 분위기를 상쇄시키고 의견들을 선별 취합해 최고의 결과물을 이끌어내는 건, 도훈의 몫이었다.

논쟁에 직접적으로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도훈은 뭐 하나 간과하는 법이 없었으며 오류 또한 완벽하게 집어냈다.

나이는 어리지만 결코 무시할 수없는 존재, 일반인과는 생각하는 관점부터 다른 뼛속까지 CEO로 타고난 사람, 그게 바로 차도훈이었다.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도 분위기를 압도하는 도훈의 카리스마는 회의석상에서 빛을 발했다.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오후 6시에 시작된 회의가 한 시간 넘게 이어지는 동안, 도훈은 말 한마디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만 펜으로 톡톡 쳐대고 있었다.

집중력 하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도대체 듣고 있기는 한 건지.

날이 서 있는 건 여전하지만 어딘가 먼 곳에 닿아 있는 것 같은 눈빛에 팀원들마저 회의에 집중을 못 하고 도훈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묘해진 회의실 분위기 따위 아랑곳없는 도훈은 까맣기만 한 휴대폰에 뭐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시하다가, 회의 시작 전 현진의 보고를 다시 떠올리고는 미간을 사납게 찌푸렸다.

며칠 사이 살이 내려 한층 날카로워진 윤곽에 사나움까지 더해지니, 제 세상 만난 듯 핏대를 세우던 팀원들의 목소리가 차츰 줄어들고 있었지만, 도훈은 알아채지조차 못했다.

그리고 때마침 빛을 발하는 휴대폰.

팀원들의 시선이 모두 그리로 향했다. 그걸 냉큼 집어 드는 도훈을 보며 팀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회의실에 휴대폰을 가지고 들어오지도 않던 사람이 테이블 위에 떡하니 올려놓고 회의 내내 주시하던 것도 모자라, 전화가 오자마자 마치 개껌을 낚아채는 개처럼 달려드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장님, 혹시 저희 모르게 다른 프로젝트라도 추진하시는 겁니까?”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니 유추해 낼 수 있는 질문은 그거 하나라, 자신들을 제외시킨 것에 마음 상한 팀원들을 대신해 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무슨 소립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진출 건은 아무리 가시적인 효과를 노리는 거라 해도 규모에만 치중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1∼2년 해먹고 말 것도 아니고, 가격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안부터 찾아보세요. 오늘 회의는 이만하겠습니다.”

빠르게 말을 쏟아낸 도훈이 휴대폰을 챙겨 회의실을 벗어났다.

“안 듣는 것 같더니 다 듣고 있었나 보네.”

얼빠진 팀원 하나가 중얼거린 소리였다.

“자, 다들 넋 놓고 있지 말고 어서 움직이자고. 사장님 성격상 힘들다고 피해 갈 양반도 아니고, 깨지고 싶지 않으면 방법들 찾아봐.”

계속해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든 채 받을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는 도훈을 봤더라면 결코 하지 못했을 말이 팀장에게서 흘러나왔다.

한편, 며칠째 필사적으로 수안을 피했던 도훈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다가, 체념의 한숨을 토해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바닸따!]

못내 그리웠던 목소리, 하지만 어딘가 다른 음성에 도훈의 신경이 곤두섰다.

개강파티에 참석한다더니, 얘가 기어코 술을 마셨나 보다.

그때부터 마음이 한정 없이 급해졌다. 오빠 어쩌고 하는 놈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는 몸이 먼저 움직였다.

뭘 위해 수안과 거리를 두려 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당황한 지희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지만, 답을 줄 여유도 없었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댄 채 내달리다가 보고 싶다는 말에 숨이 멎을 뻔했다.

장애물 하나 없는 복도에서 무언가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비틀대기까지 했다.

현진에게 연락을 취해놓고 수안이 있는 곳을 향해 가는 동안, 혼란스럽고 불안한 와중에도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설레었다.

수안을 피해 다니는 동안 왜 밥맛도 없고, 잠도 오지 않았는지 이제야 명확히 알 것 같았다.

잘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완전히 한계까지 치달았음을 깨달았다.

뭐가 됐든 지금 당장 백수안의 밤톨만 한 뒤통수라도 보지 않으면 숨이 멎어버릴 것 같은 조급함이 그를 짓눌렀다.

수안의 엉뚱함과 당돌함은 매번 그를 당황하게 만들지만, 매번 그렇듯 그에게서 동의를 이끌어낸다.

그래, 그 또한 수안이 보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현진이 알려준 대학로의 감자탕집으로 향하며 도훈은 주체하기 힘든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바빠서, 맞닥뜨리게 될 상황 같은 건 예상조차 못 했었다.

현진에게 수안을 데리고 나오라 지시해 놨으니 근처 어딘가에 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저런 황당한 장면을 마주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길가에 대충 주차를 끝낸 도훈이 차에서 막 내렸을 때, 감자탕집 에어간판을 부둥켜안고 버티는 수안을 회유하고 있던 현진이 한숨을 내쉬며 어딘가를 향해 손짓을 해 보였다.

아무래도 수안을 아예 들어서 옮길 다른 경호원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현진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해 있던 잠깐 사이, 에어간판을 감싼 수안의 팔을 한 남자가 덥석 잡아챘다.

“것 봐요. 수안인 가기 싫다는데 왜 자꾸 억지로 데려가려는 거야. 수안아, 이 아줌마 말 들을 거 없어. 이거 놓고 오빠랑 가자. 응?”

“아, 아줌마? 어린놈의 쉐끼가 일반인이라고 봐줬더니, 뭐 아줌마아.”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현진이 재호의 멱살을 잡으려는 찰나, 뒤에서 쑥 뻗어 나온 손이 먼저 그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아아아, 뭐야, 어떤 노옴…….”

어찌나 거세게 틀어쥐었는지 절로 앓는 소리를 내면서 돌아봤던 재호가 도훈의 눈빛에 압도되어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아, 사장님, 오셨습니까.”

저만치서 달려오는 남자에게 다시 수신호를 보낸 현진이 깍듯하게 인사를 차리는 것도 본 체 만 체, 도훈의 시선은 재호가 틀어쥔 수안의 팔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팔 놓지.”

“아아, 아씨, 대체 뭐 하는 놈이……신데 남의 어깨를 막 잡아 비트는 건데요?”

고통을 참지 못한 재호가 수안의 팔에서 손을 떼고는 눈을 부라리다가, 도훈의 기세에 눌려 흠칫 몸을 사렸다.

에어간판과 사랑에 빠진 듯 딱 붙어 있던 수안이 귀에 익은 목소리를 캐치해 내고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어, 와따. 헤헤.”

도훈을 발견한 수안의 얼굴이 활짝 만개했다.

“수안아, 이리 와.”

손을 내민 도훈에게로 가려는 수안의 앞을 재호가 떡하니 가로막고 섰다.

“다, 당신이 뭔데 우리 수안이한테 이리 오라 마라 하는 겁니까?”

미간을 일그러뜨린 도훈의 시선이 현진에게로 향했다. 마치 눈으로 얘는 뭐냐 묻는 듯했다.

“같은 과 선배랍니다. 죄송합니다. 바로 치우겠습니다.”

“하씨, 이거 안 놔? XX 내가 무슨 쓰레기야. 치우긴 뭘 치워? 어이, 대체 어디 사장님인데 이렇게 뻣뻣하시나 그래. 당신 내가 누군지 알면 아마 엄청 후회, 어엇.”

현진의 손을 뿌리치고 도훈에게로 다가들던 재호의 몸이 자그마한 덩치에 밀려난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자그마한 덩치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대다가, 재빠르게 움직인 도훈의 품으로 떨어진 것도 순식간이었다.

도훈의 팔에 허리가 감긴 수안이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재호를 사납게 흘겨봤다.

“왜 울 아저씨한테 뭐라고 하는 건데요? 선배가 뭔데에. 나아쁜 노옴.”

“무, 뭐? 야, 백수안, 이게 예쁘다 예쁘다 해줬더니 아주 기어오르려고 드네. 감히 나한테 나쁜 노옴? 아아, 아줌마, 이거 놔봐. 아 쫌, 놔보라고.”

수안을 향해 번쩍 들렸던 재호의 손이 현진에게 잡혀 뒤로 꺾였다.

재호의 앓는 소리를 들은 수안의 입술이 비웃음을 담고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술기운에 가뜩이나 대담해졌는데, 현진에다 도훈까지 곁에 있으니 세상 무서울 게 없어져 버렸다.

“웃기구 있네. 다른 선배들이 말하는 거 내가 다 드러꺼등요. 별것도 아닌 게 부모 빽 믿구 예쁜 애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구. 근데여, 안달해도 나한테는 안 되거등요.”

새침한 표정을 한껏 꾸며낸 수안이 검지로 재호의 이마를 쿡 찔렀다.

도훈에게 빠듯하게 안겨 있는 몸은 그런대로 중심을 잡고 있었지만, 바람 부는 날 깃발처럼 일렁이는 검지는 목표 지점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하마터면 재호의 눈을 찌를 뻔했다.

그나마 현진이 재호의 뒤에서 머리를 잡아 가져다 댔기에 수안의 손가락은 이마를 콕 찌르고 떨어져 나갈 수 있었다.

“이거는 비밀인데요오, 울 아저씨 빽이 훨씬 더 엄청날걸요. 그러니까아, 다시는 나한테 껄떡대지…….”

정말 비밀을 알려주듯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속삭이던 수안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아예 멈춰 버렸다.

수안의 몸이 축 늘어지기 무섭게 도훈이 냉큼 안아 들었다. 작은 몸이 도훈의 품으로 쏙 들어왔다.

마음에 안 드는 듯 미간이 한껏 일그러진 중에도 도훈의 입꼬리는 슬쩍 치솟아 있었다.

분명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데, 간만에 제 품으로 들어온 수안 때문에 설렘이 가득한 가슴은 화조차 잊었다.

“여기 정리하고 그만 들어가 봐요.”

“네, 알겠습니다.”

현진의 대답을 듣고 막 돌아섰던 도훈이 무슨 이유에선지 다시 몸을 돌려 재호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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